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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룡 Dec 05. 2021

삼체, SF의 매력 (1)

<삼체 문제> 류츠신 작

난 SF 소설을 잘 모른다. 어렸을 때 오징어 같은 외계인이 나오는 <우주전쟁>을 읽었고 단편 SF 몇 편 번역한 정도다. (SF 커뮤니티에서 보니 1984도 SF라던데, 그렇다면 이것까지 포함하자) 영화라면 조금 더 친숙하지만, 워낙 유명한 작품이 몇 있다 보니 'SF 영화'라 하면 스타워즈 유를 떠올리곤 했고 보통 한참 미래의 우주 세계를 다루는 걸로 생각했다.


<삼체>를 읽고 나서 '이런 SF도 있었나?'하고 놀라며 SF란 무엇인가 찾아봤는데, 스타워즈, 스타트렉 같은 우주 서사는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SF 하위 장르 중 하나고, <삼체>는 그와는 달리 '하드 SF'라 불리는 장르란다. '하드 SF'란 물리학, 수학 같은 과학 지식에 중점을 둔 SF다. 따라서 스타워즈 유에 흔히 나오는 시공간 워프, 인간과 다른 모습을 한 우주인, 현재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우주 마법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SF는 잘 모르지만, 한 때는 물리학도를 꿈꿨다. 눈앞의 모든 물질이 수식에 딱딱 맞아떨어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그 수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매력적이어서다. 결과적으로 다른 전공을 택했고, 1학년 때 공학의 기본인 물리학을 기초 수강하면서 깔끔하게 정을 뗐지만(대학 물리학은 왜 그렇게 재미가 없는지!). 그런데 십수 년 후, <삼체>를 읽으면서 내가 왜 물리학도가 되고 싶었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물리 이론은 어쩌면 이렇게 흥미로운가!


<삼체>는 '외계인 침공'이라는 흔한 소재를 흔치 않은 배경과 서사로 풀어내면서, 우리가 사는 현시대 과학부터 수세기 이후의 발달한 과학을 하나하나 설명해준다. 뉴로라는 분의 글에 따르면 오류가 많은 것 같은데, 내 지식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 보니 책에서 설명하는 이론이 무척 그럴듯하게 다가왔다. 덕분에 SF의 매력을 흠뻑 느낄 수 있었다.


삼체 이야기의 큰 줄기

<삼체>는 총 3부작, 1부 <삼체 문제>, 2부 <암흑의 숲>, 3부 <사신의 영생>이다. 본래 시리즈 제목은 '지구의 과거'였지만, 3부를 출판하면서 '삼체' 시리즈가 되었다. 마지막 3부는 삼체와 딱히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리즈 자체에 삼체란 이름을 붙인 건, 아무래도 휴고상을 수상해 잘 알려진 작품이 1부, <삼체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3부작 모두 상당히 분위기가 달라서 외계 침공 상황만 같지 실제론 다른 이야기라도 해도 좋을 것 같다. 심지어 주인공도 다르다.


내용이 길어질 것 같아 각 부별로 감상을 써본다. 스포가 많이 포함될 수 있다.


1부 <삼체 문제>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벌어지고 과학자들이 속속 사라지는 현실, 그리고 신비로운 삼체 세계 속에서 문명의 생존 방법을 논하는 게임을 번갈아 보여줌으로써, 그 속에 숨겨진 사건을 풀어내는 추리 소설 같은 느낌을 준다. 그 현실과 게임이 맞닥뜨리면서 초자연적으로 보였던 것이 알고 보니 외계의 과학 공격이었다는 사실, 고등 과학 문명인 삼체의 함대가 450년 후에 지구에 도착할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데, 귀신이 벌인 것 같던 신비롭고 환상적인 상황이 삽시간에 실체로 변하면서 주는 충격과 반전이 놀라울 정도다. 게다가 그 사이 문화 대혁명 시대의 비인간적 사회 상황과 냉전 시대 우주 경쟁, 중국과 유럽의 고대 철학, 근현대 과학, 현재 증명되지 않은 고등 문명의 과학 이론 등을 적절히 섞어 다룬다. 


1부의 몇 가지 과학 이야기

삼체 문제 

1부 제목이 <삼체 문제>인 만큼 이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삼체 문제란 세 개의 질점이 서로 인력을 가할 때 그 궤도 방정식을 구하는 것을 말한다. 푸앵카레가 이미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지만, 책에서는 유전 알고리즘을 적용해 삼체의 안정 궤도를 백여 개 구해냈다고 한다. 다만 아직 미래 특정 시점의 궤도를 예측하지는 못해서 그 연구 도중에 사고가 벌어져 중단됐다. 물론, 계속 연구했다 해도 소용없었을 것이다. 실제 삼체 세계는 태양과 행성의 충돌로 세상이 멸망한다는 것을 예측하고 그곳을 떠나 새 터전을 찾으려던 중이었으니까.

