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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룡 Apr 27. 2021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고

김지혜

영화평이나 기사 평에서 PC충이라는 말이 종종 본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이름으로 차별을 조장하지 말자고 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말인데, 댓글 활동을 하지 않아 내가 직접 그 말을 들은 적은 없지만 나도 그네들이 말하는 PC충일 것이다. 차별하지 말자는데 왜들 그렇게 싫어하는 걸까? 아마도 PC충이라 불리는 이들이 하는 말이 현실 모르는 고담준론으로 들려서 그럴 수도 있고, 너무 많이 들어서 짜증스러운 잔소리처럼 느껴져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자신의 삶을 비난하는 것처럼 들리거나 양심에 찔려서, PC충이라는 말로 배척하고 못 들은 척하려는 것은 아닐까?

우리 모두 차별한 경험이 있고 차별받은 경험도 있다. 그러니 차별하기 전에 차별당했을 때의 기분을 다시 돌이켜보자. 내가 무심코 한 차별이 누군가에게는 지극한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될 테니.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고 쓰는 이 글은 독서감상문이라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면 PC충이라는 말을 듣게 될까 봐 못했던 말을 여기서 함께 써보려고 한다.


학벌과 외모 차별

글을 쓰기 시작한 순간, 내 첫 번째 회사의 신입 연수 시절이 떠오른다. 갓 졸업한 곱고 풋풋한 새내기들이 모였으니 연수라고는 해도 놀이처럼 재미있었던 시절인데, 그 재미난 시절에도 잊히지 않는 씁쓸한 기억이 있다. 풋풋한 새내기들이 있는 그곳에서는 학벌과 외모 차별이 너무 당연하게 일어나곤 했다.

"그 사람이 왜 그 일을 맡아야 해요? 모모 대학밖에 못 나왔는데."라는 말도 들었고, 어떤 예쁜 사람과 같이 하고 싶은데 그 사람이 바쁘대서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주겠다 하자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지으며 거절하는 것도 봤다. 당시 나는 그들보다는 다소 나이가 많았던지라, 나이도 벼슬이랍시고 오지랖도 넓게, "외모 같은 걸로 너무 차별하지 마. 그 사람은 널 도와주려고 하는 거잖아."하고 나선 적도 있다. 그에 대한 답은 "그래도 난 싫어. 내가 싫은데 뭐"였지만.

그 친구들이 너무 어렸기에 벌어진 일이었을 것이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 그들도 그때 일을 떠올리면 틀림없이 마음 아파하겠지.


Alcino님의 ugly and angry (출처: https://flic.kr/p/euoPp, CC BY-SA 2.0)


<선량한 차별주의자> 작가는 다문화, 소수자의 인권을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별 뜻 없이 입에 담은 '결정장애'라는 말을 통해 자신 또한 저도 모르게 차별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책은 이렇게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채 차별하는 사람을 '선량한 차별주의자'로 표현했다. PC충이라 자인하는 나지만, 책을 읽다 보니 내게도 여러 문제가 있었다. 배움을 많이 한 사람은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배움을 못하거나 거부한 사람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 우리 회사에 들어오려면 당연히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는 사람은 경제적 기회를 얻지 못하고, 그 결과로 다시 무시당하고 배제된다.


소위 가방끈이 짧은 것이 경제적 차이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사회적 차이까지 만들어내므로 가방끈이 짧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돈 벌 기회를 적게 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흔히 등장하는 인터넷 댓글이 있다. "그래서요? 능력과 무관하게 다 똑같이 돈 받는 공산주의라도 하려고요?"

이런 유의 댓글을 처음 볼 때는 무슨 말이라도 해서 이 사람을 이해시켜볼까 고민도 했지만, 이제는 그냥 자연스레 넘긴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이미 어떤 말을 해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까.


성소수자 차별

최근 <지정 생존자>라는 드라마를 봤다. 드라마 주인공인 톰 커크만의 처제는 트랜스젠더인데, 대통령인 톰에게 이 점이 큰 정치 이슈로 작용한다. 즉, LGBTQ를 지지하는 측과 지지하지 않는 측에서 너는 대체 어느 쪽이냐고 다그쳐대는 것이다. 어느 쪽을 지지하든 일부 지지층이 등을 돌리게 되는 상황이다.

톰은 처제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했는데, 어느 날 처제가 톰에게 물었다. "진짜 속마음은 날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톰의 대답은 "머리는 받아들이지만 솔직히 말해 마음은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다"였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도 생각이 많아졌다. 나도 이성적으로는 개인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내 지인 중에 누군가 성전환을 해서 나타나면 마음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무리 그래도 움찔하지 않을까?


