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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bebibu Jun 15. 2024

평화 총량의 법칙

팔레스타인을 생각하며

진실은 드물게 순수하고, 결코 단순하지 않다.
The truth is rarely pure, never simple.
– 오스카 와일드


6년 전, 재학 중인 미국 대학이 발칵 뒤집어졌다. 누가 나치 심벌과 "유대인들은 이 학교에 있을 자격이 없다!"라는 낙서로 도서관 책을 훼손한 것이다. 그 밑에는 동의한다 :)라는 답변도 적혀 있었다. 이를 발견한 학생은 비탄하며 학교 페이스북에 긴 글을 게시했다. 그는 유대인이었다.

출처: Pittsburgh City Paper

당시 학교 총장은 이 사건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발표했다.

우리는 이 악을 규탄합니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혐오를 반대하며, 이것이 공동체에 설 자리는 없습니다.
We condemn this evil. We reject bigotry in all its forms, it has no place in society.

그는 ‘반유대주의’를 악으로 명명했다. 공개적으로, 지체 없이, 강경하게.


그렇다면 한번 상상해 보자. 만약 “한국인들은 이 학교에 있을 자격이 없다!”라고 쓰인 낙서가 욱일기 문양과 함께 발견됐다면 어땠을까?


실제로 이 낙서 사건 이후 공교롭게 욱일기가 학교에서 목격됐다. 초청 강연을 홍보하는 포스터에서 욱일기가 핑크색 배경을 가로지르며 줄무늬 문양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은 연사 측에서 준비한 포스터였다. 한인학생회와 중국인학생회가 함께 문제를 제기하고 학교 측에 성명을 요청했다. 하지만 학교의 답변은 냉담했다: "학생의 안전을 위협했다고 보기 어렵다."


한인 학생회는 욱일기가 동아시아 역사에서 상징하는 바를 설명하기 위해 학교와 여러 차례 면담했다. 그러나 누가 캠퍼스에서 미국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남부연방기 옷을 입고 활보해도 괜찮냐고 피력해도 학생 지원 담당자는 태연한 표정으로 영혼 없는 답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얼마 후 한 수업에서 욱일기가 문제의식 없이 인용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답답했다. 불과 몇 개월 전 있었던 나치 심벌 낙서 사건과 180도 대조되는 태도였기 때문이다. 미국 대학에서 나치즘과 노예제도는 일말의 의심 없이 ‘모든 형태의 혐오’중 하나지만, 일본의 식민지배는 낯선 문제였다. 물론 명백히 유대인 혐오를 담은 표현과 욱일기를 디자인적으로 차용한 일은 성질이 다르고, 이에 대해 학교로부터 동일한 대응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이 경험이 주는 무력감은 되려 미국 대학과 동양인 유학생 사이, 몇 번의 면담으로 메울 수 없는 공백으로부터 느껴졌다. 그 공백은 우리의 외침을 유난으로 만들었다. 동양인 학생이 과반수인 학교에서 정작 우리의 대표성은 미약했던 것이다.



누구의 비극이 더 끔찍한가?

서사의 불평등에 대해 트레버 노아(남아공 출신 방송인)는 저서 ‘태어난 게 범죄’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홀로코스트가 의심의 여지없이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잔혹 행위였다고 주장하는 서구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물론, 홀로코스트는 끔찍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궁금할 때가 많다. 과연 콩고에서와 같은 아프리카의 잔혹 행위는 얼마나 끔찍했을까? 유대인들은 가졌지만, 아프리카인에게는 없는 것은 기록이다.

세계가 경험한 수많은 사건 중 아주 일부만 역사로 남겨진다. 치열한 공부, 언어, 자본을 거름 삼아 홀로코스트가 우리 모두의 비극으로 새겨졌다면 대부분의 사건은 조명받지 못하고 지나간다.  


홀로코스트 박물관과 스필버그 영화를 접하며 자란 내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처음 경각심을 가지게 된 건 대학교 3학년 때 중동역사 수업을 수강하면서였다. 이스라엘이 주요 영토를 점령하게 된 과정, 그리고 이 분쟁의 무게와 다면성을 파헤치며 머리가 아팠던 기억이다. 어려운 문제는 회피하게 된다. 내가 금세 거둔 관심처럼 국제사회의 팔레스타인 ‘은따‘는 계속됐지만.


