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을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사람으로 키우는 일. 교대 4학년 즈음 만나는 초등 교육과정 총론 첫 페이지에 웅장하게 나타난다. 틀린 점 하나 없이 옳은 말이고, 무지막지하게 고고해서 무겁고 부담스러운 말이다.
그 문장은 잘게 나누어진다. 전인교육이라는 단어로 다시 나타나기도 하고, 평가 계획안에 별표를 달고 나타나는 '정성적 평가요소', 국어, 도덕과 교육과정 각론, 하물며 학생들에게 너무 자주 말해서 이제는 의미가 이 문장을 말하게 하는지, 습관이 이 문장을 말하게 하는지 헷갈리는 말, '서로 배려합시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나만의 말로 풀어서 말한다. 요즘엔 배려라는 말 자체에 당위성이 녹아들어버린 것만 같아서)
교육과정이 지향하는 그 인간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타인 투성이고, 각자의 공격성을 세련되게 다듬지 않으면 공동체며 국가며 무너지기 십상이니, 어릴 때부터 사회가 반길 만한 사람의 요소를 갖추도록 자라게 돕는 것. 우리 공동체의 미덕을 교사가 직접 가르치고, 때로는 모델로서 보여주고, 체험하게 해주는 일. 그것의 유용성과 효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들켜버리는 것이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매번 말하는 그 'Should'들이 정말 교사 자신의 다짐에서 오는 것인지, 교육과정을 위시한 이전 세대의 유산을 베껴오는 것인지. 언젠가는 드러나는 것이다.
지난 금요일에 3학년 아이들과 영어수업을 하던 중이었다. 한 아이가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만 좀 하라니까! 열심히 말하던 나도, 듣고 있던 다른 학생들도 놀라서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자 이렇게 답했다.
- (앞에 앉은 아이를 가리키며) 얘가 계속 저한테 누명 씌워요.
- (앞에 앉은 그 아이가) 근데 네가 내 머리카락 계속 만진 거 맞잖아.
계속 씩씩대는 뒷자리 아이와, 태연하게 대답하는 앞자리 아이.
사실 나는 이때 두 아이 양쪽에 크게 관심은 없었다. 그보다 나는 should에 집중했다. 교사라면 얼른 학생들을 집중시켜야지. 돌발상황을 제어할 수 있어야 좋은 교사지. 얼른 진정시켜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 그래. 친구 머리카락 만지지 말고...
라고 내가 말을 하자마자, 씩씩대던 뒷자리 아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가 안 만졌다니까요!
이제는 정말 진심으로 놀라서 아이를 쳐다봤다.
아, 들켰구나 싶었다. 아이들은 종종 섬뜩할 정도로 나를 꿰뚫어 본다. 지리멸렬한 말을 더듬더라도 그것이 진심이라면 정말 진지하게 들어준다.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아름답게 꾸민 말이라도, 가짜로 지어낸 말이나 글에는 꾸벅꾸벅 잠들거나 하품을 한다. 합리적이지도 않고 감정 조절도 어려워하는 아이들은 어른이 진심인지 아닌지 알아내는 그 능력만큼은 서늘하도록 뛰어나다.
그래서 그저 진심을 말했다.
그래, 속상했구나. 그럴 수 있어. 화가 나도 괜찮고. 어떤 마음을 느껴도 다 괜찮아. 그런데 우리가 화가 나면, 말이나 행동이 거칠어져. 그러다 보면 다른 친구도, 나 자신도 다치게 돼. 선생님은 그게 걱정이야. 화내도 돼, 화낸 걸 혼내는 게 아니야. 그렇지만 서로 상처 주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그것뿐이야.
실제로는 글처럼 매끄럽게 말하지 못했고, 버벅거리고 되짚으며 말을 했다. 그 아이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교실은 순식간에 차분해졌고, 나는 그럼 이제 다시 수업해도 될까? 라고 물어볼 수 있었다. 수업은 본 궤도로 금세 돌아왔다.
나의 선배님, 동료들 중에는 칼 같은 규칙을 준수하고(본인도 학생들도), 그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분들이 있다. 학생과 교사는 그 관계에서 더 깊어질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여기는 분들도 있다. 교사의 권위는 규칙을 엄격히 적용함으로써 세워진다 말하는 분들도 있고, 때에 따라 응보적 정의 또한 필요하다 말하기도 한다. 3월 첫 달은 절대 웃어주지 말고, 교실 앞문을 발로 쾅 차고 들어가라는 농반진반 이야기도 자주 들었다.
나도 한때는 그들의 격언이 응당 옳고, 그것이 처음부터 나의 다짐이었던 것처럼 여겼다. 관습에서, 타인에게서 빌려온 Should를 온 몸에 꽁꽁 매고, 투사처럼 잔뜩 힘을 주고 교실에 들어가곤 했다. 그런 투사의 삶도 분명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타인은 넘치게 많고, 각자의 삶도 그 의미도 겹치는 일 없이 존재한다. 내가 그것을 옳다 그르다 하는 것 자체가 민망한 일이다.
다만 가끔, 내가 스스로 만들었다 믿었던 그 다짐들이 정말 내 것인지, 관습과 유산에서 물려받고 네임펜으로 내 이름만 써둔 건 아닌지, 고민해야 하는 때가 찾아온다. 나에겐 조금 이르게 찾아왔다.
나는 나만의 것을 새로 만드는 것이 더 좋았다. 나한테는 그랬다.
영화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 내 이야기만 마구 썼다. 오래된 관습 속에서 나의 진심으로 살아가는 것은 타오르는 것과 같아서, 영화 속 두 주인공을 보면서, 보고 나서도 나의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편을 이어서 더 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