이성적으로 지지하는 나조차 이모양이고, 이성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은 대놓고 그들을 사회의 악이니 정신병이니 하며 혐오를 서슴지 않는데, 그들은 얼마나 외로울까? 이런데 그들이 소수요, 약자가 아니란 걸까? 소수는 기본적으로 힘이 없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다수자는 소수자의 의견을 거침없이 공격할 수 있다. 반면 소수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표현을 순화하고,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자극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된다.


성전환을 하고 직업을 유지하고자 했던 한 트랜스젠더는 그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싶어 했다는 이유로 흡사 죄인이라도 된 양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온갖 비난을 듣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정 생존자> 톰 커크만의 처제 사샤도 그냥 조용히 살고 싶어 했다.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자기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눈에 띄지 않아야 욕을 덜 들을 테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조차 들어주지 않았다. 자의와 달리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이 알려졌고, 어떤 여자는 여자화장실에 있는 사샤를 비난하며 경찰을 불렀다. 그냥 조용히 살기를 원한 소수에게 다수가 저지르는 폭력이다.

그들은 소수자이기에 힘이 없고, 힘을 얻고 싶어서 용기 내 공공장소에 나서보지만, 요즘에는 그 자체로도 비난받는다. 반대 안 할 테니까 안 보이는 데서 조용히 니들끼리 지지고 볶으라면서. 똑같은 사람인데 '안 보이는 데서 하라'고 잔인하게 선을 긋는다.

Sharon McCutcheon 님의 사진 (출처: https://www.pexels.com/ko-kr/photo/3738057/)

책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동성동본 금혼이 폐지될 때 유림에서 강력 반대했다고 한다. 그들은 동성동본이 결혼하면 미풍양속을 저해하고 모두가 패륜아가 될 거라 주장했다는데, 알다시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게 대한제국 시절도 아니고, 일본 식민지 시절도 아니고, 1997년 때의 일이었다니, 놀랍기만 하다. 근친결혼이 기형을 만든다는 두려움도 한몫했을 테지만, 그건 이미 "8촌 이내 혈족, 6촌 이내 인척 간 혼인 금지"로 잘 막아내고 있는데도 그 오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상황은 변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벌어진다고 한다.


사람들은 익숙한 기존의 법과 질서에서 벗어난 낯선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중략) 연구에서는 권위에 순응하는 성향의 사람들이 "세상을 위험한 곳이라고 인식"하고 "타인의 동기를 의심하며 이질적인 사람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이 두려움과 의심 때문에 변화를 반대하게 된다.


작금의 성소수자를 향한 반응도 비슷하다.

"동성애를 인정하고 성전환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미풍양속과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아이들이 동성애를 추구하게 되며 에이즈가 판을 칠 것이다..." 같은 주장이 있는데 동성동본 금혼 폐지 반대 주장을 절로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에이즈가 동성애 때문에 발병했다는 이야기는 잘 모르던 과거에 혐오 표현으로 전해진 말인데, 아직도 그런 말을 써먹으면 시대에 뒤떨어져도 너무 뒤떨어진 게 아닌가. 게다가 동성애자를 차별하지 않는다 해서 아이들이 동성애자가 되거나 성전환자가 된다는 건 대체 어디서 온 논리일까? 동성애나 성전환은 흥미나 재미로 하는 놀이가 아니다.

오래전에 읽은 <미들섹스>라는 소설에는 태어날 때 기형으로 고환이 안으로 숨겨진 탓에 여자로 자라야 했던 칼리오페 이야기가 나온다. 칼리오페는 여자로 자랐지만 자꾸만 여자에게 끌린다. 뒤늦게 검진을 받아 성적으로 남성인 것이 확인되었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미들섹스> 시대의 칼리오페는 죄악감에 시달려 자신의 성 정체성을 누군가에게 밝히지 못한 채 괴로운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인종 차별

시대의 흐름에 발맞춘 덕인지, 최근 미국에서 동양인 혐오가 심각한 탓인지는 몰라도, 인종 차별에서 만큼은 우리네 인식도 꽤 높아졌다. 인식이 높아졌다는 것은 "드러내 놓고 인종 차별"은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블랙페이스를 불편하다고 말한 모 방송인이 수많은 질타에 못 이겨 결국 사과할 수밖에 없었던 사태를 보면  "드러내 놓지" 않은 곳에서는 아직도 차별이 일어난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그 사태 전에 나온 책이지만 마치 미래를 내다본 듯 유머로서 블랙페이스 이야기를 다뤘다. 말하자면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변함없이 유머와 인종 차별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동일시하는 집단을 우월하게 느끼게 하는 농담, 달리 말하면 자신이 동일시하지 않는 집단을 깎아내리는 농담을 즐긴다. 만일 상대 집단에 감정이입이 일어나면 그 농담은 더 이상 재미있지 않다. (중략) 그래서 "왜 웃긴가?"라는 질문은 "누가 웃는가?"라는 질문으로 치환된다. 흑인 분장을 보고 웃는 사람은 어떤 집단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인가? 웃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들인가?


