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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이력서

직장인에서 직업인으로

by 일요작가

알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책 한 권 쓴 일이 뜻밖의 퇴사 찬스가 되지 않을 것이란 걸. 자신만의 이야기로 먹고사는 세상이 온 것도 알고는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본업이 홍보하는 사람이면서 정작 자신을 포장하고 알리는 일에는 재주가 영 없다. 전시도 하고 내 이름으로 낸 책도 있다며, ‘나는야 멋쟁이 직장인!’하며 소문내고 다녀도 모자랄 판에 퇴근 후 만든 부캐를 숨기기 바빴다. 직장에선 더 그랬다. 다른 부서 팀장님이 어찌 알고 아는 척을 하면 그의 손을 당겨 비밀로 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주위에선 이럴 때 유튜브를 하라고 했다. 회사와 화실 가는 시간 외에는 드러눕기 바쁜 나를 홀리는 제안은 아니었다. 내심 바라던 반전 있는 직장인이 되었으니, 만족했다. 퇴근과 출근 사이 틈틈이 그림을 그리고 가끔 전시도 하며, 어쩌다 그림이 팔리는 일이 즐거웠다. 계속 이렇게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일상이 이어지길 바랐다. 처음이었다. 오늘과 같은 내일이 오기를 바란 적이.


완벽하게 균형 잡힌 일상도 코로나19를 피해 갈 순 없었다. 코로나19가 가장 먼저 타격을 준 건 내 직장 생활이었다. 재직 중이었던 회사는 코로나19로 인해 매출 타격을 심하게 받게 되었고 얼마 가지 않아 인원 감축, 무급휴가 등 뉴스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사내에 떠돌기 시작했다. 근무시간 50% 이상 무급휴가 신청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거의 오전 근무만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회사는 걱정됐지만, 내심 기뻤다. 하루 4시간 근무만 하고 자유 시간이라니! 낮에도 그림 그릴 수 있다. 야호!


사태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것은 3개월도 채 안 되어서다. 오전 근무라지만, 퇴근해도 일이 끝나지 않았다. 비상사태로 업무량은 오히려 늘어났지만, 무급휴가 탓에 회사에서는 일할 수 없어 집으로 일을 가져와야 했다. 급여는 반 토막 났다. 이제 회사가 아니라 내 생활을 걱정해야 했다. 하루 중 절반의 시간이 흔들리니 일상이 무너졌다. 출퇴근 시간이 들쑥날쑥해지고 업무는 과중해지고, 거기에 생활비까지 줄어드니 예전처럼 그림에만 집중할 수가 없었다. 취미도 생활이 안정되었을 때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코로나19라는 특수 상황이기에 한동안 회사를 이해하고 받아들였지만 전세보증금 인상 통보를 받는 순간, 직장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직장은 나를 책임져 주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마지막 한 장 남은 사직서는 전업 작가로 새 출발할 때 쓰려고 아껴 두고 있었다. '생각보다 기회가 일찍 온 걸까?' 기대하며 꿈을 살짝 꺼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당장 전세보증금과 다음 아트페어 참석을 위한 부스비가 필요했다. 제대로 꺼내 보지도 못한 채 꿈은 도로 넣어 두고, 나는 다시 이력서를 꺼냈다.


거의 5년 동안 손대지 않았던 이력서를 다시 열었다. 퇴사 예정인 직장명을 추가하고, 수행했던 프로젝트와 성과를 정리했다. 연간 고객 유입 30%, 매출 상승 15%까지 기재하고 나니, 제법 월급 값은 했던 모양이다. 문득 지난해 연봉 동결이 억울해졌다. 업데이트한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인사팀에 따져 볼지 생각하다 이내 접었다. 퇴사를 결심한 이상 과거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구직장과 구남자 친구는, 내가 떠나면 그뿐이다.


직장인은 새로운 직장 안에서 살게 된다.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보다 좋은 직장을 찾는 일이 급선무다. 내게 좋은 직장은 구내식당이 있고 집과 가까워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점심보다는 연봉을 우선시했다. 하루라도 빨리 은퇴하고 전업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돈을 모아야 했다.


이력서를 다시 고치며 직장인으로서의 성과뿐만 아니라 차별화된 강점을 어필했다. 그동안 숨겨왔던 작가 활동을 함께 기재했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그 일로 전시하고 출판함으로써 퍼스널 브랜딩을 실현했고, 이는 MZ 세대의 파이프라인과 같은 맥락으로 직장인을 넘어 새로운 직업인이라는 성과를 창출했다.'라고 꾸며 썼다. 모든 일에는 포장이 중요하다. 이력서도 마찬가지다.


당당하게 직장인이 아닌 직업인으로서 나를 소개했다. 나의 첫 번째 직업은 마케터이다. 광고하고 홍보할 것들의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한다. 이 직업은 마케팅할 대상이 있다면 지속할 수 있다. 지금처럼 직장을 옮겨 다닐 수도 있고 프로젝트를 맡아서 프리랜서로 일할 수도 있다. 두 번째 직업은 화가다. 아직 직업으로 내세우기에는 인턴 단계이지만, 첫 번째 직업에 비해 나이 제한이 없는 편이라 평생 업으로 삼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가장 큰 단점은 연봉이 상당히 낮다. 첫 번째 직업의 연봉이 4천만 원이라면 두 번째의 첫 연봉은 40만 원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어떤 직업이 나를 평생 먹여 살릴지는 말이다.


예전 같았으면 퇴사 후 여행을 떠났겠지만, 이제 내겐 다른 직업이 있었다. 한동안 전업 작가처럼 자유롭게 작업하고 아트페어에도 참가했다. 그림 1점이 판매되어 백수 기간에 생활비가 되었다. 다음 전시 준비를 위해 캔버스를 사고 액자를 맞추려면 목돈이 필요한데, 코로나19 시국에 원하는 직장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내가 찾는 직장의 기준이 또 보통 까다로운가? 구내식당에, 정시 퇴근에, 집과는 가까워야 하고 이제는 연봉까지 따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모든 일엔 인연이 있다더니 어떤 운이 작용하여 다시 선릉역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새 직장이 마음에 들었던 점은, 다른 직업을 공개했음에도 그것을 딴짓으로 보지 않고 자기 계발도 잘하는 인재로 봐준 점이다. 덕분에 직장에서도 그림 생활을 숨길 수 없게 되었지만, 생각보다 별일 아니었다. 수줍게 웃으며 넘기면 될 일이었다. 여전히 사적인 나를 드러내는 게 어색하고 못마땅하지만, 이런 경험조차 작품 활동에 영감이 될 거라 기대한다. 많이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일 또한 작가의 일 아니겠는가. 힘든 시기였지만, 월급이 올라 더 좋은 물감을 쓸 수 있게 됐다.


결국 나는 용기를 내지 못하고 다시 직장이란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다. 적당한 때를 기다리는 현명한 선택이라 나를 위로했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는 용감한 사람이 되길 바랐지만, 대출이자와 재료값은 현실과 타협하게 했다. 그 덕에 물감도, 캔버스도 더 좋은 걸로 바꿨다. 대신 낮에는 일하고 밤에 그림을 그린다고 한정 짓지 않기로 했다. 직장에 있는다고 해서 또 다른 직업이 사라지진 않는다.


직업인은 직장과 상관없이 계속 존재할 수가 있다.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시간에는 다른 화가의 일을 하면 된다. 출근길엔 어제 작업을 돌아보고 오늘 작업계획을 세우면 된다. 점심시간에는 작가 노트를 쓸 수가 있다. 퇴근길은 갤러리와 통화하기 좋은 시간이다. 그렇게 나는 화가가 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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