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관이 위대한 이유 그리고 시작의 기쁨
이름은 한 사람의 인생에 스미는 길이면서, 그 정체성으로서 가장 먼저 받는 선물이다. 그래서 작명은 대상에 대한 기도를, 그를 부른 세상의 바람을 자음 하나 모음 하나에 새기는 행위이며, 아직은 텅 빈 세상에 대한 울림이다. 한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벅찬 마음을 짧은 몇 자에 꾹꾹 눌러 담는다. 요즘이야 젊은 부모들이 유행하는 이름 중 선택하거나 나름의 뜻을 넣어 자녀의 이름을 짓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권위 있는 누군가의 통찰을 빌려 이름을 짓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름을 짓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정가제 작명 서비스'를 제공하는 철학관의 성명학자는 음양오행과 한자의 구조를 세심하게 분석해, 길하고 단정한 이름을 내어 놓는다. 스님이나 목사님 같은 종교인은 작명 부탁을 받으면, 그 사람의 삶에 축복과 기도를 담아 이름을 지어주고, 이름을 부탁한 사람은 시주나 헌금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런 이름의 무게를 생각하면 스스로에게 붙일 이름 앞에서는 더욱 오래 망설이게 된다. 남이 지어주는 이름은 걸어갈 길을 향한 타인의 축원이지만 스스로 짓는 이름은 나에 대한 내 목소리이자 내가 선택한 정체성에 대한 스스로의 선언이기도 하다. 몇 자 되지 않는 이름 속에 내가 보여주고 싶은 나, 때로는 감추고 싶은 나까지 담아내야 하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1번 항목을 제외한 모든 칸이 빽빽하게 작성된 기자 신청서 양식을 켜두고 손톱을 뜯었다. 다리를 달달 떨며 초조하게 시계를 봤다. 제출기한이 정해져 있지는 않았지만 이왕이면 양식을 받고 3일 안에 전달함으로써, 앞으로의 기자활동에서도 데드라인을 넘기지 않을 것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스스로 정한 제출기한까지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남았지만, 필명이라는 난제가 돌산처럼 무겁고 커 보이는 탓에 시간 안에 정하지 못할 것 같아 초조하고 불안했다.
구글을 켜서 '필명 정하는 법', '필명 추천', '담백한 필명'과 같은 키워드를 마구 검색했으나 별 소득은 없었다. 무심한 커서를 휘두르기를 몇 분, 가족 단톡방이 울려 반자동으로 클릭했다. 이 시간이면 아빠가 성경말씀을 보내셨겠거니. 역시나 아빠가 보낸 몇 줄짜리 성경 구절과 그에 대한 설명이었다. 제목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필명은 일상에서 짓는 거라던 이름 모를 블로거의 말을 되새기며, 문장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너무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단어를 지우고 나니 '의'와 '아들', '이신'이 남았다.
내 성을 붙여 외자 필명을 지을까 싶어 내 성에 '의'를 붙여 보니 '오의'라는 단어가 탄생했는데, 어딘가 모르게 '오이'나 '요의'와도 비슷하게 읽히고 무엇보다 뜻을 부여하기 어려워 탈락시켰다. '아들'은 말할 것도 없다. 여성이 쓰기엔 많은 설명과 용기가 필요한 필명이었다. '이신'은 꽤 그럴싸했다. 그대로 읽으면 중국어 단어 怡心(yi xin), 즉 '기쁜 마음'이라는 뜻에 닿는다는 점이 좋았고 '이'에 외자 이름이 붙으면 어딘가 조선시대 왕족 이름 같아서 엘레강스하기도 했다.
썩 만족스러운 필명이 탄생했으니 호쾌하게 신청서를 발송했다. 하염없이 메일창을 들락거리기를 며칠, 오지 않는 메일을 기다리며 한숨만 푹푹 쉬던 5일째, 드디어 메일이 왔다.
<○○○ 기자 선정을 축하드립니다>
근무 중에 소리 없이 쾌재를 불렀다. 메일 내용에는 기자 활동을 진행하는 방식이 소상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금방 기자들이 모여 있는 단톡방에 초대받아 인사와 반가움을 나눴다. 이미 2월 호는 발간 준비 중이니, 3월 호 제작부터 함께 하기로 했다.
드디어 누군가가 읽는 글을 계속 쓸 수 있게 됐다. 블로그에 혼자 쓰는 글이나 다이어리에 혼자 끄적이는 글 말고, 책이라는 주제에 대해 깊고 다양하게 다룰 수 있게 됐다.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읽은 책과 소회를 나누고 일상에서 나눌 수 없는 심층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앞으로 더 풍부해질 독서 활동이 기대가 된다.
새로운 시작 앞에 섰다. 출발점은 그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지만, 어느 지점보다 끝과 가장 먼 지점인만큼 고민하고 답을 찾을 시간이 충분하기에, 만끽할 기쁨도 그만큼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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