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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요작가 May 05. 2024

한가하기 좋은 시간

글.그림 김유미


타다다... 다다닥. 키보드 위에서 춤추던 손가락이 느려진다.


눈꺼풀은 졸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끔벅끔벅한다. 누가 봐도 졸고 있는 모양새다. 파티션 너머로 누가 볼까 도리도리 고개를 저어가며 자세를 고쳐 앉아본다. 이럴 때가 아니다. 퇴근 전에 결재받으려면 속도를 내야 한다. 서둘러 손을 마우스로 옮겨 타닥거리지만, 정작 마우스 커서는 카톡 창을 향했다. 어느새 회사 단톡방은 아래로 밀려있고 친구들의 대화가 몰려왔다. 하나같이 졸린다며, 일하기 싫다는 소리다. 나도 그렇다며 다크써클을 한 이모티콘을 보냈다. 시계를 보니 오후 3시가 조금 안 됐다. 퇴근의 설렘을 느끼기엔 아직 이르다. 서랍에 쟁여 둔 촉촉한 초콜릿 과자를 한입 물고 이어폰을 장착했다. 최대한 집중해 보겠다는 의지다. 비장한 각오로 일을 이어서 해본다. 타다다다탁! 한참 제안서를 쓰고 나서 시계를 다시 봤다. 겨우 10분이 지났다.


이번엔 핸드폰을 들고 친구를 찾았다. 웬일인지 이모티콘을 보낸 이후로 답이 없다. 아무래도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으샤! 괜히 어깨를 한번 돌리며 텀블러를 챙겨 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점심을 먹은 후 첫 기립이다. 참았던 커피를 마실 생각으로 직원휴게실을 찾았다. 못 보던 차가 있어 커피 대신 따뜻한 물을 채웠다. 티백을 우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저 멀리 롯데월드타워가 보인다. 사는 동네와 가까워 집으로 가는 이정표와 같다. 미세먼지 없는 맑은 날이면 롯데월드타워를 둘러싼 구름이 내게 빨리 집으로 오라고 둥실거린다.


지하철 2호선이라도 지금은 사람들이 별로 없겠지? 텅 빈 2호선을 타는 행운이 생긴다면 잠실역을 그대로 지나쳐 한강 다리 위를 달리는 순간을 제대로 누리고 싶다. 지하철 창문을 프레임 삼아 근사한 한강 사진을 건질 수 있을 텐데. 서울숲이든 홍대든, 어느 곳에서 친구를 만나 조각 케이크를 하나 두고 수다의 향연을 펼치고 싶다. 아니면 TV를 보다 잠든 엄마의 등에 기대어 함께 잠들어도 좋겠다. 그러려면 부산집까지 가야 하니 그냥 자취방에서 지난밤에 보다가 만 영화를 끝까지 봐야겠다. 평일 낮에 이런 자유를 누리려면 아무래도 로또가 답이겠지. 나른한 상상을 하는 사이에 차는 잘 우러나 복숭아 향이 가득 찼고 사무실에서는 나를 찾는다.


어떤 날에는 옆 부서 과장님에게 신호를 보낸다. 사내에도 커피머신이 있지만, 우리는 1+1 쿠폰을 핑계로 카페를 향한다. 잠시 사무실에서 탈출해서 맛보는 자유는 직장생활의 숨구멍이 된다. 시작은 업무 이야기지만, 자연스럽게 잡담으로 이어진다. 내가 추천한 영화<더 웨일>을 과장님도 주말에 봤다고 했다. 그녀의 영화리뷰는 기가 막힌다. 우리는 영화 속 대사 ‘disgusting’을 이야기하다 죽음까지 논하게 되었다. 과연 나는 디스커스팅한 내 모습을 어디까지 보여줄 수 있을까? 주인공은 죽음을 앞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다음 글감으로 괜찮겠다 싶어 얼른 메모장 앱에 기록했다. 때로는 쓸데없는 수다가 새로운 영감이 되기도 한다. <더 웨일>에서 메멘토 모리로 대화가 이어지던 중에 부장님에게서 전화가 온다. 아쉽지만 3시의 방에서 나와야 한다.


