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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룡 Apr 12. 2022

중력의 임무

할 클레멘트

<삼체>에 이어 하드 SF에 도전해보려고 <중력의 임무>를 펼쳤다. (이 책이 밀리의 서재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놀랍게도 1950년대에 발표된 소설인데도 올드함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이걸 읽기 전에 1940년대 작품인 <이방인>도 읽었는데, 확실히 스타일이나 문장이 올드했던 터라 더 많이 비교되었던 것 같다. 하긴 쓴 시기와 무관하게 언제 읽어도 세련된 글은 있기 마련이다.


또 새로운 SF

<중력의 임무>는 나 같은 SF 초보자에게는 배경이 무척 새롭다. 우주를 다룬 작품을 보면 보통 외계인이 우리보다 지능이나 과학 수준이 높은데, <중력의 임무>에 나오는 외계인은 우리보다 과학 기술이 훨씬 뒤처진다. 이야기 흐름을 봐서는 지능이 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어떤 이유 때문인지 이 외계 행성에서는 과학 기술이 덜 발달했다. 또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들이 외계인인 것도 새롭다. 그렇지만 이들이 지구인을 고등 기술 외계인으로 묘사하며 지구인으로부터 기술을 배우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인물 구성은 다른 SF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책 소개에 상당한 스포를 해놨는데, 만약 스포를 보지 않았다면 앞부분 20%는 대체 무슨 소린가 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는 스포를 살짝 잊어버리고 봐서 남들보다 더 오래 헤매긴 했다.


나도 스포부터 하고

SF에서는 워낙 유명한 책이다 보니, 스포라고 했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중력의 임무>의 배경부터 써 보자. 이걸 쓰지 않고서는 이야기가 안 되니까. 이야기 배경은 '메스클린'이라는, 극지방 중력 약 700G, 자전주기 18분, 자전축 기울기 28도 정도 되는, 극단적으로 찌그러진 행성이다. 작가가 백조자리 61 쌍성계의 보이지 않는 어떤 천체를 행성으로 가정하고 논리적으로 배경을 설정한 곳이라고 한다.

메스클린 행성 자전축과 공전 궤도

행성이 상당히 빠르게 회전하기 때문에 적도로 갈수록 원심력이 커져 적도 둘레가  둘레보다 2 이상 크고, 그러다 보니 적도 지방 실중력은 3G 정도 된다. 원심력과 중력이 동일한 고도에서 행성 대기가 탈출해 토성처럼 띠를 이루고, 제법 큼직한 위성도   생겼. (하나는  바깥, 하나는  안쪽)

자전축이 28도 기울어졌고, 공전궤도는 북반구가 태양 쪽으로 있을 때 태양과 가장 거리가 가까워지는 형태의 이심원이다. 그래서 북반구의 여름은 상당히 짧다. 북반구의 봄에서 가을까지는 지구 시간으로 약 5 달이지만 북반구의 겨울은 약 4년이다. 남반구에서 볼 때 해를 받는 여름은 태양과 가장 멀리 있으므로, 말은 여름이지만 겨울보다 기온이 낮다. 평균 기온은 영하 70도 정도.

이러다 보니 지구인이 제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중력이 가장 낮은 적도 부근에서 우주복을 입고 겨우 버틸 뿐, 극지방에는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이곳에서 뭔가 하려면 메스클린 주민, 지구인인 우리에게는 외계인인 그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


지구인은 왜 메스클린에 왔나

찰스가 속한 탐사대는 중력의 비밀을 연구하고자 (살짝 나온 언급에 따르면 블랙홀 연구인 듯) 메스클린 행성에 와서 남극에 탐사선을 내려보냈지만, 탐사선은 정보를 수집하고도 중력을 이기지 못해 행성을 탈출하지 못했다. 20억 달러짜리 비싼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탐사대는 지구인이 버틸 수 있는 적도 지방에 기지를 세우고 탐사선을 되찾을 방법을 찾기로 했다. 그렇게 내려온 찰스가 만난 사람이 상선대를 이끄는 발리넌 선장이다.

