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배우여서, 퇴사합니다. 20240828
나는 생각이 단순한 편인가? 머릿속에 몇 프로의 저장공간이 남았을까?
휴대폰처럼 잔량 표시가 있으면 좋으련만.
고민도 걱정도 늘 안고 사는 걸 보면 별로 단순하진 않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자 맘먹으니 회사에서 있던 일이 전보다 더 흐리게 보인다.
(퇴사와 동시에 다 버려두고 올 참인가?)
그래도 나에게는 <백화점 C 양 체험판>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궁금하신 분들은 저의 글 목록으로 가주세요. 제발요.)
이제 근무가 내일 하루 남았고, 이 에세이도 마무리를 해야 한다. 더 밀도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메모장을 켰다. 나의 메모장 중구난방 속 하나는 연기노트이다. 그리고 대본과, 고객에게서 발췌해 낸 특정 상황 별 특징 등등등이 들었다.
연습실에만 있던 어릴 적부터 연습의 개념은 항상 해야 하는 것, 같은 것을 몇 번이고 반복하며 체득시키는 것이라는 것에 대해 빠삭하게 이론적으론 알고 있다.
하지만, 아침 출근해서 밤늦게 마치는 백화점 부매니저는 몸이 10개라도 부족했는데,
그럼 연습을 어디에서 하느냐. 매장밖에 없었다.
뭔가 연기연습이라고 하면 거창하게 액션을 취해가며 감정 소용돌이를 탈 것 같지만 그럴 것 없었다.
고객이 없을 땐 대사를 입에 붙이고, 감정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가끔 종이를 꺼내 메모하고,
짤막한 한 씬이 나오기 전의 약 80프로 정도의 과정을 회사에서 마무리해 둔다.
백화점에서 아무도 내가 배우임을 모르고, 절대! 밝히지 않기 때문에 대본을 잘 숨긴다.
(요즘 대부분 파일로 주지만, 매장 내에 휴대폰 사용은 암묵적인 금지다.)
식사시간이 되거나 쉬는 시간이 되어 매장에 혼자 남게 되면 대기 자세를 취한 채, 고객의 동선을 살피며 그때부터 연습은 시작되고,
어쩔 땐 대사를 외우거나 화술 구사를 한다고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대사를 내뱉거나, 중얼거릴 때 옆 매장 직원과 눈이 마주친 적은 몇 번 있다.
(고객이 너무 없어 지루해서 미쳐버린 여자라고 생각했을 거다.)
그다음 쉬는 시간에 칸막이가 쳐진 안락한 휴게실에서 조금 더 다듬는다.
고객이 없어 매출이 나오지 않아 속상한 날은 대본 연습하기 딱 좋은 날이라 생각한다.
대사가 꽤 긴 오디션 영상을 찍어야 하는 날에는 늦은 밤 퇴근해 밤을 새우고, 씻고 다시 매장으로 출근하는 날이 자주 있었다.
고정된 일을 하지 않는 나의 배우 친구들은 여유로웠고, 반면에 난 늘 피곤했고, 피곤을 못 이기니 마음에 드는 영상이 나오지 않으면 눈물이 터져 울면서 밤을 보냈다.
난 빨리 찍고 이제 그만 자고 싶은데, 쉬지 못하니 짜증 나고 열받아서 울음이 받쳤다.
어릴 때 하기 싫어 울면서 억지로 하던 공부나 연습등이 그랬다.
(그땐 연필로 글자를 마구 갈겨서 노트에 구멍 났다...)
울다가 촬영하다가 그러다 보니 눈도 붓고 빨개지고 코가 막혀 목소리가 변하고,
그러다 아침이 와서 겨우 회사에 영상을 넘기고 잠을 깨우기 위해 음식과 커피를 무지성으로 밀어 넣고 다시 출근하고.
이렇게 적다 보니 건강한 게 이상한 거 같긴 하다.
“나도 이제 안 그래도 돼! “
호탕하게 소리치고 싶지만 자꾸 불안감이 몰려온다.
그땐 직장인인 내가 괜히 원망스럽고, 억울하고, 정말 힘들었는데….
그래도 참 좋고 뜨겁고 행복했고 사랑스러웠고 대견했던 날들이었다.
내 생에 그토록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날들을 맞이할 수 있을까?
기대가 된다기보다 기도가 필요한 것 같다.
아직 주말 하루 남았네요, 좋은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