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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희 May 15. 2022

기술 정보 시대의 변화하는 사랑

세라 룰의 희곡 '죽은 남자의 휴대폰을 읽고 쓰다


  이 작품을 읽는 사람은 '진'이라는 이름의 여자가 왜 죽은 남자 '고든'의 휴대폰에 집착하는지에 궁금증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녀는 휴대폰 속 한 통의 전화로 인해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런 이들은 모두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진? 혹은 고든의 가족들? 진을 추동하는 요소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영국의 유명 시인 존 던(John Donne)은 그의 시 중 하나인 ‘No man is an Island’를 통해 죽음과 관련된 하나의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그것은 죽음이 모든 공동체 속에서 존재하며, 누군가의 죽음은 내가 속한 공동체가 어디이고 누가 속해있는지 드러내는 계기라는 것이다. 시의 마지막 구절이었던 ‘당신을 위해 울리는 종’이라는 메타포는 죽음을 다루거나 대처하는 방식이 공동체의 성격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또,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은 죽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움직이는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친구 ‘기즈키’와 ‘나오코’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와타나베는 생(生)의 활력이 넘치는 ‘미도리’와 함께 삶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자 한다. 그렇다면 세라 룰의 인물은 죽음에 대해 어떤 태도를 견지하고 있을까?



  고든의 핸드폰은 진이 새로운 세계에 뛰어드는 계기가 된다. 그녀는 그의 이후에도 그의 핸드폰으로부터 오는 전화 속 인물들과 엮이고, 그들에게 일종의 거짓말(작가의 설명에 의하면, ‘작화’)을 지어내면서 곤란한 상황을 넘긴다. 하지만 진의 행동이 다른 모든 인물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만큼 합리적인 대응 방식일까? 작가가 제시하는 새로운 문학적 핍진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신의 수필 “오비드에 대하여”에서 새로운 플롯을 제안한다. 이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신과 인간, 인간과 동식물, 자연, 현상과 형이상학 따위가 중첩되어 서로에게 스며드는, 어찌 보면 뒤죽박죽이고 유동적인 세계를 묘사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없었던 남자를 위해 목숨을 걸고 남아프리카로 날아가는 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지옥 속의 아들을 위해 바비큐 불 속으로 뛰어드는 고트립 부인의 행동은 그 자체로 형이상학적이고 뒤죽박죽이다.



  이때 독자는 진의 모든 작화가 애초부터 다른 인물의 행복을 바란 것이 아니라고 해도, 결국 남아있는 모든 인물은 치유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고든과 그의 휴대폰을 버리고 살아 있는 자의 세상, ‘지금, 여기’의 공간인 드와이트의 품으로 돌아”오며, 허미아는 세계적인 피겨 스케이팅 선수로서 아이스쇼를 다시 시작했고, 드와이트 역시 정치 이론 서적을 출판했다. 여담이지만, 세라 룰의 이런 결말이 앞서 언급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과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본문의 고트립 부인과 이 책의 나오코는 모두 어떤 인물을 계속 떠올리다가 죽음의 세계로 자신의 몸을 던졌기 때문이다. 차이점이라면, 고트립 부인은 아들을 위한 사랑의 힘으로 죽음을 선택했지만, 나오코는 “지구의 중심까지 꿰뚫은 어두운 우물과 구멍이라는 죽음의 세계를 품었고, 그곳으로 가고 말았다”라는 사실이다. 그녀에게는 그 어둠 말고 자신의 존재를 지탱해 줄 근거나 굳건한 바닥이 없었다.



