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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딱지

그림이 내게 남겨주는 것들

by 일요작가

부산 아트페어가 끝나는 일요일 아침, 나는 서둘러 서울로 향했다.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아시아프도 마무리되어, 전시작을 반출해야 했기 때문이다. 부산에서는 갤러리가 모든 절차를 대행해 주었지만, 아시아프는 작가가 반입부터 반출까지 직접 관리하는 방식이었다. 판매 수수료가 저렴해 신진 작가들에게 유리한 조건이었고, 나 역시 그 덕을 봤다.


이미 전시장 벽면 곳곳이 비어 있었다. 주인도 없이 홀로 남겨져 있을 게 걱정돼 발걸음을 재촉했다. 멀리 덩그러니 남겨진 그림이 보였다. 벽면에 빨간딱지가 붙어 있었다. 동그란 모양의 빨간딱지는 전시작이 판매되었다는 표시다. 주최 측으로부터 미리 소식을 들었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신기하면서도 뭉클했다.


판매된 건 작은 크기의 유화였다. 분홍색 노끈으로 한데 묶은 헌 책들을 그렸다. 읽고 싶었던 책들이 마침 부산의 한 중고서점에 있었는데, 그걸 기억한 고향 친구가 대신 사다 주었다. 책을 가방에 넣지 않고 노끈으로 묶어 커다란 리본을 만들어 온 모습이 예뻐 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먼 길을 무거운 선물과 함께 찾아온 친구와의 추억을 간직하고 싶어 캔버스에 남기게 됐다. 언젠가 친구에게 선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먼저 작품의 주인을 만나게 되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순간을 담은 그림을 공감해 준 이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전시 벽면에 빨간딱지가 붙으리라곤 꿈에서도 상상 못 한 일이었다. 그저 취미로 시작한 미술 비전공자에게는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처음 맞았던 기적의 순간이 떠올랐다. 신진 작가로서 참여한 첫 전시, 갤러리 기획전에서였다. 그때도 책을 주제로 한 유화였다. 나는 책을 좋아한다. 읽는 것도, 쌓아 두는 것도. 자연스레 그림 속에도 책이 자주 등장하곤 했다. 취미가 또 다른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생각해 보니, 그림이 처음 팔린 순간도 부산에서였다. 친구와 경주에서 핑크 뮬리를 보러 가던 길이었다. 갤러리에서 전화가 왔다. 전시가 끝나면 '더 리더'라는 작품을 소장하고 싶다고 했다.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그것도 갤러리에서 소장하고 싶다고 하니 더 믿을 수가 없었다. 핑크빛으로 물든 뮬리 사이에서, 내 얼굴도 행복으로 물들었다.


그저 초심자의 행운이라 여겼다. 화실 선생님은 "어떤 사람도 마음에 들지 않는 물건은 사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운이 아니라 작품이 좋아 생긴 일이라, 이제 작가로서 결과물에 자부심을 가지라고 했다. 더군다나 이름 없는 작가의 작품을 선택했다면, 그 자체만 보고 결정한 게 아니겠냐며. 한사코 아니라고 했지만, 선생님의 말씀은 틀린 법이 없으니 자신감 세포에 깊이 저장해 두었다.


분홍빛 행운은 계속됐다. 이후 참여한 아트페어와 단체전에서도 좋은 소식이 들렸다. 누군가 내 작업을 자신의 공간에 두고 싶다고 하면 제법 화가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쉽게 발을 뺄 수 없겠다는 책임감도 따라왔다. 작품을 소장한 콜렉터를 위해서라도, 힘들다거나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작업을 게을리할 순 없다.


누군가 그림을 소장하겠다고 하면 그저 고맙고 기쁜 일이지만, 한 번씩 궁금해진다. 무엇이 와닿았을까? 오랫동안 사랑받기를 바라는 마음에, 내 작업을 좋아해 준 분들에게 조심스럽게 이유를 묻는다. 때로는 예상보다 깊은 감상에 몸 둘 바를 모를 때도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드디어 좋은 주인을 만났구나 싶어 안도감이 든다. 자식을 떠나보내는 기분이 이런 걸까?


전시를 마치면 사람들은 묻는다.

“전시 어땠어요?”

예전엔 "사람들이 사진을 많이 찍어 갔어요."라고 답하곤 했다.

요즘은 질문의 의미라도 파악한 듯, “한 점도 못 팔았어요.”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언제부터 작품이 팔리는 걸 의식하게 됐지?'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쳐 피식 웃음이 났다.


애초에 판매를 염두에 두고 그리는 건 아니다. 그저 성실히 만들어 낸 결과물이 전시되고, 사랑받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전시를 하다 보면 작품이 선택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연스레 스며든다. 세스 고딘은 말했다. "예술가는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는 일을 하고, 화가는 벽에 걸 수 있는 예쁜 물건을 만든다." 전업 화가를 꿈꾸는 나도 어쩔 수 없나 보다.


어쩌면 미술품을 산다는 건, 취향을 나누는 일일지도 모른다. 서로의 감성이 닿는 건 우연이 아니라, 하나의 인연처럼 다가온다. 화가의 작업을 소장하는 사람을 ‘콜렉터’라고 하지만, 나는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이라 부른다. 그들은 작품을 구매하며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작가를 응원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리길 진심으로 바란다. 작품 가치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내 이야기를 갤러리나 글을 통해 접하고 짠한 마음이 든 걸까? 빠른 퇴사를 응원하는 분도 있고, 오히려 자유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지 말라고 조언하는 분도 있다. 시크한 화가로 보이고 싶었는데, 사직서를 품은 직장인의 모습이 들킨 것 같아 부끄러우면서도, 어쩜 이렇게 내 마음을 잘 아실까 싶어 코끝이 시큰해진다.


그림은 참 여러 방식으로 나를 달래준다. 그러니 멈출 수가 없다. 더 많은 순간을 경험하고, 감사하며, 캔버스에 담아야 한다. 그리고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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