어린 시절 어떤 특성으로 인해 친구들에게 놀림당한 아이들을 떠올려본다. 아이들이  아이를 놀리는 방법은 단순하다.  특별한 특성을 흉내 내는 것이다. 그러면 친구들 사이에서는 웃음이 터지고 모두가  일을 즐겁게 생각한다. 하지만 당하는 아이는?  아이도 즐거웠을까? 어린 시절의 예만 봐도, 그런 행동은  아이를 놀리기 위한 행동이지, 결코 즐겁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런데  자꾸 "웃자고  말에 죽자덤벼드냐" 인종 차별을 유머라고 호도하는 걸까?


Daniel Reche님의 사진 (출처: https://www.pexels.com/ko-kr/photo/1556707/)

우리나라 사람이 동남아인, 또는 아프리카인을 무시하거나 흉내 내는 것은 당연하거나 유머에 불과하지만, 미국 사람이 동양인을 테러하는 것은 나쁜 일일까? 우리는 흉내만 냈을 뿐 염산을 뿌리지는 않았으니까 차별이 아닌 것일까?

벨기에 대사 부인이 옷가게 점원을 폭행했다는 기사가 떴을 때, 왜 사람들은 벨기에 대사 부인이 "중국인"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는 걸까? "중국인이니까 그런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미로 인종 차별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묻는 내게 지인은, 요즘 우리가 중국과 사이가 나쁘고, 경험상 중국인들이 그런 일을 많이 하기에 그럴 것이라고 대답했다.


"경험상"이라는 말은 얼마나 무서운가?


경험상 흑인이 폭력전과가 많으니 흑인을 제압할 때는 죽을 만큼 목을 졸라야 하며, 경험상 가난한 친구가 돈을 훔칠 일이 더 많을 테니 교실에서 누군가 돈을 잃어버리면 가난한 친구의 가방부터 검사해야 하며, 경험상 아이나 반려동물을 데리고 있는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피해 주는 일이 많으니 가게는 그들의 출입을 금해야 하는 것일까?


성 차별

나는 딱히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 대우를 받은 경험이 없다. 누군가에게 차별 받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형성된 분위기을 받아들이는 형태에 가까웠던 것 같다. 내가 이 회사에서는 오래 남아서 진급하지 못하겠구나 하는 느낌. 그러니 바꾸기 보다는 떠나야겠다는 느낌.


세 번째로 들어간 회사는 여자가 극소수인 곳이라 특별(?) 취급을 받았는데, 한편으로는 그 점이 불편했다.

예를 들어 회식에서 다 함께 술을 마신 다음 운전할 사람이 필요할 때 기본적으로 여자에게는 시키지 않는다. (나는 차라리 술 안 마시고 운전하고 싶었는데) 또, 전체 회식이나 간담회만 있으면 "여직원이 한 번 말해볼까?"라며 뭔가를 시킨다. 그때 나는 팀에 하나뿐인 여자였고, 그룹에는 여자가 단 둘이었다. 그래서 나 아니면 그녀가 대답해야 하며, 그녀가 빠진 날이면 내가 100% 당첨이었다. 그게 너무 싫어서 "회사 생활에 불편한 점이 있으면 말해봐요. 그래, 우리 여직원이 한 번 말해볼까?" 하는 질문에 벌떡 일어나서 "'여직원이 한 번 말해볼까' 하는 그 질문이 너무 불편합니다"라고 대답했던 적도 있다.

운동회를 할 때는 여자가 극히 적다 보니 자연스레 남자 위주 운동이 선정됐다. 여직원들은 구석에 앉아 응원만 하기 마련인데, 그 때문인지 몰라도 남녀 모두 참여해야 한다며 팀장(당연히 남자다)이 팀 내 여직원을 업고 달리는 릴레이를 하자는 청천벽력 같은 제안이 나왔다. 여기서도 나는 100% 당첨인 셈이다. 물론 나는 나가서 업히는 대신 이 놀이를 선언한 사회자에게 가서 부당하다고 따졌다. 사회자는 당연히 남자다. 그분이 여자를 괴롭히려고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생각한 놀이가 아닐까 싶다. 누구나 참여하는 재미있는 놀이를 떠올려보았는데, 여자가 남자를 업을 수는 없으니 남자가 여자를 업게 하자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 저변에는 "여자는 연약하다", "남녀가 어울리려면 스킨십이 일어나야 한다"는 선입견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꼭 누가 누구를 업어야만 릴레이를 할 수 있고 팀원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건 아닌데 남자 위주 회사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여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내가 겪은 일은 차별이라 하기도 뭣하고 나도 차별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건 소수이기 때문에 겪는 불편함인데, 때로는 그게 차별로 이어지기도 한다.