부등변 삼각형 꼭짓점에 위치한 동일 질량의 삼체가 초기 속도 0일 때의 궤적

(위 그림 출처CC BY-SA 4.0)

 

삼체 세계는 바로 태양계에서 4.3광년 떨어진 알파 센타우리다. 천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태양이 세 개라는 내용을 본 순간 알파 센타우리를 떠올렸을 것이다. (난 몰랐지만 남편이 내가 해준 얘기를 듣고 알파 센타우리라고 말해줬다) 실제 알파 센타우리는 쌍성계에 프록시마라는 작은 항성이 하나 돌고 있을 뿐, 삼체 게임이 묘사한 것처럼 세 태양이 한꺼번에 나타나 행성이 불탄다든지 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되레 알파 센타우리의 행성이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가졌다는 관측 하에 탐사선을 보내는 시도가 있다던가. 소설과는 완전히 반대 상황이다.


차원 변형

삼체 세계는 지구에 오지 않았기에 그들이 어떤 모습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들이 지구 상황을 훤히 아는 것은 지구에 보낸 인공지능 감시자이자 방해자 지자(智者) 덕분이다. 지자는 미시 11차원을 가진 양성자를 2차원으로 펼쳐 컴퓨터 회로를 식각한 다음 다시 11차원으로 접은 것으로, 질량이 거의 0이라 광속으로 이동할 수 있어 삼체 함대보다 먼저 지구에 도착해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지구인을 감시, 위협, 방해한다. 종이에 2차원 원과 점을 그리면 점은 절대로 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지만, 3차원에서 본다면 손쉽게 원에 들어갈 수 있듯, 11차원인 지자는 3차원 우리 세계를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다.


책 속에서 딩이의 설명에 따르면, 고차원을 저차원으로 펼치면 고차원의 정보가 사라지기 때문에 복원할 수 없단다. 그렇지만 삼체는 고등 과학 문명으로서, 11차원의 양성자를 2차원으로 펼친 후 그 정보를 잃어버리지 않고 복원하는 능력을 지녔다.


차원 변형은 3부에서도 꽤 중요한 소재로 나온다. 1부를 볼 때는 별생각 없이 넘어갔지만 3부까지 보고 나면 1부에 몇 가지 단서를 남겨둔 걸 알 수 있다.


고차원이 저차원으로 펼쳐지는 것은 우리가 모르는 어떤 자연적 에너지에 의한 것이며, 우주의 모든 원자는 긴 시간 속에서 결국 저차원으로 펼쳐진다. 우리 우주의 최후는 저 차원 원자 구조로 변한 거시 우주일 것.
(<삼체 문제> 딩이의 대사에서 발췌)


이 이야기를 할 때 딩이는 린윈이라는 사람을 잠시 소개한다. 누군가 싶어 찾아봤더니 류츠신의 다른 작품 <구형 번개>에 나오는 인물이었다. (딩이가 발견했다고 알려진) 굉원자를 발견했으나 사회로부터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현재는 양자 상태에 있다고 한다. 딩이는 주인공이 아닌데도 삼체 시리즈 내내 이름이 거론되는데 알고 보니 <구형 번개>에도 등장한 캐릭터였다.


양자 얽힘

역시 지자와 관련한 과학 이론. 상관관계에 있는 두 입자는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든 하나의 스핀 방향이 항상 다른 하나의 반대가 되는데 이를 양자 얽힘이라고 한다. 원자핵에 있는 양성자를 분리해 내 차원 변형으로 만든 지자가 4.3광년 떨어진 지구와 알파 센타우리 간에 거의 실시간으로 통신을 제공할 수 있는 이유는, 지구에 있는 양성자가 삼체 행성에 남은 다른 양성자(같은 원자핵에서 분리한 것)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양자 얽힘 (출처: https://www.scienceabc.com/pure-sciences/what-is-quantum-entanglement.html)


삼체 문명은 어떻게 지구를 선택했나

언젠가는 항성과 충돌해 사라져 버릴 행성을 떠나 새로운 별에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 삼체 문명의 목표다. 하지만 어느 세월이 넓은 우주를 뒤져 적당한 행성을 찾을 수 있을까? 그들은 어떻게 지구를 발견했을까?


삼체 문명이 있는 알파센타우리, 밝은 두 별이 알파 A와 B이고 빨간 동그라미 안에 있는 것이 프록시마

(위 그림 출처: 위키백과영어 위키백과의 SkatebikerCC BY-SA 3.0)


그 시작은 다른 강대국보다 일찍 외계인을 만나 우주에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중국의 홍안 프로젝트다. 그곳에서 일하던 예원제는 우연히 태양이 전파를 증폭한다는 것을 알고 우주에 신호를 보내는 데 성공했고 그로부터 약 9년 후 응답을 받았다. 놀랍게도 처음 응답은 "대답하지 마라!"는 경고였지만 예원제는 "이곳에 와서 행성을 접수하세요"라는 응답을 보내 삼체 문명에게 태양계의 위치를 알려줬다.


