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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룡 Dec 08. 2021

삼체, SF의 매력 (2)

<암흑의 숲>, 류츠신 저

삼체 1부 <삼체 문제>를 구매한 건 2019년이었다. 당시에는 다른 장르 책을 많이 읽느라 당장 손이 가지 않아서 미뤘다가, 얼마 전에 별생각 없이 펼쳐본 후 몹시 재밌어서 순식간에 다 읽고 2, 3권을 구매했다. 

하지만 1부같이 흥미롭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기대한다면, 2부에서 실망하기 쉽다. 나도 초반에는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지'하는 미적지근한 마음으로 읽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삼체가 과학 논의의 장이자 비밀을 간직한 곳이었던 1부와 달리, 2부의 삼체는 이미 드러난 적이라 더 흥미로울 것도 충격적일 것도 없다. 이제부터는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2부 <암흑의 숲>은 지구를 침공할 삼체 함대에 대비하는 인류의 모습을 다룬다. 위기가 현실이 되자 인류는 자손의 미래를 걱정하거나(장위안차오), 세상사에 관심을 놓고 현재의 즐거움에 집중하거나(양진원), 어차피 질 테니 도망칠 준비를 하는(도피 주의자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2부의 주인공은 이중 두 번째에 속하는 뤄지(羅輯)다. 양진원과 다른 점은 본래부터 세상에 무관심한 쾌락주의자라는 것이다. 

2부는 세상의 종말을 앞둔 각양각색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다루기 때문에 1부보다 등장인물이 다양하다. 그래서 집중하기가 다소 어려울 수 있지만 2부 배경 상 좋은 서술 방식이라 생각한다. 1부와 비교할 때 과학 원리 설명보다는 인간 본성과 인간관계, 미래 사회의 모습에 좀 더 집중한 것이 조금 아쉽지만.


면벽 프로젝트

개개인이야 어떤 반응을 보이든 지도부는 이길 수 있다는 가정하에 삼체 함대를 막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그렇게 나온 노력 중 하나가 면벽 프로젝트 진행이다. 진실을 숨길 줄 모르는 삼체와 기만에 능한 인류의 차이를 이용한 게 바로 이 면벽 프로젝트다. 면벽자 네 사람을 선정해 인류를 살릴 방법을 준비하게 하되 기만 행동으로 지자나 삼체 세계가 그 방법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 삼체는 기만을 꿰뚫어 볼 능력이 없어서 버렸던 지구 삼체 반군에게 다시 연락했고, 반군은 자신들 가운데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로 하여금 면벽자를 한 명씩 맡아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니 진짜 계획을 알아내기로 했다. 그 뛰어난 사람들이 파벽자다.

면벽하는 판다(http://5b0988e595225.cdn.sohucs.com/images/20171211/bc3c15ed7e0440ec9f4e746651df9fe8.jpeg)

면벽자와 그 계획, 파벽자를 정리해봤다.


프레드릭 타일러

전직 미국 국방장관. 미국 반테러 전략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겉보기로 굉원자 핵융합 무기로 무장한 우주군을 창설해 삼체 함대에 대항하려 했으나 실제 계획은 그 우주군으로 지구의 다른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그들을 양자 상태의 유령 함대로 만들어 삼체 함대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 방식은 류츠신의 다른 작품 <구형 번개>에 나오는데, 그 작품에서 굉원자를 발견한 린윈이 양자 상태가 되었다는 건 1부에서 딩이가 암시하기도 했다.

그의 파벽자는 <삼체 문제>에서 진시황의 대군을 이용해 인간 컴퓨터를 만들었던 폰 노이만이다. 그때 내용이 꽤 흥미로워서 관심이 있었는데, 막상 현실의 모습은 조금 뜻밖이었다. 폰 노이만은 유령 함대든 인간 함대는 삼체의 상대가 되지 않으므로 이 계획은 소용없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해서 타일러는 제일 먼저 파벽당하고 자결로 삶을 마무리한다.


