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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나의 새벽별 Sep 18. 2022

속는 셈치고 노년을 준비해보려 합니다

-『노년에 관하여』 (키케로, 궁리, 2002) -

노년이 성큼 다가오다

태어나면서부터 열심히 끼니를 챙겨 먹었다. 살려는 본능이었겠지. 아, 간식도 먹었다. 삶의 여유도 느껴보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나이까지 먹었다. 후유, 다시 게워내고 싶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중년이 되었다. 아무리 거부하며 애써도 노년이 되겠지. 그게 인간이 걸어가는 오직 하나의 길이니까. 그럼에도 노년이라는 시기는 멀게만 느껴졌다. 내가 닿기에는 아직 꽤 거리가 있어서 형체조차 선명하지 않고 뿌옇게 보이는 계절. 

웹에서 ‘노후준비’라고 검색을 해보면 반복적으로 나오는 단어들이 있다. 노후자금, 연금, 보험 등 온통 경제적부분에 대한 언급이다. 노후준비를 하는데 최소 10억이 필요하다는 말은 너무 많이 들어와서 마치 진실인양 느껴진다. 요즘은 노후준비를 2,30대에 시작한다고 하던데, 나의 노후준비는 무의 상태이다. 어느 날, 나에게 필요한 노후자금과 매달 모아야 하는 돈을 계산해보긴 했었다. 아무리 계산을 해도 현실 불가능한 숫자에 펜을 던져버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노년을 더 이상 그려보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 그런 척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독사하거나 빈곤에 처한 노년의 현실들을 뉴스에서 종종 볼 때마다 불안감 같은 것이 몽글몽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노년에 준비해야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에 짓눌려서 모르는 것이 상책이라 여기며 뒷전으로 밀어버린 탓 일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도 노년이 성큼 다가왔다. 특별히 운동을 하지 않아도 체력이 좋은 탓에 크게 아프지 않고 지내왔는데 작년부터 나와 몸은 불화하기 시작했다. 소화불량이 주기적으로 생겨나고, 목과 어깨의 염증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눈의 노화가 진행되었다. 

싯다르타가 나에게 말을 건넨다. “지금 네 안에 이미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다.” 


고마워요, 키케로

불안하고 막막하게만 느껴지는 노년에 한 줄기 빛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최고의 웅변가이자 정치가이며 문인이었던 로마의 현인, 키케로이다. ‘노년이 불행한가?’ 키케로는 말한다. 자신 안에 훌륭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수단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는 인생의 모든 시기가 힘겹고 불행한 법이라고. 씨를 뿌리면 곡식이 익고 열매를 맺듯이 우리의 인생에서 노년을 맞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실이다. 그러나 노인이라면 원로원이나 지혜로운 자로 우대받았던 로마시대에도 노년이라는 시기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지 않고, 할 수만 있다면 미루고 싶은 시기였나보다. 『노년에 대하여』에서 키케로는 실존했던 로마의 대정치가인 카토의 입을 빌려서 노년은 비참한 시기라는 항간의 주장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한다. 

첫째, 노년은 일을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노년에는 분별력과 사려깊음, 원숙함으로 젊은이들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둘째, 노년은 몸을 허약하게 만든다. 젊은이의 체력에 비하면 노년의 체력이 약해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젊은이의 체력을 요구하는 노년의 일은 거의 없다. 또한 노년의 쇠약함은 젊은 시절의 방탕함 때문이며, 근면함으로 노년의 약점을 벌충할 수 있다. 셋째, 노년은 거의 모든 쾌락을 앗아간다. 키케로는 이것이야말로 노년의 멋진 선물이라고 말한다. 육체적 쾌락은 자연이 인간에게 준 역병이며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노년이야말로 축복이다. 다만 친구들과 함께하는 식사와 대화의 시간은 노년에 더욱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쾌락이며, 그중에서도 노년에 피어나는 학구열은 어떤 쾌락과도 견줄 수 없는 최고의 정신적 쾌락이다. 넷째, 노년은 죽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죽음은 노년을 맞이한 사람들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가까이 있는 것이며, 죽음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결실이다. 육체의 거푸집에 갇혀 있던 영혼이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말한다. “내가 살았다는 것을 나는 후회하지 않네. 나는 헛되이 태어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살았으니까. 그래서 내가 삶을 떠날 때 집이 아니라 여인숙을 떠나는 듯한 느낌이 들 것 같네. 자연이 우리에게 준 것은 임시로 체류할 곳이지, 거주할 곳이 아니기 때문일세.”

