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인도, 독일, 미국, 프랑스...
우리에게는 ‘야시장'으로 유명한 타이페이 ‘스린(士林)’ 지역. 사실 이곳의 진짜 노른자는 스린의 북쪽 경계선에 위치한 ‘티엔무(天母)’라는 동네이다. 티엔무는 1950년대 중반부터 1979년, 미국이 ‘하나의 중국’ 정책에 따라 대만과 단교할 때까지 대다수 미군들의 거주 중심지였으며, 현재도 미국 엑스팻(Expat) 커뮤니티를 비롯해 대만으로 이주한 여러 나라 사람들의 생활 터전으로 타이페이의 ‘작은 외국인 마을’이라고 불린다.
‘Taipei American School’, ‘Taipei European School’ 등 연간 학비가 수천에 달하는 타이페이에서 가장 명망 있는 외국인 학교들이 포진해있다는 사실도 가족단위 외국인 주재원들을 끌어당기는 매력 포인트이다. 이런 외국인 커뮤니티에 힘입어 티엔무는 스린 지역에서 가장 비싼 집값을 자랑하지만, 흥미롭게도 내부에 그 흔한 지하철역 하나 없는 ‘고립된 위치’로 유명하기도 하다.
사실 일찍이 티엔무 지역을 포함한 지하철 노선이 계획되었으나, ‘우리가 사는 지역을 (외부인 유입 없이) 지금 이대로 지키고 싶다’라는 티엔무 주민들의 강경한 입장 표명으로 무산된 바 있다. 서울의 축소판인 인구밀도 높은 타이페이에서 지하철 노선의 유무는 집값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 부동산의 가치를 떠나 주민들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이 오래된 동네의 특별함은 도대체 무엇일까? 외부 사람들은 도통 이해하기 힘든 그들만의 세상으로 오늘은 잠시 여행을 떠나볼까 한다.
내가 사는 네이후(內湖)에서 약 25분 정도 달리면 오늘의 목적지, 티엔무에 다다른다. 면적이 서울의 절반이 채 되지 않는 타이페이 내에서는 꽤나 먼 거리인 셈이다. 도착하자마자 들린 곳은 아르헨티나식 아이스크림집 ‘Baires’. 타이페이에서 ‘가장 맛있는 아이스크림’에 손꼽히는 꽤나 유명한 집이다.
‘Baires Ice Cream’
주소: 111, Taiwan, Taipei City, Shilin District, Section 6, Zhongshan North Road, 460號
영업시간: 매일 11AM–9:30PM (월요일 휴무)
이름만 들어도 이국적인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좀 더 쿨하게 부르는 명칭이라는 ‘Baires’에서 처음 먹어보는 아르헨티나식 아이스크림은 어땠을까? 마치 이탈리안 젤라또와 터키식 아이스크림의 중간 버전이랄까, 꽤나 농축된 형태로 입안 가득히 퍼지는 아이스크림 재료들의 진한 맛이 매력적이다. 부부가 직접 개발한 레시피로 만든 각종 FLAVOUR들로 가득한 이곳에서는 먼저 몇 가지 샘플을 테이스팅 해본 후 비교적 안전하게(!) 주문할 아이스크림의 맛을 고를 수 있다.
