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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희 Mar 07. 2021

도박에 미쳤던 어느 작가의 분신

도스토옙스키의 '노름꾼'을 읽고 쓰다

오늘날 러시아의 대문호로 잘 알려져 있는 도스토옙스키는 사실 도박에 미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학교를 마치고 번역 일을 하면서 쓴 <가난한 사람들>로 극찬과 함께 데뷔한 뒤, 그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문학 스타덤에 올랐다. 하지만 1년 뒤에 불어온 혁명의 바람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도스토옙스키가 속해있던 푸리에 사회주의를 연구하던 클럽은 주민 봉기를 계획했고, 그는 그 과정에서 체포되어 사형당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총살 직전 황제의 특사가 그들의 형을 감형했다는 황제의 명령을 (사실 모든 것이 황제가 겁을 주기 위해 계획한 일종의 처형 '쇼'였지만) 전달했기 때문에, 그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다. 결과적으로 이 순간의 경험은 그를 각성하게 만들어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만들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만약 내가 죽지 않는다면, 만약 산다면 나의 삶은 끊임없는, 영원처럼 느껴지며 1분이 백 년과 같으리라, 만약 내가 살아남는다면 인생의 단 1초를 소홀히 하지 않을 텐데...'라는 죽기 직전의 생각은 이윽고 극도로 세밀하고 집념이 느껴지는 묘사가 넘쳐나는 작품으로 이어졌고, 이는 인간과 신앙,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영감을 일깨워주는 대표적인 카탈리스트가 되었다. 프리드리히 니체, 토마스 만, 헨리 밀러, 그리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까지. 분야를 막론한 세계의 모든 석학과 작가들이 그의 작품을 읽었고, 이를 바탕으로 내놓은 것들은 분명 인류사의 축복이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의 생애는 그리 녹록지 않았다. 잡지사에서 주는 원고료로 겨우 먹고살았으며, 그렇게 돈을 벌었다고 해도 다 도박으로 날려먹기 일쑤였다. 그의 후기 소설은 하나 같이 다 어마어마한 페이지를 자랑하는데, 이는 글자 수대로 원고료를 책정했던 러시아 잡지의 규정 때문이었다. 한 글자라도 더 쓰면, 그만큼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으니 도박에 눈이 먼 도스토옙스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죄와 벌>은 구두로 급하게 완성했으며, 오늘 소개할 소설 <노름꾼>도 단 26일 만에 마무리했다. 여담으로, 작품을 완성하고 나서 그는 속기사 '안나'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도스토옙스키의 친척들이 남긴 빚과 친척의 구박, 첫째 아내가 남긴 자식들까지 함께 돌봤다. 게다가 폭력을 휘두르던 조카와 사치스러운 형수를 피해서 가족들을 데리고 드레스덴으로 이주하기까지 했으니 도스토옙스키 입장에서는 안나가 거의 구원자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도스토옙스키 역시 이런 안나의 고생길이 미안했는지, 나중에 도박을 끊는 데 성공한다.




도스토옙스키와 그의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니트키나'


그래서 '노름꾼'에는 당시 작가가 직접 도박장에서 경험했던 심리 상태와 주변 인물들의 특징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일례로 장군의 할머니가 가진 재산을 노리던 사치스러운 '블랑슈'는 작가의 형수를 닮았으며, 젊은 귀족에 지식인이었던 주인공 '알렉세이 이바노비치'에게는 한때 대학에서 공부하고 공상적 사회주의 클럽에 들어가서 활동했지만 지금은 도박빚에 시달리는 작가 자신의 모습이 비쳐 보인다. 또, 화자는 작품 속에서 장군의 양녀 '뽈리나'에게 강한 이끌림을 느끼는데, 이는 작가 본인이 수슬로바라는 이름의 여자와 보냈던 밀회의 역사를 기초로 한다. 중년의 가장이었던 도스토옙스키를 유혹했던 수슬로바는 젊고 매혹적인 여성이었지만 변덕이 심했고, 밥먹듯 바람을 피다가 나중에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뽈리나를 위해 도박장에 가서 말도 안 되는 액수의 돈을 따오고, 무례한 행동을 저지라는 요구에 응하는 알렉세이 이바노비치에게 그대로 투영된다. 



주변인의 묘사만큼 도박을 하는 알렉세이의 심리 상태 묘사 역시 이 소설의 또 다른 압권이다. 그의 삶을 어지럽게 만들었던 뽈리나와의 사랑과 욕망 같은 감정은 도박에서 느낄 수 있는 열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모험이 불러일으키는 도취, 탐욕적인 군중들, 룰렛 속 구슬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화자 본인의 심장 소리는 파멸의 예감과 한탕이라는 희망 가운데서 떨고 있는 영혼을 완전히 지배하는 요소로 자리매김한다. 작가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알렉세이가 도박장에서 느끼고 있는 것을 묘사하기 시작한다. 


나는 어떤 전율을 느끼면서, 그리고 가슴이 죄어드는 것을 느끼면서 심판이 외치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루이도어와 프리드리흐스도어 그리고 탈러들이 여기저기 흩여져 있는 도박대, 타오르듯 번쩍이면서 회전판 주위에 쌓여 있는, 길이가 1아르신이나 되는 은화의 기둥들, 나는 그것들을 너무도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 것이다. 방 두 개 정도의 거리를 남겨 놓고 도박장 가까이에 다가가기만 하면 나는 벌써부터 돈 쏟아져 내리는 소리를 듣게 되고, 거의 경련을 일으킬 지경까지 되고 만다.




비스바덴의 명물 쿠어하우스. 안에는 도스토옙스키가 다니던 카지노가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한 소설 속 화자들은 모두 '판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 절제를 잃어버렸을 때 처하게 되는 위기의 순간'을 겪는다. 그들은 언제나 의식이 미처 가보지 못한 곳에 이르기 위해 사고를 확장시키고, 의식의 긴장과 경험의 집중을 위해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행동으로 스스로를 몰고 간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의식의 세계는 자유롭게 날뛰기 시작한다. 알렉세이 이바노비치의 경우, 그에게 경멸스러운 태도를 지닌 뽈리나를 포기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뽈리나가 노예와 같은 존재로 자신을 업신여기면서도 그저 '어쩌면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버린다. 또, 노름에 빠졌을 때도 마찬가지로 그는 '하나의 확실하지 않은, 그러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예감을 믿고 도박장에 들어가 하룻밤만에 엄청난 돈을 따낸다. 이처럼 알렉세이는 뽈리나를 향한 열정과 도박을 향한 집착으로 인해 그의 영혼을 완전히 잠식당했고, 운명을 한순간에 뒤바뀌게 만들었다. 다른 작품 속 분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혹자는 알렉세이 이바노비치가 당시 러시아 사회가 직면하고 있던 문제에 대한 답을 내놓기 위해 설정된 것이라고 말한다. 구두쇠 같은 이미지의 독일과 고상함을 유지하고 있던 프랑스에 비해 작가가 본 러시아는 꼴사납고 품위 없으며, 젊음의 에너지를 어디에 쏟아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비록 서구에서 건너온 합리주의와 물질주의가 러시아에서 싹트기 시작했지만, 작가는 자칫하면 허무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자신의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세계와 인간 사회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악령과 개인의 투쟁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분신들은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동시에 구원에 대한 확신과 의지로 고무되어 있다. 그들은 사회에서 소외되어 고독한 삶에 짓눌리다 결국 파멸하는 당시 서구의 다른 소설과는 달리, 인간을 구원하는 신앙과 부조리한 삶에 대한 희망을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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