3시의 방/53.0x45.5cm/oil on canvas/2019, 김유미 작가

이제 본격 퇴근을 향해 업무에 집중해야 한다. 아차 하는 순간 6시가 될 수가 있다. 3시란 참 신기하다. 지독하게도 시간이 안 가는 듯하다가도 어느 지점을 넘기면 순식간에 저녁이 된다. 사르트르 소설 속 글귀처럼 무언가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른 시간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어정쩡한 오후 3시를 내 하루의 쉼표라 생각하고,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그럴싸하게 표현했지만, 그냥 땡땡이치겠다는 소리다.


사무실에서 바쁘지 않아 보이면 여러모로 위험하다. ‘요즘 일이 없나 봐?’ 하며 업무를 더 받을 수도 있고 열정이 없는 이미지로 비칠 수도 있다. 회사가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바쁘지 않으면 괜히 눈치를 보게 된다. 뭔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에 약속을 잡고 계획을 하게 된다. 휴일에는 너무 쉬었다고 반성하며 열심히 살겠다고 무한 다짐한다. 바쁘게 사는 일엔 사회적 기대를 만족시키는 우월감이 따르긴 하지만, 사실 우리는 한가함에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 한가하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여유를 부릴 때에 신기한 힘을 발휘한다.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잊었던 생각을 해내는 등 뭔가를 만들어 내고 있다. 딱히 폼 나는 일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지금’이라는 순간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위대한 사람은 시간을 창조해 나가고 범상한 사람은 시간에 실려 간다.
그러나 한가한 사람이란 시간과 마주 서 있어 본 사람이다.
피천득 「인연」 中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고 하지만 평균 수면시간이 긴 편인 나는, 남들보다 짧은 하루를 산다. 잠을 줄이면 될 텐데 그게 참 어렵다. 대신 깨어 있는 동안은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기로 했다. 하루를 쪼개어 살고 있다. 예를 들면 낮에는 직장을 다니고 밤에는 그림을 그린다는 식이다. 그사이 좋아하는 사람도 만나야 하고 보고 싶은 책도 보려니 자꾸만 시계를 확인한다. 시간을 절약해서 더 많은 시간을 쓰는 줄 알았지만 착각이었다. 바쁘다 바빠! 를 외치며 시계의 숫자에 쫓기고 있었다. 그럴 때 나를 잡아주는 것이 오후 3시의 졸음이다. 적당히 식은 오후의 햇살이 잠시 쉬어가라고 내게 속삭였다.


아무리 촉박한 상황이라도 마음이 한가하면 자연스럽게 여유가 생긴다. 반대로 마음마저 초조해지면 제아무리 계획하고 분주하게 움직인다 해도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달리기를 시작할 때 자신의 호흡에 속도를 맞추라고 배웠다. 빨라지는 발에 호흡이 따라가게 되면 이내 평정심을 잃게 되고 오래 뛰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달리기로 배운 호흡은 일상에서도 유용했다. 조급한 상황이 오면 오후 3시의 나른함을 떠올리며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그렇게 잠시 호흡을 고르면서 주위 풍경을 바라본다. 한 발짝 물러나 보면 세상에 그렇게 급한 일도, 심각할 일도 없다.


언젠가 안식년 같은 긴 휴가로 부지런히 보낸 오늘을 보상받기를 꿈꾸지만, 그날의 휴식을 미리 조금씩 꺼내 써도 괜찮다. 미래를 준비하는 계획만큼이나 당장 현재를 어떻게 사는 문제도 중요하기에, 매일의 망중한을 즐기며 남은 하루를 기대한다. 어쨌든 오후 3시는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니까.


김유미 
일과를 끝낸 저녁 시간에 그림을 그린다. 그림만큼 글짓기도 좋아한다. 온종일 그리고 쓰며 사는 삶을 꿈꾼다. 쓴 책으로는 『물감을 사야 해서, 퇴사는 잠시 미뤘습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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