풍채 좋은 오너 부부가 풍기는 분위기가 꽤나 독특하여 넌지시 물어보니 역시나 와이프가 아르헨티나의 화교라고 한다. (대만에 살면서 정말 여러 나라의 화교들과 그들이 운영하는 크고 작은 비즈니스를 보는데 그 규모와 다양성은 실로 놀랍다.) 우리에게 대만으로 이민 온 이야기를 잠시 해주고 자리로 돌아가 끊임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단골손님들을 맞으며 정답게 안부를 주고받는 부부를 보며 ‘이런 게 티엔무 분위기인가 봐’라고 말하니 남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The Spice Shop’
주소: No. 6 Lane 50 Alley 10, Tianmu East Road, Shilin District, Taipei City, Taiwan 11153
영업시간: (평일) 11:30AM–2PM, 5:30PM-9:30PM (주말) 11:30AM–3PM, 5:30PM-10PM
‘The Spice Shop’은 오랫동안 티엔무 주민들의 탄탄한 지지를 받으며 현재 ‘타이페이에서 가장 맛있는 인도 레스토랑’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인도와 대만 화교의 피를 반반씩 가진 오너분은 이곳에서 무려 ’18년째’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현지에서 직접 배운 레시피를 응용해 조미료 없이 캐슈넛으로 만든 걸쭉한 카레가 이집의 시그니쳐. 카레에 빠질 수 없는 갈릭난 역시 계속 ‘하나 추가요!’를 외치게 만드는 마성의 탄수화물이다.
식후에 시원한 인도식 라씨도 한 잔 쭉 들이키며 레스토랑 매니저와 이야기하던 중, 유리창에 붙어있는 전단지가 눈에 띄었다. (외국인 마을답게 영문으로 쓰인 이 전단지는) 단골 손님이 주최하는 스타일링 클래스를 위한 거라며 신나서 설명하는 매니저를 보니 다시 한번 ‘아, 티엔무의 매력이 이런거구나’ 싶다. 아이스크림집에서 느꼈던 그 ‘동네 느낌’, 그리고 ‘공동체 느낌’.
세련된 절제미가 돋보이는 이 공간은 대만의 유명 디자이너 ‘JAMEI CHEN’의 쇼룸 겸 카페이다. 심플함(Simplicity)과 선명함(Clarity)를 모토로 삼는 그녀의 옷들은 무채색 색감에 엣지있는 커팅으로 한국 사람 취향에도 꼭 맞는 스타일. 실제로 이 곳에서 차를 마시다 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ALL WHITE’로 멋지게 차려입은 그녀를 자주 목격할 수 있다.
‘JAMEI CHEN • 天母另空間’
주소: No. 201號, Section 6, Zhongshan North Road, Shilin District, Taipei City, Taiwan 11155
영업시간: 매일 11:30AM–7:30PM
티엔무 첫 방문에서 한눈에 반해, 개인적으로 타이페이에서 가장 우아하게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JAMEI CHEN이 2020년 상반기부터 ‘MEMBERS ONLY’ 회원제로 변경된 점은 소개하며 참 아쉽다. 언젠가 다시 대중에게 문을 열어 이 아름다운 공간을 함께 즐길 수 있기를 바라며, 못다 한 티엔무 산책에 다시 나서본다.
하얀 차양막 아래서 독일에서 온 시원한 ‘파울라너(PAULANER)’ 생맥주를 즐길 수 있는 곳, ‘Wendel's Bakery & Bistro’. 타이페이 시내에 몇 개 지점이 있지만 야자수 딸린 테라스가 있는 티엔무 지점의 분위기를 따라올 곳은 없다. 작게 자리한 베이커리에서는 꽤나 딱딱하고도 퍽퍽해 보이는 ‘독일식 빵’을 판매하는데 의외로 서양인 중에는 이런 종류의 빵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Wendel's Bakery & Bistro’
주소: No. 5, Dexing West Road, Shilin District, Taipei City, Taiwan 111
영업시간: (평일) 9AM–10PM (주말) 8AM-10PM *월요일 휴무
이곳 스타벅스도 동네의 명물이다. 밋밋한 빌딩숲 사이 보통의 스타벅스와 차별화된, 넓은 야외 테라스를 가진 통창의 이층 집 구조로 로컬들 사이에서는 사진 찍는 곳으로 인기가 뜨겁다.
