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닿게 될 그 순간_영화'아무르'
우리는 모두 죽음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평온한 노년의 삶을 보내고 있던 조르주와 안느에게도 결국 오고야 말았다. 삶을 조금씩 갉아먹다가 끝내 삼켜버리는 노년의 병듦이. 실패 확률이 5%밖에 되지 않는 수술을 한 안느는 어이없게도 5%의 확률에 들어가게 된다. 멀쩡했던 아내는 반신불수가 되어 돌아왔다. 더 이상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마주하게 된 순간에 조르주와 안느가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두려움이었을까. 원망이었을까. 막막함이었을까. 혹은 절망감이었을까.
병원에서 퇴원해 집으로 돌아온 아내를 휠체어에서 일으켜 의자로 옮기는 장면은 아주 느리고 힘겹다. 그것은 앞으로 이 부부가 겪어야 할 일상을 암시한다. 갑자기 아픈 사람으로 변해버린 아내와 그것을 그저 지켜보며 돌봐야 하는 남편. 그들의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흐르고 그 시간의 대부분이 힘겨움으로 채워지게 된다.
병원에서 돌아온 안느는 조르주에게 한 가지 약속만 해달라고 부탁한다. “다시는 나를 병원으로 보내지 마.” 조르주는 그러겠다고 대답한다.
노부부는 다시 일상을 살아간다. 살아있기 때문에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용변도 혼자서 해결할 수 없고, 스스로 움직이는 것도 어려운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겨운 안느는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조르주 또한 최선을 다해 돌보지만 자신의 체력과 능력에 한계를 느낀다.
딸이 찾아와 엄마의 모습을 보고 걱정하지만 조르주는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말한다. 안느의 상태가 더 악화되었을 때 다시 찾아와 화내는 딸에게 조르주는 “네 집에 데려갈 거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딸은 차마 대답하지 못한다. 늙은 노부부에게 이 상황이 쉽지 않음을 알지만 모른 척 돌아가는 딸의 모습에서 나를 본다. 부모의 진짜 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싶은 철없고 이기적인 자식의 마음. 나는 가끔 무서워진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휑한 집에 혼자 있는 딸처럼 나에게도 올 그 순간. 부모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는 날이 닥치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두려워 지금은 고개를 흔들며 회피하게 된다. 안느의 병이 더 진행되면서 대화를 하는 것조차 어려워지게 된다. “인생은 아름다워. 인생은 참 길어.”라고 말했던 안느는 이제 물도 먹기를 거부한다. 마치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듯이. 그런 아내를 달래다가 지친 조르주는 급기야 아내의 뺨을 때린다. 자신도 통제하지 못한 찰나의 순간에 했던 그 행동이 아내에 대한 걱정이었는지 돌봄의 한계에 부딪친 분노였는지 알 수 없다.
안느가 누운 채로 아프다는 말만 큰소리로 정신없이 내뱉던 어느 날, 조르주는 안느를 달래며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해준다. 이야기를 들으며 조용히 안정을 다시 찾은 안나의 얼굴 위를 베개로 짓누른다. 충격적인 결말이었다. 나는 아직 마지막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다. 조르주의 마지막 행동이 충동적이었던 건지, 찬찬히 계획해 왔던 건지 모르겠다. 그 마음을 이해해보기에는 나는 아직 그 시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르며 우리 모두 결국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나 또한 멀지 않아 닿게 될 그 순간,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피하고 도망쳐도 오고야 마는 그 순간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제목은 프랑스어로 사랑을 뜻하는 ‘아무르’다. 감독은 어떤 사랑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아름답지만 참으로 긴 인생도 언젠가는 끝이 있듯이 사랑도 끝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걸까. 조르주의 마지막 선택이 사랑이라면, 이 사랑은 최승자 시인이 말한 선량하고도 괴로운 관계-가족-의 사랑이 아닐까.
행복하기만 한 인생, 아름답기만 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듯이 죽음 역시 마찬가지다. 아름답게 늙어가며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죽음 너머의 세계를 가본 적이 없기에 감히 죽음에 대하여 더 이상의 정의를 하지 못하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