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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의 기쁨과 슬픔

어느 날 문득 찾아 올 기회를 위해

by 일요작가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화가'가 되었노라 말하기가 어렵다. 사실 언제부터 작가라고 소개할지도 애매하다. 개인전을 하면 작가로 인정받기도 하고, 그림을 팔았으면 작가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사전적으로 '화가'란 '그림을 그리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다. 직업의 정의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을 말한다. 화가는 그림만 그려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다. 더구나 무명의 화가라면 그리는 일은 물론, 적극적으로 그림을 알려야 한다. 화가는 전시를 해야 한다.


무엇보다 개인전을 해야 했다. 가수가 데뷔 후 앨범을 발표하듯, 화가도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요즘 가수들이 싱글을 발표하며 활동하기도 하는데, 개인전을 하지 않고 작가 활동을 시작한 내가 그런 모양이다. 개인전을 열려면 전시작이 적어도 20점 정도가 필요했다. 우선 그림이 필요했다. 나는 일 년 동안 개인전을 목표로, 작품 만들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런 나를 보고 선생님은 "작가라면 전시해야 한다."라고 했다. 하지만 개인전을 하지 않은 작가에게 전시 기회를 얻는 건 쉽지 않았다. 공모전이 좋은 방법이었지만, 대부분 '최소 개인전 1회'라는 자격 요건으로 두었다. 지원할 공모전이 없다고 하면, 선생님은 계속 찾아보라고 했다. 선생님 앞에서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때마침 아시아 대학생 청년 작가미술 축제(아시아프) 작품 공모전을 진행하고 있었다. 아시아프는 청년 작가뿐만 아니라 신진 작가를 위한 아트페어로, 만 35세 이상 작가는 '히든 아티스트' 분야에 지원할 수 있었다. 개인전 횟수나 작품 크기에 대한 제한은 없었고, 심사비 5만 원이 있었다. 나이는 물론 전공 제한도 없었으며, 출품 가능한 작품도 충분했다. 고민 없이 지원하면 될 일이었다.


지원서를 다 채우고도 쉽게 '접수 완료'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심사위원들이 내 작품을 평가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들은 내가 미처 보지 못하는 대비, 질감, 붓 터치까지 꼼꼼히 들여다볼 텐데, 처음 받는 전문가의 평가가 두려웠다. 그럼에도 '작가라면 전시를 해야 한다.'는 주문의 힘으로 마감 직전 그림 두 점을 추가해 접수했다. 몇 주 뒤, 히든아티스트로 선정되었다는 합격 문자를 받았다. 가장 먼저 선생님께 소식을 전했다. 그의 반응은 나를 한 번 더 기쁘게 했다. "당연한 거 아니가?"


처음 맛본 공모전 합격은 공식적인 칭찬 같았다. 탄력을 받아 하나둘 찾아보니, 생각보다 문이 많이 열려 있었다. 신진 작가를 위한 창작지원금, 갤러리 공모 같은 기회들은 내가 몰랐던 세계였다. 나는 서울시 신진 미술인을 위한 일상 전시 사업에 지원했고, 그 결과로 서울시청 박물관과에 작품을 매도할 기회를 얻었다.


공모전을 통해 인연을 맺은 갤러리에서 나를 기획전이나 그룹전에 초대하기도 했다. 공모전의 기쁨은 나를 부지런하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변신시켰다. 덕분에 내 작품들도 세상 밖으로 외출 기회를 얻었다


그중에서도 1년을 기다린 공모전이 있었다. 한강 노들섬에서 보고 반했던 아트페어였다. 억새밭과 어우러진 전시 공간이 인상적이었다. 내년에는 참여 작가로서 이곳에 서겠다고 결심한 뒤, 공모 소식을 듣자마자 지원했다.


다행히 1차 합격 소식을 받았다. 실물 심사와 인터뷰를 위해 유화 20호 한 점을 들고 지하철에 올랐다. 환승한 뒤에서야 '택시를 탈 걸' 하고 후회했다. 실물 심사가 있는 공모전은 기분이 이상해진다. 지하철에 들고 타기엔 꽤 큰 그림을 옮기는 내 모습이 왠지 처량해 보였다.


인터뷰장에는 나보다 어려 보이는 젊은 작가들이 많았다. 미술계에서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고들 하지만, 이런 순간엔 ‘조금만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호명되는 순서에 따라 작품을 소개하고 질문에 답했다. 예상보다 발표는 떨리지 않았다. 보고와 제안으로 단련된 직장인의 여유였다. 막상 인터뷰에서는 그림보다는 내가 더 주목받았다.


"직장을 다니면서 그림을 그린다고요?", "그럼, 오늘 어떻게 나왔나요?", "작업 시간이 부족할 텐데 대단하시네요." 작품 구상이나 기법을 묻는 질문을 예상했는데, 다들 작품보다 직장인화가로서의 일과에 더 관심을 보였다. 인터뷰를 하면서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역시나 탈락이었다.


보통 2차 인터뷰까지 가면 대부분 합격한다고들 했다. 그래서인지 더 허탈했다. 주변에서는 “젊은 아트페어는 좀 더 실험적인 작품을 원하더라.”, “이번에 코로나 때문에 경쟁률이 높았대.” 같은 말로 위로해 주었지만, 나를 우울에서 꺼내준 건 선생님의 한마디였다. "나도 공모전에서 엄청나게 떨어졌었다." 수십 년간 그림을 그려 온, 이제는 유명 화가가 된 그의 말에 기운을 차렸다. 때로는 타인의 실패담이 가장 큰 위로가 된다.


초보화가의 도전과 굴욕은 계속됐다.

어느 기업 문화재단에서 신진 작가 공모전을 열었고, 창작지원금과 개인전 기회가 주어지는 매력적인 공모전이었다. 위치가 서울 끝자락이라 고민이 되었지만, 나이 제한으로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해를 넘기면 다시는 도전할 수 없었다. 후회보다 고생이 나았다. 몇 번의 연차를 내고, 몇 시간씩 오가며 실물 심사와 인터뷰를 치렀다.


사서 고생하는 이유를 내게 물었지만, 답하지 못했다. 도전한다는 설렘보다는 ‘이렇게까지 전시를 해야 하나.’라는 회의감이 들었다. 결국 불합격 메일을 받았다. 그림을 찾으러 가는 길은 그동안 쓴 연차가 아까워 울상이었다. 곧장 떠나려다 근처 카페를 찾았다. 공모전이 아니었다면 오지 않았을 이곳, 다시 올 일이 있을까 싶었다. 이번엔 지하철이 아닌 택시를 탔지만, 여전히 처량한 기분이었다. 지친 기억으로 남기기 싫어 평소 잘 마시지 않는 시럽이 든 커피를 주문했다. 단맛과 함께 긍정의 에너지도 충전했다.


그제야 스스로에게 해주지 못했던 답을 건넸다. 계속해서 공모전에 지원하고 떨어지고, 가끔은 합격하는 일들. 이 과정들이 언젠가 새로운 인연과 기회가 되어 돌아올 것이라고. 그러니 어느 날 문득 찾아올 기회를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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