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이제 시집을 가거라!
이봉순 마리아 여사의 장례식에서 가족들은 철없는 외손녀인 나를 보며 이제 잔소리 안들으니 후련하냐고 농담을 건넸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명절마다 할머니의 "시집 좀 가라" 잔소리에 시달리며 괴로워했었다. 올해 명절에도 강렬한 잔소리 한방을 기대하고 왔건만, 이제 그녀는 가고 없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본 그날도 할머니는 나를 향해 잔소리를 쏘아댔다. 2024년 7월의 어느날, 해운대 시장의 꼼장어 집에서 모처럼 할머니와 외삼촌, 둘째 이모 부부와 우리 가족이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둘째 이모는 오늘 할카(할머니 카드)로 결제할 예정이니 마음껏 주문하라 했다. 소금구이 꼼장어와 양념 꼼장어 하나씩을 주문한 우리 테이블은 내가 일본 여행을 다녀와서 사온 구보타 만쥬 사케를 통 하고 땄다. 한국 술집에서는 20만원 하는 술을 일본에서 4만원에 사왔다고 자랑하는 손녀딸을 할머니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할머니도 한잔 드릴까요? 나는 속이 타는 할머니의 마음도 모르고 할머니의 잔에 주책맞게 사케를 따르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꼴깍꼴깍 사케를 한잔 드시고는 꼼장어를 뒤적거리셨다. 어느새 가족들은 거나하게 취해갔다.
야, 올해는 롯데 좀 잘하지 않나.
아 그니까요 삼촌. 저도 한창 안보다가 올해는 본다니까요.
옛날에는 순 늙은 것들만 나와가지고 꼴도보기 싫더만 요새는 그래도 볼만 하더라.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할머니께서 보다못해 한마디 하셨다.
야야, 니는 언제 시집 갈끼고.
스물 일곱 전후로 시작된 배틀이었다. 시집 언제 갈래?라고 운을 띄우면 나는 할머니 저 내년에 갈게요. 라고 응수하고는 했다. 더이상 뭐라 말하기도 지친 내가 고안한 공수표식 대답이었다. 한 2년은 먹히는가 싶었는데, 4년째가 되니 이제 약빨이 다한 모양이었다. 니 작년에도 그말 하지 않았나. 이제 내 작전은 간파 완료였다. 더이상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할머니도 그걸 알고 있었다. 입을 삐죽거리는 나를 보며 할머니의 2절이 시작되었다.
야야, 니가 지금은 젊어서 기고만장 하지만은 앞으로 나이 들면 머스마도 없데이. 니만 생각하지 말고 니 부모를 생각해야 안 되겠나. 얼른 올해나 내년 안에 가래이.
아니 할머니 제가 가고싶다고 덜렁 가집니꺼? 뭐 가겠다는 아가 있어야 가지예.
그래서 가겠다는 아가 있나.
아니 제가 학생인데 우째 퍼뜩 결혼을 합니꺼?
야야 니네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얼릉 가래이.
서울에서 가족들과 함께 나눌 구보타 만쥬를 품에 안고 부산으로 내려온 그날의 내 부푼 마음은, 그렇게 할머니와의 잔소리 배틀로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원체 이봉순 할머니는 가족들과 내가 술을 마시고 있으면 어김없이 잔소리를 하셨다. 니 시집가서도 그래 술 마실끼가? 가만히 있으면 안되고 일을 해야 된대이. 내가 방정맞고 좋은 색시감이 아니라는 점이 불만이신 것 같았다. 그날은 특히 이해가 안되는 말 투성이었다. 너만 생각하지 말고 너의 부모를 생각해서 시집을 가라고? 내 부모가 내가 원하지도 않는 결혼을 하면 기뻐할거라 생각하신 걸까? 내가 지금 행복한지, 잘 살고 있는지는 안중에도 없었던 걸까? 이후 나는 입을 삐죽 내밀고 할머니가 하는 말을 무시했다. 롯데는 삼성한테 21대 4로 졌다. 에이, 술맛 떨어져.
그랬던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장에 앉아 나는 처음으로 할머니의 잔소리를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다. 그녀는 그녀 자신을 생각해서 뭐라도 한 적이 있었을까?
할머니는 글을 몰랐다. 30년대에 태어난 여자들은 글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스무살이 되어도 혼처를 찾지 못한 그녀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노처녀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그녀는 20대 초반에 간신히 부산의 공무원과 결혼에 성공(?)하여 아이를 가졌다. 아들을 낳아야 하는데, 다섯 번은 실패였다. 이내 여섯번째에 간신히 아들을 얻을 수 얻었다. 여섯 명의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고, 남편의 도움 없이 모두 키워낸 그녀는 끊임없이 집안일을 하면서도 못 배운 년이라며 자신을 낮췄다. 다섯째 딸 현아는 고등학생이 된 어느날 엄마가 글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첫째부터 넷째 언니까지 다 대학엘 갔건만, 정작 그들을 모두 키워낸 어머니는 글을 읽지 못했다. 왜 아무도 엄마한테 글 안가르쳐줬어? 그녀는 엄마를 생각하며 많이 울었다.
그녀의 삶은 다른 사람을 뒷바라지 하는 시간으로 가득했다. 먹이고, 입히고, 치우고, 밥상을 차리고, 술상을 차리고, 아이를 낳고, 과일을 깎았다. 젊은 육신은 낡아갔다. 남편이 죽은 후 집안일을 놓게 되면서부터 할머니는 급격히 노쇠하기 시작했다. 삶의 의미를 잃었을 수도 있다.
그녀의 삶에는 가족이 전부였다. 아이를 낳아 기르면 그 아이가 다른 아이를 낳는 장면을 보는게 생의 기쁨이었다. 그녀가 아는 행복은 그게 전부였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사랑하고 밥을 먹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기쁨. 나를 보고 그녀는 어쩌면 자신의 딸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현아도 손녀딸 보는 기쁨을 누려야 하는데, 손녀는 속도 모르고 술만 마신다. 어쨌거나 그녀는 딸을 더 사랑했다. 엄마가 예쁜지 내가 예쁜지 물어도 엄마가 더 예쁘다고 했다. 그러니 내가 엄마의 행복을 위해 몸을 찢어 아이를 낳을 차례라는 거였다.
그녀에게 행복이란 다음 세대로 미루는 사치스런 감정이었을지 모른다. 내가 행복한 것 보다 자식이 행복한 게 낫다고. 그러면 그 자식도 자기의 자식에게 행복을 유예할 터였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결혼과 탄생의 기쁨만이 허용되는 세상이었다.
장례식장으로 한 무리의 사람이 들어왔다. 교회에서 장례 예배를 드려 준다고 했다. 무거운 목소리의 젊은 남자 목사가 신도들 앞에 섰다. 어두운 옷을 입은 중년 여성과 남성이 나를 둘러쌌다.
이봉순 할머니가 천국에서 행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찬송가 사백구십삼장 부르겠습니다.
하늘 가는 밝을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내가 염려하는 일이 세상에 많은즉
속에 근심 밖에 걱정 늘 시험하여도
예수 보배로운 피 모든 것을 이기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이기리로다
내가 천성 바라보고 가까이 왔으니
아버지의 영광 집에 나 쉬고 싶도다
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
영광 나라 계신 임금 우리 구주 예수라
나는 계속 울었다.
예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정말로 그 곁에서 할머니가 쉬었으면 좋겠다고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