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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관찰자 시점

화가가 되니, 오늘이 반짝반짝

by 일요작가

이번 정류장은 포스코 건너편입니다.


안내방송 소리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8시가 조금 넘었다. 지금 버스에서 내려서 걸어가도 지각하지 않을 시간이었다. 포스코 사거리에서 내려 길을 건넜다. 한 정거장 정도 더 가면 회사다.


입추가 지나자 아침 바람이 선선해졌다. 절기는 역시 과학이다. 이른 가을바람을 따라 고개 들어 가로수를 올려다보았다. 빼곡하게 들어선 고층 빌딩들을 그만큼 키가 큰 가로수들이 살랑거리며 가리고 있었다. 줄지은 가로수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자연스레 정면을 향했다. 쭉 뻗은 테헤란로를 따라 평행으로 달리는 가로수들은 마치 동화 속 궁전으로 이어지는 미로처럼 느껴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지만, 함께 걷는 플라타너스 그림자는 출근길을 엄호해 주는 근위대 같았다. 테헤란로를 걸으며 출근하는 일은 하루 중 누릴 수 있는 작은 기쁨이다.


테헤란로 플라타너스는 키가 작다 해도 빌딩 2, 3층에 닿을 만큼 높아, 잎을 제대로 보려면 건물 중간 어디쯤 올라가야 할 것 같았다. 고개를 올려도 잎을 가까이 바라보기는 어려웠다. 대신 나무 기둥은 쉽게 살펴볼 수 있었다. 기둥 아래 흐르듯 뭉친 모양이 마치 버섯 같았다. '플라타너스의 눈물'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대상에 집중해야 하는데 자꾸만 딴생각이 났다. 다시 한번 고개를 길게 빼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색 변화를 지켜봤다. 초록, 초록, 파랑, 노랑, 다시 초록.


걷는 동안 잎이 흔들리는 모습, 크기, 햇살을 받는 방식, 뒷면의 색, 줄기와 잎의 연결구조까지 세심히 살펴보았다. 한참을 그러고 걷다 보니, 마치 앙리 루소가 된 듯했다.


세관원이었던 앙리 루소는 마흔이 넘어서야 화가로 데뷔한 '일요화가'였다.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자연사박물관과 식물원을 찾아다니며 식물도감을 탐독했고, 상상력을 더해 정글을 완성했다. 사람들은 그가 정말 정글에 다녀와서 그린 줄 알았을 정도였다. 루소의 정글 그림을 가만히 보면 조경 식물들도 섞여 있는 걸 알 수 있는데, 이는 자연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 책으로 배운 탓이었다. 관찰은 새로운 발견을 만들어낸다.


내가 출근길에 이러고 있는 이유도 결국은 그림 때문이다. 그려야 할 큰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며칠째 제대로 그리지 못해서 골치였다. 꽃을 곧잘 그렸기에, 다른 식물도 쉽게 그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릴 적 크레파스와 수채화 물감으로 그렸던 흔한 소재 아닌가.


헤매던 붓질을 멈추고 자료를 더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미지 검색으로 세상의 모든 식물을 찾았고, 그리는 방법을 알려 주는 영상도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상한 나무를 캔버스에 표현하는 일은 여전히 어려웠다. 막히면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림의 시작은 관찰이다. 루소의 말처럼 "자연을 관찰해 그 관찰한 것을 그리는 일만큼 행복한 것은 없다."는 걸 실감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도시 속 자연은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테헤란로의 쭉 뻗은 가로수길, 석촌호수를 둘러싼 벚나무, 그리고 사무실 복도에 줄지은 대형 화분들까지. 그렇게 며칠간 나무만 생각하고 살펴본 끝에 원하던 모습으로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관찰은 그냥 보는 게 아니다. 관(觀)’은 넓게 보는 것이고, ‘찰(察)’은 세세하게 보는 것이다. 작가에게 넓고 세세하게 보는 능력은 곧 재능이다. 재능이 부족한 나는 색을 칠하기 전에 그릴 대상을 충분히 보고 또 살폈다. 작품을 구상할 때면 사진 검색에 그치지 않고 직접 눈으로 보려고 했다. 공원을 그릴 때면 동네 공원이라도 나가 한참 시간을 보냈다. 자주 등장하는 구름 덕에 하늘을 자주 올려다본다. 때로는 타자의 표현에서 힌트를 얻기 위해 책을 읽기도 한다.


새로운 습관 덕분에 사소한 순간도 새롭게 보였다. 집 앞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목에서 리어카에 과일을 파는 할머니가 있다. 운동가는 아침 6시에도, 야근하는 밤 9시에도, 커피를 사러 나온 일요일 아침에도 늘 그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계셨다. 어느 날, 리어카에 쌓인 과일이 정기적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지난주까지는 아오리 사과였는데, 아니다. 중간에 복숭아가 등장했다가 이내 홍로로 가득 찼다. 사과를 상자째로 부은 듯, 리어카가 온통 빨갛게 물들었다. 마구 섞인 듯하지만, 그 안에서도 규칙이 있다. 덜 붉은 사과는 아래에 깔리고, 크고 작은 홍로가 둥글둥글 뭉쳐 있었다. 과일 할머니의 전략이었다. 둥글둥글 겹쳐진 홍로를 보니, 색감과 구도가 꼭 세잔의 정물화 같았다. 마치 명화 속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순간,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 안에서 창밖으로 보니, 할머니와 과일 리어카가 창문 프레임 가득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퇴근길에 현금을 좀 찾아야겠다. 영감을 얻은 보답으로 사과 한 봉지를 사야겠다.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누구도 같은 걸 보지 않는다. 함께 버스 정류장에 있었지만, 나는 사과를 보고 다른 누군가는 하늘을 보거나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나처럼 사과를 봤다 해도, 누군가는 가진 현금으로 살 수 있는 사과를 셈했을 테고, 누군가는 사과를 좋아하는 아내를 떠올렸을 테다. 같은 시간, 같은 풍경 속에서 관점 차이 하나로 우리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산다.


화가의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감탄할 일이 많아진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하루 속에서도 어느 틈엔가 반짝이는 순간이 찾아온다. 화가는 그 순간을 그림으로 담아내고 싶어진다. 고흐는, 화가는 이해하고 사랑한 대상을 잘 관찰하고 보여 줌으로써 사람들이 더 잘 볼 수 있도록 돕는 존재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산책하고, 자연을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나 역시 작품이 새로운 관찰자인 관람객의 시선에 맡겨질 때, 내가 감탄하며 그린 순간들이 고스란히 전해지길 바란다. 그러려면 반복되는 일상 속 틈을 깊이 들여다보거나 색다르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화가가 되고 나서 고흐의 말을 따라 산책하며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오늘도 나는 관찰하며 감사한 하루를 보냈다. 역시, 화가가 되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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