지금 팀에는 여자가 더 많다. 회사 전체로 볼 때는 남자가 많아서, 간담회에서 "남직원이 한 번 말해볼까?"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아마도 우리 팀 남자들은 소수이기에 다수인 나는 잘 모르는 불편함을 느끼곤 할 것이다.

Magda Ehlers 님의 사진 (출처: https://www.pexels.com/ko-kr/photo/1386336/)

성차별은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소수자의 문제다. 여자가 잘못했거나 남자가 잘못한 게 아니라 소수로서 갖는 불편함이 있다는 말이다. 어떤 곳에서는 남자가 차별 대우받고, 어떤 곳에서는 여자가 차별 대우받는다. 어느 쪽이든 소수의 입장을 들어주고 어려움을 해소해 줘야 한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다수자 차별론을 들여다보면, '소수자가 차별받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과거에 차별이 있었더라도 현재는 해결되었다고 생각한다. (중략) 한국사회에 성차별이 (더 이상) 없다는 생각은 여성이 고위직에 진출한 사례들로 뒷받침되곤 한다. 여성이 대통령이 된 사실, 국가고시의 여성 합격자가 상당히 많다는 사실 등이 예시로 언급된다. 실제로 정부 수립 이후 70년 동안 여자 대통령은 단 한 명뿐이었고 그나마도 그 아버지 대통령의 후광이 있었다는 사실, 아직까지 5급 이상 국가 공무원 중 여성의 비율은 20퍼센트에 못 미치고, 고위공무원은 5.2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점은 잘 보이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때 미국에서 일하다 돌아오신 친지가 미국에서 동양인은 어느 수준 이상 올라갈 수 없다고 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20년이 훌쩍 지난 옛날이야기지만 현재 진행형이다. 심지어 할리우드 배우도 여배우가 남배우보다 받는 돈이 적다지 않던가. 미국에 가서 일하면 지금보다 돈은 많이 받을지 몰라도 최정상으로 올라가긴 힘들다는 것을,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도 인정할 것이다.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에서 여자가 최정상에 오르기 힘들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설령 오르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고들 한다. "지금도 여자들이 높은 자리에 있잖아"하고 예를 드는데, 그렇다면 미국에도 순다 피차이나 셰릴 샌드버그 같은 사람이 있으니 유리천장은 없다고 생각해야 할까?


쓰다 보니 여성 위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지만, 여자를 특별대우해줘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남자든 여자든 특정 집단에서 특정 성의 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차별을 없애려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다.


남자가 많은 곳, 여자가 많은 곳에서 각기 일해보니, 솔직히 내게는 여자가 많은 쪽이 편하다. 일단 "여자니까 OOO 해"라는 눈치나 대우를 받지 않아도 되니 일상이 자유롭다. 또, 내 삶을 공감하고 이해해줄 수 있는 상급자가 있다는 것도 좋다.


<선량한 차별주의자>에 따르면, 미국 웰슬리 대학의 페기 매킨토시 교수가 백인으로서 자신이 누리는 일상적 특권을 수집해 "백인 특권"으로 발표했고, 그 후 많은 사람들이 다른 특권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내가 책임자를 부르면 거의 틀림없이 나와 같은 인종의 사람이 나올 것이다. (백인 특권 중)

내가 승진에 자꾸 실패한다면 그 이유가 성별 때문은 아닐 것이다. (남성 특권 중)


이런 특권들은 대개 알아차리기 어렵다. 백인이나 남성의 신체로 살아가는 동안 나의 의도나 노력과 무관하게 펼쳐지는 일상적이고 자연스럽고 당연하고 정상적인 조건이자 경험이기 때문이다. (중략) 큰 노력 없이 신뢰를 얻고, 나를 있는 그대로 표현해도 안전하다고 느끼며, 문제가 발생하면 해결할 수 있다는 느낌들이다.


이걸 보면 내가 왜 여자가 많은 팀에 있는 것이 더 편한지 알 수 있다. 여자가 많은 팀에서 다수로서의 특권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설사 그게 금전적인 이익이 아닐지라도.



우리 세상에 차별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비난이나 잔소리로 들리기 십상이다. 게다가 난 부드럽게 잘 설명할 능력도 없다. 이는 차별하면서 차별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대놓고 쓴소리를 못 하다 보니 문드러진 속을 달래고자 써 본 글이다. 개인적으로 그런 사람들에게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선물해주고 싶으나, 그 또한 싸우자는 소리로 받아들일 수 있기에 그냥 아무나 볼 수 있도록 글을 써봤다. 부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열린 마음으로 <선량한 차별주의자>나 그 밖의 차별 금지에 관한 글을 읽고 무의식 속에 숨은 차별을 희석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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