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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te Jun 30. 2022

관심 없는 관심 사양하겠습니다!

독이 되는 충고

독일 늦깎이 유학생이다.


난 독일에서도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

여기서 '완전한 독립' 이란

한인 커뮤니티를 벗어나 온전히 독일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사실 이 글의 제목처럼 한국사람들의 유독 두드러지는 단점인 '가짜 관심'이 싫어서 유학을 나온 이유도 있는데 여전히 한인사회의 구성원으로 속해 있는 것을 보면 '완전한 독립'을 향한 내 의지도 그다지 절박하지 않은 듯하다. 여전히 독일말보다 한국말을 더 잘하고 이 글도 한글로 쓰고 있고 이 글을 읽을 잠재적 독자들도 한국인들이다.


나는 태어나기 전부터 교회를 다닌 소위 '모태신앙' 이다.

이 글의 제목을 보고 위 한 줄을 읽고 무릎을 탁 치며 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겠구나 예상을 한 독자가 있다면 분명 모태신앙인 이거나, 지금 교회를 다니고 있거나, 교회가 질려서 그만두었거나 이 셋 중에 한 가지에는 속한 분이 아닐까 싶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며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았다.

어릴 적 우연히 같은 교회였던 유치원 선생님 손에 이끌려 성도들 앞에서 노래를 부른 적이 있는데

그 뒤로 신동이니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느니 같은 칭찬을 들으며 전교인들에게 내 이름 세자를

각인시켰다. 교회가 너무 고인 물이었던지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교회의 구성원은 거의 바뀌지 않았고 새로 태어나거나 새로 입회한 사람들만 종종 있을 정도로 거의 모든 교인들이 20년 이상 매주 모여 예배를 드렸다.

그래서 전교인이 나의 성장과정을 지켜봤고 (뭐 그렇게 관심 있게 본 것이 아니고 그냥 본 것) 난 그런 관심과 애정? 을 바탕으로 성장기를 보내고 있었다.


별문제 없이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데 사건은 내가 진로를 결정함과 동시에 벌어졌다.

청소년기 가장 중요한 시기인 진로를 결정해야 되는 시간이 나에게도 다가왔고 나는 음악을 하겠노라 결정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교인들도 내가 음악을 하겠다고 결정한 것을 알고 있었고 (내가 음악 한다고 악기 연주하고 설치고 다니기도 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내'가 아닌 내 '진로'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 관심은 자연스럽게 충고로 이어졌다.


처음 들었던 충고는 이거였다.

'너 음악 해서 먹고살 수 있겠어?'

아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웃긴 이야기인데 어릴 때는 너무나 충격적으로 느껴졌나 보다.

두 번째는 이거였다.

'너 너무 늦게 시작해서 인 서울 못할 텐데...'

이 두 개의 충고는 당시 어린 마음에 나를 향한 경멸과 멸시로 느껴졌다. 특히 인 서울은 당시 지방대에 대한 편협한 편견이 있었던 나에게는 꿈과 동경의 대상이었기에 더했다. 이 두 개의 충고 이후에 진짜 쏟아지듯 여러 어른들의 충고들로 내 귀에는 늘 피가 흘렀다. 동시에 나는 상당히 의기소침해지며 자신감을 잃은 삶을 살았다. 위의 두 충고는 내 마음에 흉터처럼 남아서 아직도 드문드문 생각난다.


인생은 계속 흘러간다. 수많은 관심을 받으며 나는 내 인생을 계속 살았다.


두 번째 사건은 독일에 유학을 오고 나서 벌어졌다.


뼛속까지 모태신앙 인이었던 나는 독일 가면 절대 한인교회는 가지 말라는 교수님의 충고를 뒤로 한채 유학을 와서까지 한인교회를 출석했다. 젠장

한인교회는 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다. 특히 음악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유럽이 클래식 음악이

본고장이고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학비용이 저렴하다 보니 젊은 음악가들과 이미 유학 와서 정착하고

계신 어른들도 비교적 많았다. 또 음악으로 유학을 왔다 하니 관심을 많이 받았다. 한인교회는 음악이 꼭

필요한 곳이고 연주자들은 항상 환영을 받는다. 봉헌 연주처럼 솔로 연주를 하고 나면 많은 교인들이 인사를 오셔서 잘 들었다고 칭찬도 해주시고 앞으로의 진로도 물어보신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건 그중에 충고를 해주시는 분들도 꽤나 계셨는데 그 충고들이 한국에서 들었던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졸업해서 먹고살 수나 있겠어?'


