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글 사이에서
모네는 쓸 것보다 그릴 게 더 많은 게 화가라고 했다. 화가는 설명 대신 그림으로 말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다. 글쓰기에 익숙한 나도, 문장이 아닌 색으로 표현하는 게 한층 더 자유로웠다. 마치 해방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21세기의 화가는 써야 할 일이 참 많다. 제목부터 포트폴리오, 작가노트까지 준비해야 하고, 어디 지원이라도 하려면 CV도 필요하다. 활동이 많아질수록 그림을 소개하고 설명할 일이 늘어났다.
글짓기는 꽤 머리 아픈 일이다. 자유롭게 쓰면 된다고 하지만, 쓰는 순간 이미 누군가에게 읽힐 걸 염두에 두게 된다. 첫 문장을 망설이고 망설이다 겨우 시작하지만, 이내 고치고 고치다 결국 다 지워 버린다. 그렇게 사라진 브런치 스토리가 한두 편이 아니다.
화가에게 필요한 글은 대부분 작가와 작품에 대한 설명이다. 작가 소개는 비교적 쉽다. 이력서처럼 경력 사항을 정리하면 된다. 인터뷰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일은 또 다르다. "안녕하세요. 저는 판다를 그리는 화가입니다.", "저는 직장인 화가입니다."로 하면 수월한데, 정작 나는 그렇게 불리고 싶지가 않다. '직장인'이나 '판다'라는 단어에 자신을 한정 짓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나를 표현하기엔 이보다 적절한 말이 없었다.
작품은 포트폴리오를 통해 보여 주면 된다. 정해진 형식이 없어 처음엔 난감했다. 핀터레스트에서 다른 작가들의 포트폴리오를 참고했다. 그대로 따라 하기보다는, 이런 식으로 만들면 되는구나 하고 감을 익혔다. 디자인은 심플하게, 작품이 돋보일 수 있도록 정리했다. 그동안 자소서 좀 써본 실력을 발휘했다.
문제는 작가 노트와 작품 설명이었다. 두 개의 차이가 막연하게 느껴졌다. 어느 정도 분량으로, 어떤 내용을 써야 할지도 막막했다. 모두가 떠난 백일장대회에 혼자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일단 미룰 수 있는 건 미루고, 할 수 있는 일부터 했다. 제목 짓기. 제목은 보통 그리는 도중에 자연스럽게 떠오르긴 했지만, 요약하는 게 일이었다. 표현하려 한 주제를 한 단어나 한 문장에 담는 건 쉽지 않았다. 미술관에서 본 작품들의 제목을 떠올려 보고, 과거 서양화가들의 작품 제목을 검색했다. 대부분 단순한 설명이거나 번호를 붙이는 방식이었다. '테라스에서', '푸른 옷의 여인', '해바라기' 같은 제목이나, 아예 "무제"라고 붙이는 경우도 있었다.
또 다른 유형은 작품의 메시지를 함축한 제목이었다.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는 한 편의 시 같았다. 흉내 내고 싶었지만, 마치 "한 문장으로 요약하시오."라는 국어 숙제 같아 쉽지 않았다. 처음엔 '무제'나 번호를 붙이는 것도 고민했지만, 내 그림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언젠가 추상을 하게 되면 'Untitled'라는 제목을 한 번 써 보고 싶다.
도상을 구상하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그리는 대상에 취해있다. 채색할수록 애정이 깊어지고, 밀도를 높일수록 뜻밖의 감각이 생겨나기도 한다. 작업하면서 실감한 의식을 텍스트로 정리하면 작가노트가 된다. 전체적인 콘셉트를 작가 노트에 담고, 작품마다 표현 기법이나 주제를 덧붙이면 작품 설명이 완성된다. 함께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일단 작가 노트부터 제대로 써 보기로 했다.
역시나 첫 문장부터 막혔다. 이럴 때는 다른 사람의 문장을 참고하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예술 세계의 글은 읽을수록 어려웠다. 그들만의 언어가 있는 것 같았다. "유기적 대상의 의미", "무형의 존재", "기하학적 구조", "그로테스크한 표현" 같은 단어들 말이다.
사실 나는 그렇게 거창한 의미를 두고 그림을 그린 게 아니었다. 그저 그림을 그리면서 마주한 나만의 시간을 캔버스에 담았을 뿐이다. 책을 보고, 잠을 자고, 때로는 사색했던—그저 반짝이는 일상의 한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유기적 대상의 관찰 같은 개념은 없었다.
미술평론을 받을까 고민도 했었다. 전문가가 써준다면 얼마나 편할까 싶었다. 평론을 받으려면 유명해야 하거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지금의 내가 비용을 들여 받을 단계인지 고민되었다. 아직 실력도, 돈도, 용기도 부족한 나는 다시 직접 쓰기를 시도했다. 자기 그림을 설명하지 못하는 화가라니 부끄러운 일 아닌가.
‘달이 빛난다고 말하지 말고, 유리 조각에 반짝이는 한 줄기 빛을 보여줘라.’ 안톤 체호프의 말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를 때 되새기는 문장이다. 그림을 그리듯 글을 쓰면 된다. 예를 들어, <나는 누가 위로해 주지>를 그릴 때 달을 직접 그리지 않고, 반짝이는 빛을 담았다. 외롭다고 말하는 대신, 분홍빛과 보랏빛이 감도는 밤하늘을 채웠다. 밤하늘이 외로움을 대신 삼켜주기를 바랐다.
사실대로 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솔직하면 된다. 괜히 다른 작가를 어설프게 흉내 내다가는 쉽게 들통난다. 그림에 일상의 순간을 담았듯이, 일기처럼 소소한 이야기로 풀어냈다.
평소 쓰는 딱딱한 문체 탓에 몽글하게 잘 표현되지 않았다. 그림처럼, 글도 따뜻하고 동화적인 느낌을 주고 싶었다. 산문집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고전에서 인생의 진리를 배웠다면, 산문에서는 일상의 언어를 익혔다. 담담한 관찰 속에서 따뜻함이 느껴지는 글을 선망했다. 화가로서 써 내려간 글이, 내 그림처럼 따뜻하게 남길 바랐다.
처음이란 건 어쩌면 기회다. 모른 척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써도 된다. 그림을 설명하는 대신, 짧은 시 한 줄을 덧붙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누가 위로해 주지>라는 그림 아래 ‘달은 멀리 있지만, 그림자 속에는 작은 빛이 남아 있다’ 같은 한 줄을 적어 보는 것이다. 이러다 시집을 내게 되는 건 아닐까? 괜히 설레었다.
도록 대신 그림책을 만드는 것도 좋겠다. 글은 짧지만, 그림과 함께 읽으면 마음에 잔상이 남는 그런 책. 어린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볼 수 있는, 위로와 응원이 담긴 그림책이면 좋겠다. 언젠가 내 그림을 모아 한 장 한 장 넘기며 감상할 수 있는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
어째 그릴 것만큼이나 쓰고 싶은 것들이 점점 많아진다. 화가라면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지금도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 큰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