마누엘 레이디아즈

현직 베네수엘라 대통령. 반미 사회주의자로 고성능 무기로 베네수엘라의 국방력을 높여 미국과의 싸움에서 이긴 전력이 있다. 

그는 겉보기로 고당량 수소폭탄을 설계해 삼체에 대항하겠다며, 수성의 지하에서 그 시험을 하도록 요청했다. 하지만 실제 계획은 수성에서 다량의 수소폭탄을 터트려 그 공전 속도를 줄임으로써 수성이 태양으로 추락하게 하는 것이다. 수성이 태양에 충돌하면 태양에서 항성 물질이 분출되고, 이 물질이 점점 퍼져 차차 다른 행성까지 태양으로 추락함으로써 태양계가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극단적 군사 전략가답게 그는 이로써 삼체 함대를 위협해 그들을 돌려보내려는 것이다. 태양계가 무너지면 삼체가 올 필요도 없을 테니까.

세계 최초 수소폭탄 실험

(위 이미지: The world’s first hydrogen bomb, codenamed “Ivy Mike”, was tested on Oct. 31, 1952 at Enewetak Atoll in the Pacific Ocean. (Photo by: U.S. Department of Energy)


그의 파벽자는 묵자다. <삼체 문제>에서 두 겹짜리 껍질 우주론을 제시했던 사람. 중국 철학가 중에 도구를 잘 사용했던 사람인만큼 그때도 도구를 썼었는데, 현실 모습은 역시 상상 외였다. 

전략이 밝혀지고 반인류 범죄자로 낙인찍히자, 레이디아즈는 자신의 전략을 그대로 이용해 데드 맨 스위치로 사람들을 협박하고 고국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고국이라고 다를까? 당연히 자신들을 죽이려고 했던 그를 원망한 국민들의 돌팔매질에 목숨을 잃는다. 사실은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보호하려고 한 것인데!


빌 하인스

뇌과학자이자 전임 EU 집행위원장이며, 아내인 야마스기 게이코 역시 뇌과학자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겉보기에 하인스는 아내와 함께 인간의 지능을 향상하는 법을 연구했다. 훗날 지능이 높아진 인류가 삼체 함대를 이길 기술을 만들어내길 바라면서. 그러는 동안 사람 뇌에 어떤 명제를 진실로 각인시키는 멘털 스탬프를 발견했고, 패배에 젖은 사람들에게 승리의 신념을 심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패배주의자이자 도피주의자였다. 승리의 신념을 심어준다는 멘털 스탬프는 실제로는 명제를 역전해서 심어주도록 하인스 손에 조작된 상태였고, 스탬프를 찍은 이들에게 비밀리에 멘털 스탬프를 보내 도피주의가 계속 이어지게 했다. 하인스는 어차피 승리하지 못할 바에야 인류의 일부라도 도피해 살아남기를 바랐던 것이다.

놀랍게도 그의 파벽자는 아내인 야마스기다. 


면벽자 넷 중 세 사람의 계획이 하나같이 비인간적이라는 것이 놀랍다. 타일러는 지구인을 죽일 계획이었고, 레이디아즈는 지구인을 죽일 수도 있는 위험한 계획을 세웠고, 하인스는 사람을 세뇌해 전 인류를 배신할지도 모를 조직을 만들게 했으니. 이런 결과는 아마 당시에는 그 누구든 도저히 삼체 함대를 이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비상한 상황에서는 비상한 계획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어쩌면 어쩔 수 없는 길이었는도 모르겠다. 


마지막 면벽자 뤄지

천문학 및 사회학 박사. 딱히 경력도 없고 해낸 일도 없고, 시시때때로 여자 친구를 갈아치우는 한량. 그가 면벽자로 선정되자 그 자신은 물론 많은 이들이 어리둥절했다. 그가 앞의 세 사람과는 다른 점이라면, 한때 예원제를 만나 우주 사회학의 기본 명제를 들었다는 것뿐. 물론 그게 원인이라는 것은 뤄지 자신도 나중에야 안다.