출처: "CMU students hold pro-Palestine protest on campus." The Daily Sentinel.


내가 처음으로 중동 분쟁과 시오니즘에 대해 공부하고 유대인 혐오 낙서 때문에 혼란을 겪은 모교에서 지금은 친팔레스타인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작년 10월, 무장 단체 하마스의 폭격 이후 1,400여 명의 이스라엘인이 사망하는 동안 3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희생자 대부분이 여성과 어린이다. 나 또한 반유대주의를 부정함과 동시에 생존을 투쟁하는 무고한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고 있다. 그리고 자본도 권력도 없는 팔레스타인보다 이득(이스라엘)에 편승하는 미국 정부와 기업을 보며 깊은 실망을 느낀다.


실망뿐이라면 마음이 뜨거워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싸늘함이 함께 드리운다. 한쪽이 누리는 자유와 권리가 항상 다른 쪽의 누군가가 치른 값일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 섣부른 실망을 멈춘다. 옳고 그름이 얽히고설켜 시야를 가릴 때 나도 방관하지 않았던가? 미국에 살며 이 글을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쓰는 데 일말의 자기 검열이 없다면 거짓이 아닌가? 결국 이 모든 게 과거의 명분으로 힘겨루기 하는 거라면, 먹고 먹히는 싸움의 순환이라면, 누구든 작은 자를 탄압할 만한 힘이 생겼을 때 이를 엄격히 다룰 마음의 준비가 되었는지 묻게 된다. 한국은 일본 강제 점령의 피해국이지만 오직 그렇지만은 않다.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를 기리는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한국의 소녀상을 닮지 않았나. 몇 년 전 내가 미국 대학에서 느낀 무력감을 한국 대학을 찾는 외국인 유학생들 또한 마주할 게 아닌가. 힘의 크고 작음이 영구적이지 않다면, 누구에게나 지배를 가하고 받는 자가 될 수 있다면 더더욱 평화를 외쳐야 할 것이다.



반쪽짜리 평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스틸. 출처: A24

얼마 전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개봉했다. 유대계 영국인 감독 조나단 글레이저가 아우슈비츠 수용소 장교와 그의 가족을 그린다. 관객은 유대인 학살 가해자들이 수용소 밖에서 밥을 먹고 정원을 가꾸며 그들만의 낙원을 누리는 모습을 지켜본다. 유대인 학살은 담벼락 너머로 들리는 소리와 피어오르는 연기 등으로 은연중에 드러날 뿐이다. 수용소 옆 그들의 안락하고 평온한 일상은 오히려 직접적인 학살 묘사 보다 더 섬뜩하게 느껴진다.

출처: AP PHOTOS: Israel’s separation barrier, 20 years on

글레이저가 해부하는 가짜 평화의 이면은 유감스럽게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떠오르게 한다. 이스라엘은 그동안 유대인 정착촌을 확장하며 팔레스타인 영토를 불법 점령해 왔다. 정착촌을 위해 베를린 장벽보다도 더 높고 크게 지은 분리 장벽 너머, 유대인 아이들이 뛰어노는 놀이터는 강제로 이주당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자리가 아닌가.


글레이저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로 아카데미 국제 장편 영화상을 받았을 당시 떨리는 목소리로 다음 수상소감을 전했다.

우리의 모든 선택은 현재를 돌아보고 직면시킵니다. "그들이 그때 무엇을 했는지 보라"라고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을 보라"라고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영화는 비인간화가 향하는 최악의 결말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형성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유대인 정체성과 홀로코스트가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키는 점령에 악용되는 것을 반대하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이든, 가자 지구에서 진행 중인 공격이든, 이 모든 비인간화의 희생자들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저항해야 할까요?

All our choices were made to reflect and confront us in the present — not to say, “Look what they did then,” rather, “Look what we do now.” Our film shows where dehumanization leads, at its worst. It shaped all of our past and present.

Right now we stand here as men who refute their Jewishness and the Holocaust being hijacked by an occupation, which has led to conflict for so many innocent people.

Whether the victims of October the 7th in Israel or the ongoing attack on Gaza, all the victims of this dehumanization, how do we resist?

그의 영화는 독일인이 나오는 영화지만, 독일인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사그라들지 않는 저항의 외침, 그리고 침묵하는 이들 사이에서 더 치열하게 묻게 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운동은 무엇인가. 내가 해야 하는 공부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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