삼체 문명에도 다른 문명을 무너뜨리는 것에 회의적인 이가 있었다. "대답하지 마라"는 신호를 보낸 감청원이 바로 그중 하나다. 하지만 생존 앞에서 다른 문명을 걱정할 틈이 어딨을까? 비록 위치를 정확히 특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방향으로 갈 함대를 준비하는 동안 다시 예원제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마침내 삼체가 태양계의 위치를 알아낸 것이다. 그 후 예원제로부터 삼체 세계 이야기를 들은 에번스가 유산을 쏟아부어 새 안테나 기지를 만들어 삼체와 통신하자, 삼체 함대는 정식으로 태양계로 출발했다.


예원제와 에번스

삼체 문명을 지구로 끌어들인 예원제와 자본을 대 지구 삼체 반군을 탄생시킨 에번스를 비교해보자. 

지구 삼체 반군은 에번스를 중심으로 하는 강림파와 구원파, 생존파로 나뉜다. 강림파는 삼체 문명이 태양계로 와서 지구의 새 문명을 세우게 하려는 쪽이고, 구원파는 세 항성의 궤도를 파악함으로써 그들을 그곳에서 평화로이 살게 해 주려는 쪽이며, 생존파는 삼체에 협력해 훗날 그들이 지배하는 지구에서 살아남으려는 쪽이다. 강림파와 구원파가 충돌을 일으키면서, 지구 삼체 조직의 총사령관 예원제가 본모습을 드러낸다.


예원제는 문화 대혁명 때 어머니가 아버지를 고발하고, 과학자인 아버지가 반동분자로 몰려 죽은 일을 겪으며 세상과 인간관계에 무관심한 인물이 되었다. 비록 챙겨주는 사람을 만나 결혼까지 하지만, 외계 문명의 존재를 안 후 너무나 자연스럽게 지구를 외계 문명에게 넘겨주기로 한다. 인류는 이미 더러워졌고 고등 과학을 지닌 삼체 문명은 좀 더 도덕적일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들이 인류를 정화해주길 바란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예원제도 강림파 같지만, 사실은 인류를 멸망시키겠다는 과격한 생각까지는 없었다. 삼체 문명이 자신이 기대한 도덕을 갖지 않았음을 알게 된 후 침묵에 빠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특히 모성애 때문인지 딸이 자살한 후 약간 흔들린 것 같다. 그래서 뤄지에게 우주의 비밀을 살짝 흘리지 않았을까?

에번스는 환경 운동가로서, 지구의 모든 종(種)은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의 이기심으로 다른 종이 피해 입는 것을 보고 삼체 문명을 불러들여 지구에서 인류를 완전히 없애려 한다.

홍안 기지 안테나 앞에 있는 예원제 (언제적 버전인지 모르지만 켄 리우가 번역한 삼체 영문판)

(위 이미지 출처: https://subterraneanpress.com/three-body-problem)


예원제와 에번스는 3부에 나오는 청신 및 웨이드와 연결해볼 수 있다. 예원제는 젊은 시절엔 냉철하고 사람에게 감정이 없는 인물 같았지만, 그때도 이미 순박한 시골 사람과 아이들에게는 친절했다. 나중에 왕먀오가 찾아갔을 때도 아이들과 다정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청신 역시 매번 중대한 상황에서 갓난아기를 떠올리며 모성애를 발휘한다. 심지어 성모라고 불릴 정도. 에번스에 관해서는 자세한 묘사가 없지만 '종의 평등'이라는 자신의 철칙에 인생을 쏟아붓고 극단적인 성향을 보이는 걸 보면 "오직 전진!"만을 외치는 웨이드와 비슷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작가는 남녀의 차이 속에 중국은 감성적이고 서양은 이성적이라는 의미를 담은 것 같기도 하다.


지구의 운명은?

이제 지구는 450년 후 외계 침공에 대비해야 한다. 450년은 긴 세월이지만 지자가 기초 과학 발전을 방해하고 있는 마당에,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난들 삼체 문명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삼체 문명은, 이런 상황에 처한 지구는 환상을 버리고 결전을 벌이거나 사회가 절망과 공포에 빠져 붕괴될 텐데, 지구 인간의 성향을 분석하면 둘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2부에서 지구인이 정말 그들의 예측대로 움직이는지 볼 수 있다.


삼체의 진실을 안 예원제는 마지막으로 홍안 기지에 올라 지는 태양을 보며 한 마디 한다. 


이것이 인류의 낙일(落日)이다. 


여기서 낙일은 종말을 은유한다고 생각한다. 예원제는 삼체 함대가 도착하면 인류가 멸망할 것으로 생각했고, 2부에서 보듯 꽤 많은 지식인이 패배를 예상했다. 인류는 정말 450년 후에 멸망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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