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번역 계약

나는 번역가다 #6

by 와룡


《나는 번역가다》시리즈 글을 시작한 것은, 제법 오랜 시간 이 일을 해왔기에 비록 전부는 아니지만 이 일의 흐름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으니 나처럼 번역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공유해보자는 취지였다. 한 가지 일을 이루는 데는 다양한 길이 있으니 내가 걸어온 길이 누구에게나 통용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은 내 경험뿐이니 어쩔 수 없이 그 이야기를 써 보려 한다.


나의 번역 인생은 어느 작가로부터 시작되었다. 우연히 읽은 책이 너무나 재미있어서 그 작가가 뭘 썼는지 여기저기 찾아보고 출간된 작품을 열심히 구해 읽었다. 그런데 작품도 있고 국내에 출간도 되었는데 구할 수 없는 책이 제법 있었다. 그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한 가지, 그 원문을 읽는 것이었다.

어떤 언어를 막 시작하는 초보가 원문을 그대로 읽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당연히 종이를 펴놓고 원문의 단어를 하나하나 찾아가며 그것부터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하게 된다. 물론, 그게 "번역"은 아니지만 내게 있어 그 일은 번역가로 가는 출발점이었다. 나중에야 알았는데, 그 작품은 초보가 번역할 수준의 작품이 아니었다. 당연히 나도 그때 옮긴 내용을 어딘가에 공개한 적이 없다.

그 후 슬슬 언어가 익숙해지면서 유사한 작품을 쓰는 다른 작가에게 눈길이 갔다. 처음 언급한 작가가 내가 그 언어를 배우는 계기를 주었다면, 두 번째로 언급한 작가는 나를 ‘초보의 번역 세상'으로 이끌어주었다. 왜냐하니, 두 번째 작가의 작품은 국내에 출간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도중에 출간 중단되어 결말을 볼 수 없는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 독자라면, 특히 그 소설을 좋아하는 팬이라면 당연히 결말이 궁금해질 터이고, 나 역시 그랬기 때문에 그 부분을 원문으로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 그와 관련된 온라인 커뮤니티를 하던 터라 내가 아는 내용을 커뮤니티 멤버들에게 공유하는 것이 좋겠다 생각했다.

그것이 초보 아마추어 번역의 시작이었다.


그러기를 얼마쯤, 커뮤니티에서의 활동을 통해 한 출판사에서 내가 옮긴 작품을 출간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때 나는 초보가 분명해서, 출판사 측에서는 내가 한 초벌 번역을 그대로 내지 않고 다른 번역가를 붙여 검토한 다음 출간하겠다고 했다. 즉, 초벌 번역가로서 처음으로 작품을 출간하게 된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번역 계약서를 썼는데, 아무것도 모르던 때였던 터라 계약서를 봐도 무슨 내용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기억을 되살려 보면 중요한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번역물에 대해 얼마의 금액을 얼마나 원천징수한 후 언제 지불할 것이다.

번역물의 납품기한은 언제이며, 이를 어길 시 번역가가 받을 불이익은 어떤 것이 있다.

번역물의 출판 기한은 언제이며, 이를 넘길 시 번역가는 어떤 요구를 할 수 있다.

번역물에 법적인 문제가 있으면 번역가는 어떤 책임을 져야 한다.


계약서다 보니 책임과 배상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있어서 초보가 보면 더럭 겁을 먹기 마련이다.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정말 큰 사고를 치지 않는다면 출판사와 번역가가 협상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납품 기한 하루 지났다고 칼 같이 계약 취소하거나 손해 배상을 물리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렇게 썼다고 해서 납품 기한을 안 지켜도 된다고 생각할까 봐 우려되는 마음에 당부하지만, 절대 그런 생각은 갖지 말기를 바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은 약속이다. 최악의 경우 정말 못 할 것 같으면 사전에 미리 출판사와 협의해야 한다. 납품 기한 며칠 안 남기고 말한다거나 (정말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기한이 지나도록 아무 연락도 하지 않는 것은 절대 안 된다. 솔직히 나도 출판사에 부탁해서 납품 기한을 연장한 적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을 기한에 맞춰 납품했고 개인적으로는 그 점이 번역가로서 나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납품 기한이 번역가에게 부담되는 조건이라면, 출판 기한은 번역가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조건이다. 번역료를 번역물을 납품함과 동시에 지급하는 계약도 있지만 출간 후 지급하는 계약도 있다. 만에 하나 기한이 지나도록 출판되지 않으면 번역료를 받지 못하는 일도 생긴다. 일반적인 출판사라면 당연히 출간하지 못해도 번역료는 지급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정말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럴 때 출판 기한과 이를 넘겼을 때 번역가의 권리를 명시하면 법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 번역료를 받기 위해 법적 행동에 나서지 않더라도, 저런 조항이 있으면 번역가가 다른 출판사에 자신의 번역물을 제공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자면 매절 번역 계약과 2차 저작권부터 다뤄야겠지만, 내용이 길어질 테니 이와 번역료 계약 관련해서는 다음 글에 쓰려고 한다.


아쉽게도, 나의 첫 번째 계약 작품은 결국 출간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번역료를 다 받았고, 당시 그 작품을 출판하려는 다른 출판사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계약서에 명시된 출판 기한이 벌써 10년 가까이 지났으니 만약 지금 그 작품을 출판하려는 곳이 있고 내게 번역을 맡기고자 한다면 나는 그 번역물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물론, 그건 초보 때 작업한 초벌 번역본이니 그대로 쓰지는 않겠지만.


내가 취미로 번역할 때는 온라인 사전조차 없었으니 번역기는 꿈도 못 꿀 시절이었다. 지금은 번역기가 사람 못지않고 온라인 사전도 넘쳐나기 때문에 취미로 번역하는 사람이 그 시절보다 더욱 많다. 이따금 아마추어 번역가 혹은 번역 집단이 작업한 번역물을 그대로 출판사가 사들여 출간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같은 길을 걸어온 사람으로서, 나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그 길로 데뷔하기를 희망한다. 누가 뭐래도 열정으로 시작한 사람들이고 그 분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몇 가지 주의했으면 하는 것이 있다.


우선, 번역 계약을 처음 할 때 중요한 것은 번역료가 아니다. 물론 돈도 중요하지만 한 번 하고 말 일이 아니라 앞으로 프로 번역가의 길을 걸으려면 조금 다른 부분을 고려하는 것을 권한다. 예를 들어 정식 출간이 처음이라면 번역료를 조금 덜 받더라도 출판사에 초벌 번역임을 고지하고 번역을 검토해 줄 사람을 선정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면 우선 실수를 줄일 수 있고, 출간 경험 있는 작가의 스타일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약하는 출판사에 행여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번역료를 선금으로 받거나 정해진 기한 내 출판하지 못했을 때 번역가의 권리가 무엇인지를 명시하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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