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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나의 새벽별 Aug 26. 2022

물약을 먹다가 정직함을 생각하다

다음에는 알약으로

나는 미숙아로 태어나 죽을 고비까지 넘기고 살아났다고 한다. 온 가족이 애타게 기도했다고 하지만 나는 기억나지 않는 그 시간. 그 시간 덕분인지 크는 동안 골골대긴 했어도 큰 병치레 없이 자랐다. 체력을 자부한 탓인지 나이의 탓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얼마 전부터 몸이 나와 불화하기 시작했다. 평소에 웬만한 일로는 병원에 가지 않는데 이번에는 자진해서 건강검진을 신청했다. 오늘은 검진의 피날레. 대장 내시경을 하는 날이다.


며칠 전 병원에서 대장 내시경 전 먹을 약의 종류를 선택하라고 했다. 알약을 24개씩 두 번을 먹어야 하고, 물약은 1리터씩 두 번을 마셔야 했다. 알약은 평소 먹는 알약보다도 크기가 컸고 24개를 하나씩 다 먹고 나면 배가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물약을 선택했다. 어제저녁에 드디어 첫 물약을 마셔야 했다. 1리터 통에 물을 붓고 가루를 넣어 흔들었다. 복숭아 향이 났다. ‘2프로 복숭아 맛’ 음료가 떠올랐다. 그 맛이면 잘 먹을 수 있겠다 생각했다. 꿀떡꿀떡 꿀떡. 몇 번의 목 넘김 후 약 통을 보았다. 엥? 거의 줄지 않았다. 그 순간 복숭아 향이 몸에서 콧속으로 올라와 퍼졌다. 이건 2프로가 아니잖아. 복숭아 맛에 오일 맛이 섞인 느끼한 2프로 음료의 맛이랄까. 아직 먹어야 할 약이 거의 1리터가 남아있었다. 이번에는 숨 참고 꿀떡. 몇 번은 마시고 몇 번은 헛구역질을 하며 겨우 다 마셨다. 이번에는 배가 너무 불렀다. 액체를 마셔도 배가 터질 듯이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난 사실 평소에 커피를 제외한 액체류를 거의 먹지 않는다.) 몇 분이 지났을까. 신호가 왔다. 그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입 속부터 식도까지 남아있는 느끼한 복숭아 향에 헛구역질이 나오고, 위는 너무 불러서 터질 것 같고, 장은 내보내기를 시작했다. 먹은 것도 없이 물약만 먹은 덕인지 나오는 것은 액체뿐이다. 계속 나오는 물줄기에 순간 요도의 길이 바뀌었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상상하지 마시길.) 곧이어 드는 엉뚱한 생각은 몸이 참 정직하구나 싶었다. 먹은 대로 내보내는 것. 어떤 속임수도 없이 올곧고 정직한 소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늘 생각이 많다. 그런데 나는 생각을 정말 하는 걸까. 힘들고 어렵고 뿌옇더라도 깊게 파헤치면서 어떻게든 그 안에 정확히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려고 노력했는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고민이 많았을 뿐 생각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깊게 생각하고 파헤치기 어려우니 그냥 고민들을 뭉뚱그려놓고서는 ‘나는 생각이 많다’라고 그럴듯한 포장으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다. 내 몸이 하는 것을 내 머리는 못하고 있었다. 내 머리의 회로에도 올곧음과 정직함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동안 한 데 뭉쳐놓았던 것들을 이제는 하나하나씩 떼어내어 깊게 들여다보고 생각해봐야 한다. 시간이 들어도 정직한 노력이 필요할 때이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쉬운 일이 어디 있나. 물약 1리터를 먹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인생도 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다음번 검사 때는 알약을 먹어 볼 작정이다. 쉽지 않은 길 중에서 혹시나 조금이라도 쉬운 길을 가고 싶은 얄팍한 생각이 또 먼저 작동하고 만다.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수많은 연습이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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