‘Starbucks Tianmu’
주소: No. 1, Alley 18, Lane 38, Tianyu Street, Shilin District, Taipei City, Taiwan 111
영업 시간: (평일) 6:30AM–10PM (금요일 및 주말) 6:30AM-10:30PM
스타벅스 옆으로 조금 걸어가다 보면 유명한 아메리칸 다이너, ‘JB’s’가 나온다. 원래 작은 규모의 햄버거로 유명한 집이었는데 몇 년 전 근처의 독채 건물을 매입해 대대적인 공사를 거친 후, 인스타그램에서 가장 핫한 브런치집 중 하나로 완벽히 탈바꿈해버렸다.
‘JB's Diner & Cafe’
주소: No. 2號, Alley 16, Lane 38, Tianyu Street, Shilin District, Taipei City, Taiwan 111
영업시간: (평일) 8AM–8PM (월요일 휴무)
시 중심에서는 보기 힘든 독채 건물에 햇살 좋은 캘리포니아가 떠오르는 화이트, 그린, 라탄 조합의 인테리어, 메뉴도 미국식 브런치라 모든 것이 딱 맞아떨어진달까, 보통 11시가 넘어 문을 여는 여느 브런치집과 다르게 오픈 시간이 아침 8시라는 사실도 근처 외국인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는 학부모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다. (평일에도 2층까지 만석일 정도로 사람이 많으니 미리 예약은 필수)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 ‘까르푸(Carrefour)’ 티엔무 지점이다. 까르푸는 타이페이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대형마트 중 하나이지만, 티엔무 까르푸에는 특별한 ‘이것’이 있어 사람들이 일부러 먼길을 오가기도 한다는데…
‘Carrefour Tianmu’
주소: No. 47號, Dexing West Road, Shilin District, Taipei City, Taiwan 111
영업시간: 매일 8AM–11PM
바로 다른 까르푸에서는 볼 수 없는 ‘방대한 와인 컬렉션’ 때문이다. 이렇게 티엔무 지점에만 특별하게 크고 시원한 와인 저장소가 자리 잡고 있는 이유도 재미있는데, 프랑스에서 온 까르푸의 대만 지사장이 바로 티엔무에 살기 때문이란다. 그가 프랑스인의 자존심으로 꾸민 이 와인 저장소에는 원하는 종류의 와인을 추천해주는 직원도 상주해 있어 더 편리하게 쇼핑을 할 수 있다. 당연히 가격도 까르푸답게 합리적이고 말이다.
까르푸 앞 로컬 과일 가게에서 내가 여름철 가장 좋아하는 과일, 망고와 파파야를 몇개 집어 담았다. 참고로 속은 빨갛고 안은 샛노란 애플망고의 현지 가격은 개당 ‘한화 2천 원’ 정도. 우스개 소리로 여름에 대만 여행 와서 애플망고만 실컷 먹고가도 비행기 값은 뽑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게다가 맛은 말해 뭐해,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내 입에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이 곳 대만에서 나는 애플망고가 가장 향기롭고 맛이 좋다.
“아르헨티나, 인도, 독일, 미국, 프랑스”
티엔무에서 오늘 하루 다양한 경로로 접한 나라들이다. 단지 각국의 레스토랑이 모여 있는 동네라고 설명하기에는 한참 아까운 곳, 티엔무는 각자의 사연을 품고 대만으로 건너온 여러 이민자 및 주재원들이 로컬과 어울려 살아가는 다채로운 곳이다. 그리고 이제는 타이페이에서 사라져 버린 ‘우리 동네’, ‘우리 이웃’의 따뜻함이 지역적 폐쇄성 덕분에 아직까지 건재하는 곳이기도 하다. 첫 방문을 시작으로 티엔무에 매력에 빠진 나는 그 후로도 여러 번 이곳을 찾았다. 티엔무 주민들의 지하철 반대 시위에는 아직도 고개가 갸우뚱하지만, 그들이 지키고 싶어 했던 이 소담한 동네의 특별함이 무엇인지 이제는 너무나 잘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