  어쨌든 세라 룰의 인물은 죽음의 무게를 피하지 않고 새로운 삶 속으로 뛰어든다. 현재의 자신을 과감히 버리고 미지의 삶을 향해 나아가는 그들의 여정은 비이성적 충동과 모순으로 가득하다. 이들은 부조리한 운명을 밀쳐 내거나 제압하는 대신 어린아이와 같은 호기심을 가지고 죽음이라는 이름의 무거운 운명을 받아들인다. 이 과정은 상처로 가득한 인물을 시적 상상력으로 치유하는 ‘작화’의 순간들이며, 인과적이지 않고 비논리적이다. 하지만 나는 나이트의 움직임이 상대방 폰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처럼, 책을 읽는 내내 진이라는 인물의 행보가 그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고든이라는 남자의 직업을 장기 매매업으로 설정했을까. 그의 직업이나 살아온 방식에 대해 관객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독자는 작품을 읽으면서 고든은 진이라는 여자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는지, 혹은 진만 희생당한 꼴인지 등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일단 “죽은 남자의 휴대폰”은 주인공 진이 우연히 죽은 남자 ‘고든’의 휴대폰을 받으며 일련의 사건 속으로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이다. 진은 죽은 자의 폰을 들고 다니면서 남겨진 가족들과 연인을 만나 알지도 못했던 고든의 사랑을 전해준다.



  하지만 그녀는 2막에서야 고든의 직업이 ‘장기 매매업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1막에서 그녀가 했던 대사에 대한 다른 인물의 이상한 눈초리는, 사실 그녀가 고든과 동류의 인간일 것이라는 생각에 기인한 것이었다. 물론 이 직업에 대한 대중의 통상적인 이미지는 끔찍하다. 대부분은 이 일이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이라고 그를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고든 본인은 2막에서 자신의 독백을 통해 나름의 논리로 직업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역설한다. 세상에는 신장이 건강하고 돈이 필요한 남자와 신장이 간절한 부자 여자를 이어주는 적임자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가만히 듣다 보면 옳은 얘기 같기도 하다. 그의 ‘Compassionate Obfuscation(온정적 위장술)’에 기반하는 논리는 섬뜩할 만큼 논리적이다.


'죽은 남자의 휴대폰'의 작가, 세라 룰


  재밌는 사실은 바로 이처럼 ‘이론적인 인간’인 고든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드러난다. 신체 부위를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랍스터 비스크의 마지막 한 숟갈을 먹는 진을 보며, 그는 직전까지 ‘나쁜 년’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를 천사로 바라보게 된다. 한평생 장기 매매업자로 살면서 이성과 논리를 안식처로 삼아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던 고든이 죽음의 순간에 작은 환상을 위안 삼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아이러니였다. 흔히 인간은 그동안 자신들이 발전시켜온 이성과 과학의 영역을 토대로 한계를 부수고, 다른 한편으로는 환상과 비이성적인 과거의 영역을 무시했다. 사유가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을 이해할 수 있고, 심지어 교정할 수 있다는 깊은 믿음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인간의 삶과 죽음을 다루는 하나의 판단 기준이었다. 물론 역사는 이런 점만으로 모든 존재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우리는 여전히 신화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세라 룰은 바로 이런 모습을 ‘지옥 속의 고든’으로 작품 속에 녹여낸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회의에 빠져 있다. “인간이란 들어오고 나가는 장기들 사이를 둥둥 떠다니는 빈 그릇”이나 “인생은 본질적으로 거대한 수세미”라는 대사를 통해, 독자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이라면 모두 가질 법한 회의감이 고든을 둘러싸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휴대폰 발레’는 회의로 가득 차 있던 고든의 생각을 바꾼다. 그는 이승에서 자신에게 애정이 없다고 생각했던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고, “어머니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로 빛난 채 그녀의 지옥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래도 여전히 진은 그곳에 남아있다. 휴대폰은 마치 그녀의 모든 행동이 영원히 희생으로 남아있을 것처럼 조용하지만, 그것이 바닥으로 던져지는 순간에 그녀는 공항으로 돌아온다. 그녀 역시 죽음으로 뒤로 한 채 강렬한 생명이 이끄는 곳을 선택했기에 소크라테스적 이성으로부터 구원받았으며, 드와이트를 향한 새로운 사랑은 지금까지 이어진 비선형적인 여정의 또 다른 시작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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