다행이다. 알면 알수록 온통 암울하게만 보이는 노년을 이토록 이상적으로 펼쳐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니. 거기에다 키케로이지 않은가. 로마시대의 현인이었던 키케로가 수세기를 건너뛰어서 21세기를 살고 있는 나에게 보내는 희망의 전언이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현실에서 이상적 노년은 가능할까

키케로가 말한 이상적 노년이 과연 지금의 현실에서도 가능할까. 대부분의 나라들이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고, 의료과학의 발달로 너무 오래 허락된 삶과 그럼에도 겪을 수밖에 없는 질병들로 노년은 힘겹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노년의 안락사문제는 큰 화두이다. 얼마 전 프랑스 배우 알랭 드롱의 안락사 선택이 화제가 되기도 했었고, 의사조력자살이 합법화된 스위스에서 안락사를 기다리고 있는 한국인들도 꽤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특히 한국에서는 혐오시대의 급격한 도래로 노인 또한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중이다. 연금충, 나일리지(나이+마일리지), 노슬아치(노인+벼슬아치) 등은 노인을 지칭하는 새로 생겨난 비속어이다. 이쯤 되면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아니라 ‘아프니까 노년이다’가 되어야 할 것 같다. 키케로는 이런 시대에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노년에 찬사를 보내는 것일까. 사실 키케로가 노년을 무조건적으로 긍정하며 찬양했던 것은 아니다. 너무 가난한 노년은 힘들 수 있고, 재물이 축척된 노년이라도 짐스러울 수 있으며, 체력은 젊음이보다 약해질 수밖에 없고, 권위 있지 못한 불행한 노년을 맞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키케로에 따르면 이것은 노년이라는 시기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시간만 흘려보내는 사람은 이상적인 노년을 맞이할 수 없다. 노년에 있어서 키케로가 말한 최선의 무기는 ‘미덕’이다. 미덕이라는 것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행운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 만들고 행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역시 쉬운 길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 키케로가 그토록 말한 노년을 만나려면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미덕을 쌓을 수밖에 없다.


이상적 노년의 조건_미덕과 우정

사실 『노년에 관하여』라는 책은 키케로가 친구에게 헌정한 대화록이다. 이후에 『우정에 관하여』라는 책도 함께 집필했는데, 키케로는 미덕의 실천과 함께 ‘우정’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나이듦에는 필연적으로 불행이 따라온다. 하지만 유머, 이해, 사랑은 필연적으로 따라오지 않는다. 이런 것들을 제공하는 것이 우정이다.” “인생에서 우정을 앗아가는 자들은 세상에서 태양을 앗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신들이 인간에게 준 선물 가운데 우정보다 더 좋고 즐거운 것은 없다.”(『우정에 관하여』중에서) 키케로는 우정을 이어가는 데 있어서도 미덕의 필요성을 강조했는데, 그렇다면 키케로가 말하는 ‘미덕’이란 과연 무엇일까. 

키케로는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스토아철학은 헬레니즘 시대에 탄생한 철학으로 물질주의가 팽배해진 시대에서 물질의 이면, 진리, 영혼 등을 강조하며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추구했다.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조화를 이루려면 영혼의 탁월함을 갖춘 존재, 즉 덕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 덕은 푸코가 말한 ‘자기배려’라고 볼 수도 있다. 자기배려는 말 그대로 자신을 배려하며 돌보고, 스스로에게 몰두하는 것이다. 일종의 ‘자기수련’이다. 즉,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단련시키며 잘 돌보는 것이다. 키케로에 말을 빌리자면, 적당한 식습관과 육체적 건강관리, 마음의 수양과 배움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과 탐구를 말한다. 여기에 꼭 필요한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진실을 수행하는 자(파레시아스트)의 존재이다. 키케로는 아마 파레시아스트의 역할을 친구가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 키케로는 젊은 시절부터 부단히 쌓은 덕과 우정을 나눌 친구가 있다면 노년은 위태하거나 비참한 시기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나만의 미덕 가꾸기 

키케로의 이상적 노년이 어디까지 실현가능한지, 얼마나 유용한지는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라 나로서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어쨌든 노년은 다가오는 중이고, 선택의 여지는 그리 많지 않다. 키케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사후가 없다면 어차피 죽음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니 무시되어야 마땅하고, 사후가 있다면 영혼의 영생을 의미하기 때문에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노년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사는 동안 미덕을 잘 쌓아왔다면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마음의 평온을 누리며 노년을 잘 보낼 수 있을 것이고, 노년의 정신적 질병(특히 뇌)이 왔다면 이미 스스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보다는 무엇이라도 하는 것이 낫다. 

키케로가 말한 미덕은 갑자기 쌓여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차곡차곡 쌓아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통장에 10억을 모으는 대신(사실 그럴 재간이 나에게는 없다.) 미덕을 모을 작정이다. 내가 모을 수 있는 미덕이란 무엇일까. 사실 아직 적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매번은 아니지만 간헐적으로나마 닿게 되는 자족에서 나만의 미덕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자족이란 스스로 넉넉함을 느끼며 만족하는 것이다. 세상의 소리에 자주 흔들리고, 꿈틀대는 탐욕에 종종 휘청대는 나에게 자족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배우고, 읽고, 쓰려고 한다.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 자아성찰과 자기위로, 진지한 사유를 향한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같은 길을 강구해나가는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 이거야 말로 일석이조이다. 꾸준히 배우고, 차근차근 읽고, 어렵지만 쓰는 일을 지금부터 지속해서 해나간다면 나의 노년은 그리 비참하고 두려운 시기만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설사 아니더라도 어떤가. 배우고 읽고 쓰는 일은 어리석음에 빠져있는 나를 조금은 구원해줄 것이 아닌가. 나는 지금도 쓰는 중이다. 키케로에게 속는다 해도 완전히 손해 보는 일은 아니라고 자족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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