출처 https://www.tor.com/2018/02/15/creator-of-worlds-mission-of-gravity-by-hal-clement/

발리넌 선장은 메스클린 남극 지방에 살지만 때때로 귀한 물품을 거래하기 위해 바다를 탐험하는데 마침 적도 부근에 왔다가 찰스를 만났다. 실상 그가 적도까지 온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메스클린 인은 높은 중력과 낮은 기온에도 견딜 수 있도록 몸길이 40센티 몸두께 5센티에 바닥에 붙어 기어 다니는 모습을 했고, 튼튼한 가죽이나 금속을 자를 수 있는 집게발을 가졌다. 묘사만 보면 완전히 벌레 그 자체다. 위 그림은 찰스가 죽은 메스클린 바다 생물을 관찰하는 그림인데, 빨간 우주복(모르고 보면 쟤가 외계인인 줄 알겠다)을 입은 찰스 뒤에 집게발 든 친구들이 바로 메스클린인이다.


아무튼 간에 찰스와 탐사대의 목표는 발리넌 일행을 탐사선이 있는 남극으로 인도해 탐사선 기록 장치를 적도로 가져오게 해서 그걸 회수하는 것이다. 그래서 발리넌에게 지구어(아마도 영어)를 가르치고, 기상 변화를 알려주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과학 기술을 가르쳐 준다. 발리넌은 비록 선원이라 해도 적도까지 와 본 적도 없고, 탐사선이 있는 남극 고원에 간 적도 없지만, 선원답게 도전 정신이 뛰어나 위험한 길임을 알면서도 제안을 받아들였다.


과학 이론과 외계 행성 대탐험

하드 SF는 <삼체>밖에 읽어보지 않았지만, <중력의 임무>를 읽고 보니 <삼체>를 하드 SF로 평하면 안 된다고 한 독자의 말이 대충 이해가 된다. <중력의 임무>는 요만큼의 비약도 (메스클린 행성 자체가 비약이라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없이 과학적인 설명과 논리적인 흐름으로만 이야기를 이어간다. 등장인물 중에서 지구인의 과학 수준이 가장 높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미 증명된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고, 그래서 행성 폭발이니 차원을 왔다 갔다 하는 외계 문명이니 하는 웅장하지만 허망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 <중력의 임무>에 비하면 <삼체> 이야기는 스페이스 오페라에 좀 더 가깝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나는 두 소설 다 마음에 들었다.

메스클린 행성 대강의 지도

책의 묘사를 따라 발리넌의 여행길을 대충 그려봤다. 일단 메스클린 행성은 바다가 둘인데, 하나는 발리넌의 브리호가 탐험하던 곳으로 고리형이고 다소 좁으며, 적도 부근에서 시작해 행성 반대편 적도까지 이어진다.  바다에서 탐사선제일 가까운 이라고 해도  6 킬로미터 떨어져있다. 다행이  다른 바다는 목적지까지 80 킬로미터 떨어진 강과 연결된다. 아무래도 발리넌은 고리형 바다 안쪽 대륙에 사는지, 다른 바다에는 가본  없다고 한다.


찰스네 탐사대는  바다가장 가까운 지협(그림에서 오른쪽  부분)까지 항해한 다음, 찰스가 행성 탐사 탱크 발리넌 일행을 실어 육지를 이동한 후 다른 바다에 내려주기로 결정했다.


여기서부터 발리넌 일행의 재미난 모험이 시작된다. 기지까지 찾아온 그를 배까지 데려다주겠다며 찰스가 제멋대로 번쩍 들어 올려 탱크 위에 올려놨을  까무러칠 듯이 라던 발리넌이었는데, 어느새 낮은 중력에 적응하고, 뛰거나 던지는 것에도 익숙해지고, 심지어 100미터 높이를 승강기를 만들어 이동하는 것까지 생각해 내며 발전해나가는 과정이 무척 재미나다.