지구 삼체 반군의 에번스는 죽기 전에 마지막 명령을 내렸는데, 그게 바로 '우리가 한 짓인지 모르게끔 뤄지를 제거하라'였다. 뤄지 자신마저 왜 위협이 되는지 모르기 때문에 삼체가 일부러 뤄지를 죽이려는 것을 알면 그 원인이 알려지기 때문인 걸까? 에번스의 속마음이야 뭐였든, 뤄지는 운 좋게 살아났고 또 인류는 삼체가 뤄지를 공격한 사실도 알아냈다. (이 부분이 좀 의아하긴 하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빼앗긴 뤄지는 그들을 되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예원제와 나눈 대화를 곱씹은 끝에 방법을 깨닫는다. 예원제가 우주 사회학이라는 이름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 인류가 알면 삼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그것은 바로,

우주는 수많은 문명으로 꽉 차 있으나 서로의 존재를 모르며, 존재를 알면 생존을 위해 상대를 먼저 제거하려 한다


는 것이다. 바로 2부의 제목인 <암흑의 숲> 이론이다. 어두운 숲에서는 적이 누군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일단 뭔가 있다는 것을 알면 먼저 총을 쏴서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을 수 있으니까.

뤄지는 이를 확인하려고 예원제가 사용했던 태양 증폭 전파를 이용해 태양계에서 약 50광년 떨어진 항성의 좌표를 우주 전체에 전송한다. "저주의 주문"이라고 하면서.

암흑의 숲에 있는 어린아이, 곧 지구 문명

(위 이미지 출처: http://baijiahao.baidu.com/s?id=1662548049943629398&wfr=spider&for=pc)


저주가 통할까 기술이 통할까

저주의 결과를 보려고 뤄지가 동면한 185년 동안 인류는 급격히 발전했다. 광속의 15%를 낼 수 있는 함대가 2000척이나 되고, 화성에 있는 산을 순식간에 날려버리는 전자기포도 갖췄다. 삼체에 대항하기 위해 경제력의 대부분을 기술과 국방에 쏟아부은 나머지 50년에 걸쳐 힘든 대협곡을 겪었지만, 그래도 200여 년 뒤에 도착할 삼체 함대(광속의 10%를 내는 1000척)를 이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덕분에 이 시대 사람들은 뤄지가 잠들기 전과는 판이하게 행복하고 희망에 차 있었다. 삼체가 보낸 강한 상호작용 우주 탐사정, 이른바 물방울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자랑하던 함대 2천 척이 조그마한 물방울 하나에 삽시간에 폭발하는 끔찍한 전투를 겪은 후 인류는 다시 절망에 빠졌다. 

생존을 가로막는 건 무능과 무지가 아니라 오만이다. 


3부에 나오는 대사지만 여기서도 딱 맞아떨어진다. 인류는 오만했다. 직접 보지도 못하고 통신한 적도 없는 삼체가 어떤 기술을 가졌는지 어떻게 알고 이길 수 있다고 자신했을까?

자신하지 않았던 이는 오직 도피주의자들 뿐이었다. 본래부터 도피주의자였던 장베이하이, 하인스가 만든 도피주의자였을 듯한 추옌. 두 사람 덕분에 학살이나 다름없었던 물방울과의 싸움에서 함대 몇 척이 살아남았다. 비록 살기 위해 (또는 작가가 <암흑의 숲>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서로를 공격했고 결국 두 척만 남게 되었지만. 그게 블루스페이스호와 그래비티호로, 3부에서 다시 나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뤄지에게 희망을 걸었다. 때마침 180년 전에 그가 저주했던 항성이 공격을 받아 폭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날아온 물방울이 다시는 태양 증폭기로 좌표를 보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바람에 뤄지가 <암흑의 숲>을 알고 있다 한들 소용없게 되어 버렸다.


