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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화가가 되었습니다.

프롤로그

by 일요작가

2019년, 취미로 배우던 그림이 꿈이 되어 나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물감을 사야 해서 퇴사를 잠시 미루고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운 좋게도 화가가 되면 하게 되는, 혹은 해야 하는 과정들을 하나씩 밟아 나가고 있다. 원하는 전시를 게임의 퀘스트처럼 하나씩 달성하고 나면,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아직 이루지 못한 두 가지 목표가 있다. 국내에서 명망 있는 아트페어에 초대되는 것, 그리고 퇴사.


그렇다. 나는 아직 직장을 다닌다. 그래서일까? 스스로를 ‘화가’라고 소개하는 일이 어색하다.


화가라고 하면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예술가의 모습이 떠오른다. 대외적인 평판에는 관심 없고, 그저 자신의 예술에 몰두하는 사람. 언젠가 나만의 독보적인 표현 방식으로 시대의 철학을 담아내는 작가가 되기를 꿈꾸지만, 지금 당장은 그림으로 먹고살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 겨우 미술이라는 바다에 발끝을 담가 보니, 화가라는 직업도 결과물의 완성도, 마감 기한, 비어 가는 통장의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렇게 바라던 화가의 삶은 우아하지도, 평화롭지도 않았다. 즐겁게 그림만 그리면 되는 줄 알았는데, 엑셀도 해야 하고 미팅도 많았다. 웬만한 직장인보다 치열한 하루를 보내야 했다. 때로는 530명의 매니저가 필요할 것만 같았다.


그림을 그리면서 우리 애쓰지 말고 살자고 했던 말이 무색하게, 화가가 되고 나서 고군분투하며 살고 있다.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으려고 하루하루 계획을 세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놓고선, 이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며 다음 전시를 위한 갤러리를 찾고 미술 공모전을 살펴본다.


퇴근 후 그림을 그리며 적당한 즐거움을 누리던 김 팀장은, 이제 화가로 살고 싶다는 일생의 꿈을 꾸며 열정을 태운다. 하지만 꿈을 이루는 과정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다시 신입으로 돌아간 듯 낯선 환경에서 어리바리하게 헤매기도 했다.


그림은 나를 울리고, 웃게 하고, 때론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깊은 고독 속으로 이끌기도 했다. 그러다 언제 그랬냐는 듯, 몰입이라는 평온을 선물해 주었다. 무던한 내게 다채로운 감정을 맛보게 하고, 해냈다는 성취감에 중독되게 만들었다. 좌절과 실패마저도 배움의 기회로 받아들이게 했다. 열정과 함께 불안도 찾아왔지만, 결국 그 불안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혹시나 기대할까 봐 미리 고백하자면, 화가로 성공했다거나 그림을 팔아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매일 그리고, 또 그리는 직장인 화가의 기쁘고 슬픈 일상이다. 그래서 누구나 할 수 있고 함께 하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퇴근하고 그림을 그리는 이 평범한 일상이, 언젠가 인생을 돌아볼 때 ‘가장 잘한 일’이라고 믿으며, 이 글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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