발리넌과 돈그래그머

<중력의 임무>에서 발리넌은 처음으로 자기 행성을 탐험하면서,  자기들과 비슷한 바위 언덕 종족, 자기보다 문명화가 낮은 카누 종족(카누를 만들기는 했지만 부족 사회에 살고 미신을 믿는 종족이다), 자기보다 과학 기술이 높은 글라이더 종족을 만나고, 그때마다 어려움에 처하지만 자신의 임기응변과 지구인의 지식으로 이겨낸다.

발리넌은 뛰어난 리더다.  번도 가보지 않은 곳으로의  여행, 언어가 통하지 않는 다른 종족과의 거래, 심지어 죽을지도 모르는 어마어마한 모험(중력이 커서 조금만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즉사한다) 하면서도, 선원들을 북돋우고, 사전에 완벽하게 준비하고, 준비되지 않은 위기 상황은 임기응변으로 해결한다. 발리넌을 제외하면, 애초에 이런 모험을 받아들일 메스클린 인도 없었으리란 생각이 든다. 발리넌이 이런 모험을 강행한 것이 처음에는 이득 때문이었겠지만, 나중에는 메스클린 인으로서의 사명에 불탄 덕분이었다. 그는 여행 초기부터 '플라이어'라고 부르는 지구인들의 과학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고,  마음을 꽁꽁 숨기다가 탐사선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갈  있게  순간 지구인에게 과학을 알려달라고 요청한다. 심지어 지구인이 주기로 약속한 다른 모든 부는 거절하고, 오직 과학만을 원했다.  과학을 메스클린 인들에게 공짜로 알려주고 자기 후손이 배우게 했으면 좋겠다고.


벌레라면  질색이지만, 처음에는 높은 곳을 무서워하다가 점차 높은 곳에서 보는 풍경에 매료되는 발리넌이  귀여워서 무척 좋아하게 되었는데, 마지막에 지구인에게 이런 거래를 요청하자 더욱 좋아졌다. 비록 벌레지만 정말 완벽한 리더이자 선구자가 아닐까.


돈그래그머는 브리호의 일등항해사다. 발리넌처럼 모험심이 뛰어나지만, 훨씬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인물이라 발리넌의 계획에 여러 가지 쓴소리를 하고, 더 타당한 대안을 낼 줄 안다. 발리넌이 리더이자 상인이라면, 돈그래그머는 참모요, 과학자다. 발리넌은 찰스에게 직접 지구어를 배웠지만 돈그래그머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스스로 익혔다. 지구인에게 과학적 해결 방식을 묻기도 하고, 그들이 알려준 차동 도르래에서 원리를 파악하려고 끙끙댔다. 이를 본 지구인들도 그가 스스로 알아내기를 기대하며 흐뭇해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딴지걸기 전문이라 까다로운 녀석이 아닐까 했는데, 갈수록 매력이 넘친다. 마지막 고원 등반을 앞두고 발리넌이 돈그래그머에게 일부 선원을 데리고 브리호로 돌아가 합류 지점까지 항해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자신도 모험하고 싶으면서도 상관의 명령이라 묵묵히 따른 것도 그렇고, 합류 지점에서 다시 선원 일부를 승강기에 태워 고원으로 끌어올리자는 제안을 받아들여 제일 먼저 승강기를 타는 모험에 자원한 것도 그렇다.


'우리 메스클린인에게 플라이어의 과학을 배우게 하고 싶다'는 제안이 받아들여졌을 때, 발리넌이 과학을 가르칠 대상으로 선택한 사람도 자신 또는 돈그래그머였다. 발리넌은 과학을 알려준 이가 외계인이라는 사실을 다른 메스클린인에게 전하지 않기로 했으니, 어쩌면 책에 나온 대로 훗날 메스클린인들은 돈그래그머를 천재 과학자로 부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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