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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나의 새벽별 May 26. 2022

나의 쓸모는 누가 정하는가?

생명은 그 자체로 모두 가치 있다.

아이들 책을 읽다가 한 번씩 뼈 맞음을 당할 때가 있다.

'이건 아이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어른을 위한 책 아닌가?

요즘은 어른을 위한 그림책 읽기 프로그램도 꽤 있다. 적은 글밥과 짧은 분량의 아이들 책이지만 어른들의 마음 어느 구석을 송곳으로 쿡 찌르는 순간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읽은 [일수의 탄생]이 그랬다.

(유은실 작가의 책이었다. [순례 주택] 이후로 나는 이 작가의 팬이 되었다.)

이 책은 초등학생들을 위한 책이지만 어른들이 꼭 읽어봐야 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수는 엄마의 모든 기대를 한가득 짊어진 채 태어났다. 엄마는 일수만 바라보면서 자신의 인생을 갈아 넣는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면서 커가는 일수에게는 자신의 생각이라는 것을 말할 기회가 없는 것은 당연하고, 생각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살아간다. 마치 영혼 없이 몸만 있는 아이처럼 말이다. AI와 다를 바 없다. 아니, AI는 신기해서 존재감이라도 있지만 일수는 존재 감 없이 있으나 마나 한 아이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조차 알지 못하는 일수에게 동네 명필이 질문한다. '자네의 쓸모는 무엇인가? 그 쓸모는 누가 정하는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도 늘 쓸모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던 것 같다. 열심히 해야 하고, 최선을 다해야 하고, 안돼도 노력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자책하고 닦달하기도 했다.

비슷하게 내 아이 역시 사회에서 원하는 쓸모 있는 인간으로 자라기를 바랐던 것 같다. 나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좀 더 편안하고 행복한 길로 걸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쓸모'라는 것을 감히 누가 정하는가. 누군가 정해주는 쓸모에 맞춰 사는 것이 과연 주체적인 삶이라 말할 수 있을까? 정말 행복할 수 있는 길일까?

더불어 '쓸모'라는 것이 과연 한 인간을 두고 거론될 수 있는 말일까?


아이를 보면서 가끔씩 답답하고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다. 그것은 내 아이가 사회가 원하는 쓸모 있는 인간으로 자라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서 오는 것이었다. 쉽게 포기하는 아이가 될까 봐, 뒤처지는 아이가 될까 봐 겁났다. 내가 정한 쓸모로 아이를 재단하고 있었다.


어제 집에서 키우던 물고기 한 마리가 죽었다. 스무 마리가 넘는 작은 백운산 물고기들 중에서 주황이라는 이름을 가진 물고기였다.

사실 나는 그 작은 물고기들이 다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동물을 유난히도 사랑하는 큰 아이에게는 한 마리 한 마리가 모두 다 각별하다. 각자의 이름을 지어서 불러주고,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돌봐준다. 아마도 우리 집 물고기들 세계에서는 큰 아이가 가장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평판이 났을 것이다.

설사 그렇지 않을지라도 어떤가.

나보다 따뜻하고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아이는 이미 그 자체로 눈부시다.


우리는 쓸모 있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태어난 것으로 이미  쓸모를 다했다. 존재하는 것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다.

한 생명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러므로 나의 쓸모를 누가 정하는가에 대한 정답은 없다.

생명은 존재 자체로 이미 쓸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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