뭐 사실 아예 틀린 말도 아니니까 어른들이 하시는 말 뭐 그럴 수 있다 치고 오케이.

그런데 유학을 와서 음악을 전공하고 졸업한 선배들이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런 충고를 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음악을 하다가 중도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하며 독일에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꿈과 기대감에 가득 차 유학을 온 청년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것인가?' 라며 사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무 현실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문이 좁지만 너무 초장부터 초를 치는 거 아닌가? 자기 음악인생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너도 겪어봐야 안다고 겁을 주는 것인가?


그들도 처음 유학 올 때 얼마나 큰 꿈과 기대에 부풀어 비행기를 타고 왔을까?

삶의 풍파에 치여 부푼 꿈과 기대가 사그라들어 냉소적이고 부정적으로 변해버린 것일까?


이야기가 조금 무겁게 흘러갔다.

필자는 이러한 충고들을 모조리 다 가슴에 품고 살고 있다. 어릴 적 수도 없이 들었던 충고로 인한 상처들, 마음의 짐들, 유학 와서 들었던 선배들의 충고들. 짧은 인생을 돌아보면 희망 섞인 말들보다 부정적인 충고들이 90%의 비율로 압도적으로 높다. 모두 다 관심이란 명목으로 자행되는 일들이다. 이런 충고를 하기 전 꼭 하시는 레퍼토리들이 있다. 내가 너한테 관심이 없으면 이런 말도 안 하지, 이게 다 관심이 있어서 하는 이야기야...

얼어 죽을 관심이다.


'관심'의 정의를 위키백과사전에서 찾아봤다.

관심: 어떤 것에 마음이 끌려 주의를 기울임. 또는 그런 마음이나 주의.

-출처: https://ko.dict.naver.com/#/entry/koko/ff28af0f535a4c559ba193fc08a7d4f7


마음이 끌리긴 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유학 와서 고생길을 자처하고 있었으니 궁금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주의를 기울이긴 했을까? 주의에는 또 여러 가지 뜻이 있다. 그중 하나는 '마음에 새겨두고 조심함' 이란 뜻이 있는데 이 마음에 새겨두고 라는 말이 필자에게 울림이 있다. 끌림이랑 새겨둠은 다른 차원의 것이다. 끌릴 수는 있으나 새겨두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필자는 '관심'을 스스로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관심: 어떤 것에 마음이 끌려 그것을 마음에 새겨둠


마음에 새겨둔다면 그 사람이 계속 생각날 것이고 걱정될 것이고 챙겨주고 싶을 것이고 도와주고 싶을 것이다. 이러한 마음을 갖고 있어도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진짜 관심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데 누구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말이다. 그렇게 이루기 어려운 관심을 갖는다면 저런 부정적인 말들이 쉽게 충고랍시고 입에서 튀어나올 수 있을까? 진짜 관심을 갖더라고 부정적인 말은 하기가 쉽지 않다. 거짓 관심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충고는 저주에 가깝다. 필자는 거짓 관심을 앞세운 저주를 너무나 많이 듣고 살아왔다. 그 저주들은 차곡차곡 쌓여 무의식적으로 나의 인격을 형성하였으며 삶을 사는데 꽤나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당연히 모든 이들의 관심과 충고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다행히 아직 정신은 건강해 저주들은 알아서 잘 걸러 듣는 편에 속한다. 그리고 인생에 도움을 준 진짜 관심과 충고도 많이 들었으며 그것들은 나의 인생의 좋은 자양분으로 사용되고 있다. 교회 공동체를 폄하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에서 좋은 경험도 많으며 행복했던 기억과 추억도 늘 간직하고 있다.


안 좋은 경험들은 전부 나의 인생의 반면교사로 삼아 뼛속까지 새기고 있다. 그러면서 나를 돌아본다. 나도 저런 가짜 관심으로 저주에 가까운 말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만약 또 저런 가짜 관심으로 행하는 충고를 듣는다면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관심 없는 관심 사양하겠습니다!"


진짜 관심이 너무나 그리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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