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배우여서, 퇴사합니다. 240929
일요일 마지막 출근길은
겨울냄새가 빼꼼했고, 하얀 뭉게구름이 많았고, 버스에 타서 내릴때까지 내내 버스에 사람이 없어 버스아저씨와 큰소리로 인사했고, 버스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병원에서 유제품 금지랬지만, 늘 마시던 라테를 포기할 수 없어 “마지막 날이니까!” 했고 ‘오늘은 아침 김밥도 먹으면서 카드 써야지.’ 하고 다짐했다. 마지막 날이니까 뭐든 다 해야지.
이어폰 속 피아노 선율은 아름다웠고 주말 지하철은 조용했다. 내가 월터 같았다.
나는 태연했고, 마지막 출근길은 생각보다 순탄하며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출근해서 간단한 메시지카드를 썼고 조금 실감되어 두근거렸다. 설렘이 아니라 걱정의 두려움이 더 적당한
말인 것 같다.
마음이 닿던 직원들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작은 선물을 좀 샀고 카드를 썼다.
몇 시간 뒤면 퇴사를 하니까.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응대하고, 회사에 모든 미련을 버리려는 듯 짐을 쓰레기통에 처박고 나머지 짐을 들쳐 매고 막내언니의 푸념을 들으며 정문밖으로 나왔다.
해는 지고 있었고, 아침과 같이 구름이 많았고, 하와이 같았다.
서울로 오자마자 온 이곳, 이 동네가 너무 좋아 일하고 살았던 정든 이 동네. 울고불고했던 이 동네.
숨을 크게 마셔 폐에 가득 담고 촌스럽게 사진도 몇 방 남긴다.
왜들 그렇게 퇴사할 때 오버하나 싶었는데, 남들 하는 건 하나도 빠지지 않고 해내는 멋진 나였다.
괜히 서글퍼질 수 있는 날이지만, 집 근처에 우연히 지인이 와있다! 어디든 있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다정한 위안이 된다.
메신저 최상단 핀고정이 된 몇 개의 단톡방이 없어지면 많이 허전하겠지?
정문을 나서는 때는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두렵고 설레는 걸음이었다. 괜히 비장하다.
무명배우여서, 퇴사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