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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룡 May 01. 2022

규제가 디자인을 망친다

초기 설계가 그대로 유지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우리에겐 항상 내 뜻에 반하는 규제가 있다. 함께 사는 사회에서 규제는 없어서는 안 될 것이긴 하지만, 탁상행정의 발로로 멍청하고 황당한 규제가 생겨나 건축주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우리 집 초기 설계는 정말 예뻤다.

초기 설계 모형

하지만, 규제와 법규는 우리를 가만두지 않았다.


박공지붕

지구단위계획이라는 미운 행정 지침에 따르면, 우리 동네 지붕은 모두 경사 지붕, 그것도 최대 7:3 박공지붕이어야 한다. 아래는 핀터레스트에서 가져온 박공지붕 집과 평지붕 집이다. 박공지붕은 귀여운 느낌이고 평지붕은 세련된 느낌을 준다. 특히 박공지붕은 이미지처럼 널찍한 단층 건물을 전체적으로 감쌀 때나 예쁘지 좁고 높은 건물 위에 뾰족하게 모자만 씌워놓으면 영 태가 예쁘지 않다. 게다가 우리 동네는 자연녹지도 아니고, 주변에 아파트가 선 도심 한가운데인데 박공지붕을 하라니. (차라리 한 면짜리 경사지붕이라면 세련되기라도 하지)

박공 지붕(좌, https://pin.it/4tkP8MW)과 평지붕(우,https://pin.it/4EC4tKQ)

박공지붕 규제 문제를 찾아보니 2015년에 이런 기사가 있다. 동탄2 상가주택 지붕을 "도시 미관과 통일성"을 이유로 박공지붕으로 강제하자 건축주들이 반발한다는 내용이다.

http://www.kyeongin.com/main/view.php?key=937665

2021년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https://www.jnilbo.com/view/media/view?code=2021041410405852850

일반적으로 평지붕은 관리에 소홀하면 누수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고, 그래서 경사 지붕을 권장한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미관 때문에 박공지붕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건 대체 누구 발상인지 모르겠다. (평지붕 누수에 관한 정보는 https://youtu.be/08Ga48rMByM을 참고)


우리 집도 처음에는 한 면 경사 지붕을 생각했는데, 지붕 양면 비율이 적어도 7:3은 되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규제 때문에 박공지붕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모형의 3층 지붕) 단순히 경사 지붕을 하라는 것도 아니고, 비율까지 정해서 박공으로 만들라는 걸 보면, 절대 "누수 방지"라는 과학적 의견은 아님을 알 수 있다. 7:3이면 누수 없고 8:2면 누수된다는 실험 결과 따윈 없을 테니까.


정북 방향 이격 거리

서로 붙은 대지에 건물을 지을 때는, 인접 건물의 일조권, 조망권을 위해 서로 0.5m 거리를 둬야 한다. 이걸 인접대지 경계선 이격 거리라고 하는데, 특히 북쪽에 다른 대지가 있으면 그곳 일조권을 위해서 정북 방향으로 1.5m 거리를 둬야 한다.

정북 방향 이격 거리 1.5m(좌)와 정남 방향 이격 거리 1.5m(우)

왼쪽 그림에서 보다시피, 정북 방향으로 1.5m를 띄우면 내 땅인데도 내가 쓰지 못하는 북쪽 공간이 꽤 커진다. (회색 지역. 이런 곳을 대지 내 공지라고 부른다.) 북쪽 건물은 자기 앞 건물이 최소 2m 떨어져 있어서 좋을 것 같지만, 막상 비어있는 남쪽은 남의 땅이라서 마음대로 쓸 수 없다.


생각을 바꿔서, 오른쪽 그림처럼 정남 방향을 1.5m 띄워보자. 그럼 내 땅 남쪽에 생긴 폭 1.5m짜리 공지(연두색 지역)는 내가 마당으로 쓸 수 있다. 북쪽 건물에서 볼 때 자기 앞 건물이 최소 2m 떨어져 있기는 매한가지니 일조권을 침해당할 염려도 없다. 북쪽 땅은 0.5m이던 남쪽 이격 거리를 1.5m로 늘려야 하는 걸 싫어할 수 있겠다 싶겠지만, 어차피 남쪽으로 마당을 내기 때문에 남쪽으로 딱 붙여서 지을 일은 거의 없으니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도 탁상행정을 일삼는 자들이 "남쪽에 건물이 있으면 해를 가리니까, 남쪽 건물을 남쪽으로 좀 더 내리면 되겠지"라는 단순한 생각을 하고 만들어낸 법규가 아닐까? 요즘에는 택지를 조성할 때 조례 등으로 남쪽 경계선을 1.5m 띄우기로 정하면 오른쪽처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나아가 건축가 유현준 님은 <공간의 미래>에서 애초에 이격 거리를 제거하고 자유롭게 지으면 더 많은 공간을 활용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인접 건물이 서로 붙긴 하겠지만, 어차피 1, 2m 떨어져 있더라도 서로 창문을 열고 살지는 않을 테니, 차라리 그 공간을 꽉 채우고 마당을 크게 만드는 편이 낫다는 말이다. 물론 왼쪽 공지가 남향일 때 가장 좋은 방법이다.