또다시 면벽

인류를 구원하고, 아내와 아이를 되찾기 위해 뤄지는 이때부터 진정한 면벽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UN으로부터 앞으로 더 날아올 물방울의 궤적을 찾는 '설원 프로젝트'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에 응한 후, 그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아무것도 돌보지 않고 프로젝트에 몰두했다. 세상 사람들이, 뤄지에게 능력 따위는 없고 저주받은 항성의 폭발도 그저 우연이었다고 믿으며 그를 비난하게 될 때까지 모두를 속이면서 설원 프로젝트에 사용할 수소폭탄 위치를 정밀하게 조정한 뒤, 그는 양둥과 예원제의 무덤에 와서 삼체와 마지막 협상을 시작한다.


진정한 면벽 프로젝트는 185년 전의 그것이 아니라 185년 후, 뤄지가 한 그것이다. 뤄지의 계획은 레이디아즈와 비슷하게 서로를 막다른 길로 몰고 가는 방법이었다. 인류가 정말 수성을 태양으로 떨어뜨릴 만한 수소폭탄을 만들 수 있었더라면, 뤄지든 '암흑의 숲'이든 필요 없었을 텐데. 

더불어 공식 면벽자는 아니지만 장베이하이야 말로 세상을 전부 속인 진정한 면벽자다. 그의 계획은 하인스와 유사하게 일부 인류를 위기에서 도피시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인류를 살린 건 뤄지와 장베이하이지만, 레이디아즈와 하인스도 유사한 방식을 생각했으니 전략가로 손색이 없다.


(출처: https://www.bbc.com/news/science-environment-37167390)

약간의 억지, 그리고 복선

2부 <암흑의 숲>은 삼체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꼭 필요한 소재 '암흑의 숲' 이론을 설명하고, 3부의 내용을 암시하는 역할이다. 그래서 2부만으로는 조금 재미가 떨어지고, 약간의 억지도 있다. 뤄지가 예원제와 나눈 몇 마디 만으로 암흑의 숲 이론을 깨닫는 부분도 좀 그렇고, 뤄지가 사람들에게 이론을 알려주면 다 같이 다른 방법을 연구하면 될 일인데 구태여 숨기는 것도 이상하고, 전파 전송 방법은 다른 것도 많을 텐데 삼체가 태양 증폭기만 막은 것도 어색하다. 

뤄지의 연인 좡옌의 존재에 관한 설명도 부족하다. '좡옌'이란 이름은 중국어 눈속임(障眼)과 발음이 비슷해서 가짜 느낌이 난다. 물론 뤄지를 위해 일부러 준비한 사람이라 그런 이름을 줬을 수도 있지만, 그걸로는 3부에서 뤄지와 다시 헤어진 이유가 분명찮다. 아마도 어딘가에 있는데 파악하지 못한 걸까?


좡옌은 물론이고, 주인공 뤄지의 이름에도 의미가 있다. "박사 이름이 로직이란 뜻이죠? (정확히는 로직이라라는 중국어와 발음이 같음)"는 대사가 있다시피 그의 이름은 로직, 즉 논리다. 논리적으로 살아온 사람이 아닌데도 작가가 이런 이름을 붙여준 것은 2부에서 그가 삼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논리'에 따른 것이어서다. 이는 3부의 주인공 청신(程心, 진심이라는 뜻이 있는 중국어 诚心과 발음이 같음)이 이름처럼 인류를 향한 사랑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반대다. 그렇다고 해도 사랑이 해결책이라는 것을 뤄지가 모르는 건 아니다. 사건이 끝난 후 그는 사랑 때문에 자신이 버틸 수 있었다는 강연을 한다. 게다가 오래전 예원제의 첫 신호를 받고 '대답하지 말라'고 경고한 삼체의 감청원이 나타나서, 삼체에도 사랑이 있고 감정이 있다고 말해준다. 그 자신이 바로 삼체 세계에서 희소하게 감정을 중요시한 이니까. 

2부는 이렇게 끝나지만, 3부에서 사랑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은연중에 암시한 것이다.


파벽자 2호가 기르던 금붕어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딱히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간간이 금붕어가 등장하는데, 아무리 봐도 바깥세상의 어둠을 모르고 좁고 아름다운 현실에 안주하는 힘없는 인류의 모습인 것 같다. 3부에도 물고기가 나오니까 그 부분과 비교해서 다시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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