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세상에서 넓은 마음을 가지고 살려면
추석을 맞아 오랜만에 친척들이 모였다. 얼굴이 말랐다, 일은 할만하니, 전을 잘 부쳐왔구나, 따위의 말들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결코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게 평생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올해도 모여서 나누는 이야기는 비슷하다. 정치인에 대한 불만, 요즘 젊은 사람의 행태, 방탄소년단과 롤링스톤즈의 차이, 내 결혼 사업의 전망, 동네에 지어지는 ‘게이 교회’ 반대 서명 등이다. 이런 위화감 가득한 대화를 들으며 나는 몰래 멍을 때린다. 송편은 언제 먹나.
집에 돌아오는 길에 깨달았다. 첫 번째는 내가 그곳의 몇몇 어른들과 구별되는 ‘다름’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점. 두 번째는 그 경험이 유독 이질적으로 느껴질 만큼 나와 다른 사람을 접하는 게 매우 ‘오랜만’이라는 점이다. 생경한 기분을 곱씹으며 기억 속에 묻혀 있던 대화를 복기했다. 가깝게 지내던 목사님이 털어놓은 고민이었다. 그는 “요즘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워”라고 말했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이 어떤 고민과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을 이해하기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고민이다. 내 세계에서는 범람하는 종류의 사람인데 그는 노력해야 겨우 닿을 수 있다. 닿은 후에도 마음을 열고 연대하는데 더 큰 노력과 에너지가 든다. 이 고민을 처음 들은 나는 새삼 목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의 세상과 내 세상의 차이를 실감했다. (아직은) 다양성이 풍요로운 내 세상에 안도하며.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하면서 내 세계도 좁아지기 시작했다. 나와 사회경제적 배경이 비슷한 사람과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집에 살며 비슷한 고민들로 점심시간을 채운다. 퇴근 후 세상이 어찌 돌아가나 궁금해서 킨 핸드폰은 내가 자주 보는 콘텐츠를 분석해서 더 비슷한 콘텐츠로 피드를 채운다.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 다 준비해주는 세상은 이제 없다. 더 정밀한 개인화와 맞춤 추천으로 듣기 좋은 것, 보기 좋은 것을 떠 먹여준다. 편식에 익숙해지고 좁은 세계는 견고해진다. 더 이상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라는 고민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몇 년 전 충격적인 미국 대선 결과는 이런 양극화를 잘 보여준다. 주변에 트럼프의 허황된 말을 지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언론 주변에 없으니 대부분의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할 거라고 예상, 아니 단정했다. 미국 언론은 마치 힐러리의 당선이 예정된 듯 보도했고, 많은 유권자는 그런 보도를 보며 방관했을지 모른다. 미국 언론은 기득권과 지성인 주변에는 쉬쉬했지만 곳곳에 분명히 존재하는 트럼프 지지자의 의견을 조명하는데 실패했다.
내 작은 샘플로는 세상을 이해하며 살 수 없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부딪히고 교류해야 더 조화롭게 살아갈 것이다. 그래야 나와 다른 사람도 나의 다름에 귀 기울어줄테니까. 얼마나 기가 막히고 화가 나는 의견이라도, 경청하고 대화할 수 없다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꼰대다.
사랑하는 할머니의 말을 듣는 것부터 시작해본다. 댓글창에서 만났다면 열띠게 싸웠을지 모르지만 가족이라는 구실로 어쩔 수 없이 만나 서로의 의견을 듣게 하는 사이가 있어 다행이다. 불편한 노력을 연습하게 하는 존재가 있어 다행이다.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과 잘 지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돌고 돌아 어린 나에게 더불어 사는 삶을 가르쳐준 이들로부터 답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