건폐율 50% 대지에 집 짓는 걸 상상하면, 당연히 50%는 마당일 테니 마당이 꽤 넓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막상 건폐율 50% 짜리 마을에 가보면 집집마다 마당이 조그마해서 대지의 50%라고 믿을 수가 없다. 이게 다 대지 안 공지가 사방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법규에서 마당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집을 만들려면 대지가 100평 이상이거나 건폐율이 20%로 낮은 땅이어야 한다.


정북 방향 이격 거리가 우리 집 설계에 미친 영향은 단순히 1층 마당 넓이만은 아니다. 3층 베란다마저 북쪽으로 향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양이 되고 말았으니까!

남쪽을 띄울 때(좌)와 북쪽을 띄울 때(우)

건축법에 따라 건물의 9m 이상부터는 북쪽 건물의 일조권을 위해 높이의 1/2만큼 띄어야 한다. 우리 집 3층은 9m 이상이어서 오른쪽 그림처럼 남쪽에 바짝 붙이고 북쪽 벽 높이조차 낮춰야 했다. 따뜻하게 볕이 드는 남쪽 베란다는 온 데 간데 없어지고 시원한 북쪽 베란다만 남았다. "여름에 서늘해서 나가기 좋겠지"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하기로 했지만, 사실 이것 때문에 내부 계단 위치까지 바꿔야 해서 꽤 골치가 아팠었다.


이런 일조 사선 문제는 문제가 많아서 바꾸는 논의가 있다고 한다. 상세한 걸 알고 싶다면 아래 글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https://brunch.co.kr/@ratm820309n85i/68

http://xn--3e0b39yj7ao8u.com/57/?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6618838&t=board


소방관 진입창

2019년에 개정된 건축법에 따라 2층 이상 11층 이하 건물(아파트 제외)은 층마다 소방관 진입창을 설치해야 한다. 일본은 벌써 오래전부터 법규화 되어 있는 건데, 제천 화재로 인해 급물살을 타고 하필이면 내가 집 지을 때쯤 적용하기 시작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202288#home

화재 때 인명 피해를 줄이려는 목적에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떡하니 눈에 띄는 곳에 빨간 스티커를 붙이라니 건축 미관과 안전은 전혀 생각지 않은 것 같다.

소방관 진입창 규격

소방관 진입창은 도로에 면한 곳에 둬야 한다고 하니, 도로에 면한 창은 저 모양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 도로 쪽 뚫린 곳으로 경관을 보려고 큰 창을 만든다한들 보기 흉한 20cm짜리 빨간 스티커를 창 한가운데 떡 붙이면 이미 경관 보기는 틀린 셈이다.

미관은 어찌어찌 양보한다 치자. 하지만 도로에 면한 곳에 누가 보아도 잘 보이고 누가 때려도 잘 깨지는 창을 두고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을까? 상업 시설이나 병원처럼 밤에 사람이 없거나 평소 도둑이 들 위험이 적은 곳은 괜찮겠지만, 외딴곳이나 사람 적은 시골 마을에 저런 창을 두면 오히려 "여기로 들어오기 쉽습니다"하고 광고하는 꼴이 아닐까?


이 법규 때문에 우리 집 2층은 창 하나로 하려던 게 두 개가 되었고, 3층은 경관 보기용 통창 한가운데 스티커를 붙여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아파트 거주자들은 아파트가 제외되어 감사할지 모르지만, 화재 안전을 위해 만들었지만 위험을 내포하는 이런 시설은 아파트에도 있다. 나도 얼마 전에야 알았는데, 신축 아파트에는 화재 시 아랫집으로 내려갈 수 있는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아랫집에서 이 공간을 막는 건 불법이므로, 화재가 안 나더라도 내 맘대로 아랫집에 내려갈 수 있다는 말이다.



소방관 진입창은 화재 안전을 위한 것이니 어쩔 수 없다 생각해도(물론 그래도 좀 더 안전한 방식을 생각했다면 좋았을 것을), 나머지는 참 생각 없는 규제가 아닐 수 없다. 평생 딱 한 두 번 집을 짓게 될 건축주 입장에서는 딱 한 두 번 짜증내면 될 일이지만, 수없이 건물을 짓는 건축설계사들은 이런 법규 앞에서 몇 번을 좌절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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