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요작가 Apr 21. 2024

직장인의 기술

글.그림 김유미

한때는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부러웠었다. 출퇴근 시간 확실하고 방학이라는 긴 휴가도 있고, 아이들과 함께라 눈치 볼 사람도 없을 테니. 속사정을 알고 보니 선생님도 직장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르치는 일 말고도 평가, 계획 등 행정업무에 시달리는 것을 초등학교 교사인 지인을 통해 알게 되었다. 방학에는 연수 또는 연구에 참여하고 보고서를 쓴다고 했다. 드라마<더 글로리>에서 선생님인 주인공이 야근으로 복수할 시간이 부족할 거라던 사람들의 농담은 현실이었다. 


 화가도 마찬가지였다. 화가는 그림만 잘 그리면 되는 줄 알았는데, 웬걸 캔버스가 아닌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씨름하다 작업을 공치는 날도 있었다. 의외로 글 쓰는 일이 많았다. 기본적으로 작품을 설명해야 한다. 이미 그림으로 표현했건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글로 써야 했다. 작가를 소개하는 포트폴리오도 필수다. 파워포인트를 여기서 쓸 줄이야. 작품 캡션은 엑셀로, 엽서나 포스터 등 홍보물 제작은 포토샵을 동원했다. 갤러리와 관계가 생기면서 몇 가지 업무는 대신 해줘 한숨 돌렸건만, 그에 따른 계약서나 영수증, 세금 처리와 같은 사무가 생겨났다. 회사였다면 홍보팀과 재무팀에서 담당할 텐데, 직접 해결해야 했다. 언젠가 이런 관리를 해 줄 매니저가 있어야 하려나 하는 생각에 피식했다. 일단 동생이 산수를 잘하니 잘 꼬셔놔야겠다. 고흐처럼 말이다.


 꼬리를 무는 상상을 자르고, 당장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누굴 채용할 것도 없다. 내가 누군가? 10년 넘게 사무직을 하고 있지 않는가. 붓만큼이나 오피스프로그램을 다루는 데 익숙하다. 과제가 생기면 일정계획부터 진행 상황 공유 및 정보, 결과물 전달 등 담당자와의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깔끔한 오피스 매너까지 겸비한 프로의 직장인이다. 이래서 경력직, 경력직 하나 보다. 이런 일들에 피로감을 느껴 사직서를 품고 지내는데, 결국 화가도 직장생활의 연장이었다.


 직장인의 기술을 발휘하며 일하고 그리며 지내던 날, 겨울 전시를 함께하기로 한 갤러리 관장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작가님, 바쁘시죠?’라고 시작된 문자에는 요청한 자료가 아직 안 왔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실수를 할 리가 없는데 놀란 마음에 주고받은 메일을 보니 제출 기한이 거의 한 달이나 지나 있었다. 아니 하루 이틀도 아니고 왜 이렇게나 기다렸냐고, 미안함에 되려 따지듯 물었다. 관장님은‘일하면서 작업하느라 정신없을 텐데, 괜찮아요.’라며 오히려 나를 달래줬다. 


 지난 아트페어 때도 그랬다. 바쁘다는 이유로 페어장을 찾지 못했다. 마지막 날 작품을 철수하러 겨우 얼굴을 비췄다. 작가가 꼭 참석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관계자와 인사 나누면 좋을 테고, 작품과 관람객을 마주하는 소중한 순간이기에 현장에서의 경험도 필요하다. 특히 신진작가에겐 중요한 시간임을 알지만, 주중엔 야근으로, 주말엔 다음 전시를 위한 작업으로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관장님께 미리 양해 말씀을 드렸지만, 마음은 꼬깃꼬깃했다. 그런 내게 관장님은 직장인이니 괜찮다고 했다. 아니, 직장인에게도 암묵적인 까방권(까임방지권)이라도 있는 건가.


김유미 작가, 힘들면 돌아오거라/72.7x53.0cm/oil on canvas/2020


 운이 좋게 내가 그린 그림이 조금씩 사랑받기 시작하면서 작품활동과 관련된 다양한 제안이 들어 온다. 뭔가 하나씩 이뤄지는 걸 직접 경험하게 되니 그리고 쓰고 싶은 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나의 재능과 미래가 사무실에 갇혀 제대로 빛을 발휘하지 못하나 싶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다른 일에 쏟는 에너지를 꿈에 좀 더 끌어다 쓰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다고 회사 일을 적당히 하기엔 맡은 책임이 커졌기도 하고, 월급 값은 제대로 하고 싶다. 주인의식 같은 건 없다. 어차피 회사는 내가 없어도 되는 걸 알고 있다. 어쨌든 하기로 한 이상 내가 맡은 일의 주인이기에 그저 잘 해내고 싶다. 지금 부서에서는 나의 또 다른 직업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 신경이 쓰인다. 꿈이 커지면서 일과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다.


 평소에 꾸준히 작업하고 연차를 잘 이용하면 근무에 별문제가 없다. 갑자기 전시가 생기면 상황이 달라진다. 미처 업무조정을 하지 못해 갤러리 미팅이나 작품설치 때 곤란을 겪게 된다. 전시 기간에 작가를 만나러 온 관람객이 있다고 하면 그저 미안한 마음이다. 그럴 때면 다들 괜찮다고 했다. 내 사정을 알고 관장님도, 관람객도 일정을 변경해 주거나 다음을 약속했다. 한번은 부장님이 어떻게 알고 얼른 퇴근하라 했다. 주말에 가면 된다고 해도, 첫날인데 작가가 자리해야 한다며 자신의 화장품 파우치를 내밀었다. 부장님이 골라 준 립스틱을 바르고 갤러리를 찾았다. 관장님은 어떻게 나왔냐며 나를 반겨주었고, 전시장 한쪽에는 사무실에서 보내 준 꽃바구니가 웃고 있었다. 


“There is no perfection only life
Milan Kundera


 직장인이란 이유로 누리는 혜택은 생각보다 많았다. 월급만 받는 게 아니었다. 매일 출근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응원의 대상이 된다. 퇴근하고 그림을 그린다니 사람들은 나를 칭찬한다. 모두가 나를 괜찮다고 하는데, 정작 나는 내가 괜찮지 않다. 어쩌면 내게 가장 혹독한 사람이 나인지도 모르겠다.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나머지 작은 실수에도 속상하고 좌절한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적당히 해내도 된다. 직장과 직업, 두 마리 토끼를 잘 키우려고 애쓰는 중에 정작 토끼 주인은 챙기지 못했다. 자신을 돌보는 기술도 한두 가지쯤은 익혀 둬야 한다. 살다 보면 지금처럼 완벽하지 못한 날이 생길 테다. 그럴 때면 살짝 눈을 감아주자.


관장님과 부장님처럼 나도 내게 괜찮다고 말해줘야겠다. 그리고 힘들면 돌아가도 된다고.


김유미 
일과를 끝낸 저녁 시간에 그림을 그린다. 그림만큼 글짓기도 좋아한다. 온종일 그리고 쓰며 사는 삶을 꿈꾼다. 쓴 책으로는 『물감을 사야 해서, 퇴사는 잠시 미뤘습니다.』가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행의 반대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