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난 Mar 09. 2020

생각이 많은 사람의 하루

머릿속이 바빠

오전 8시경 힘겹게 일어났다. 메스껍다는 생각이 하루를 시작하며 처음 한 생각이었다. 1층 거실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며 어지러워 넘어질 뻔했다. 둘째 아기를 안고 있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뻔했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났고, 강도 높게 긴장한 찰나 때문에 메스꺼움이 배가되었다. 헛디뎌 아기가 계단을 굴러떨어지는 상상을 반복했다. 6개월도 채 안 된 아기를 태운 유모차가 도로로 미끄러져 들어가던 아찔했던 순간이 기억났고, 무거운 전신거울이 아기 머리로 떨어질 뻔한 순간도 기억났다. 실수와 우연으로 발생할 뻔한 비극이 아슬하게 비켜간 순간들이었다. 필립 로스의 <울분> 중 마지막 구절이 생각났다. "매우 평범하고 우연적인, 심지어 희극적인 선택이 끔찍하고 불가해한 경로를 거쳐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자의나 타의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 아닌, 의지가 담기지 않은 순전한 우연은 얼마나 기가 막히는 일인가 생각했다. 불안을 느끼는 접점이 다양하고,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나 같은 기질의 사람은 신앙을 가지는 것이 건강에도 이롭다. 모든 것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 생각해버리면 무기력, 절망감에서 해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찾거나 감사하는 자세를 갖지 못한다. 비극에 비켜서고자, 나약함을 물리고자, 안정을 구하고자 신을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정과 축복을 구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신을 믿는 주된 이유는 아니다. 의문이 이는 지점이 다양하고, 확고하고 명백하다는 것들은 일단 의심하고 회의하는 나 같은 기질의 사람은 신앙을 가지는 일이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오전 11시경 시몬 드 보부아르의 책 <제2의 성>의 첫 윤독 모임이 있었다. '살롱 드 보부아르'라는 멋진 모임 이름도 정해졌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모인 터라 기대감이 들었었다. 모임 장소였던 무명 서점으로 운전해 가면서 기대감은 커녕 부담감이 들었다.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첫째 아이가 고열과 장염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병간호로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피로했다. 아이의 장염이 옮은 건지 내 위와 장에도 스믈스믈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제안했고 첫 모임여서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아픈 아이를 데리고 서점으로 향했다. 브레이크와 엑셀을 신경질적으로 밟으며, 역시 몸이 안 좋으면 기분도 안 좋아.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상냥해야 할 텐데 상냥하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했다. 몸은 지배력이 강하다. 몸이 정신과 감정을 지배하는 경우가 (특히 내게는) 많다. 엄마는 내게 "너는 정신력이 약해."라는 말을 많이 했다. 의지와 근성이 약하다는 이유였다. 엄마에게 아프다는 말을 하면 "엄마는 아파도 정신력으로 다 이겨내. 니 몸이 자주 아픈 건 정신력과 지구력이 부족해서야."라는 말을 매번 들어야 했다. 몸이 약해 의지력이 없는 건지 의지력이 없어 몸이 자주 아픈 건지 생각했다. 이번의 경우엔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는 엄마 말이 맞았다. 정신력으로 몸을 움직여 의지를 가지고 독서모임에 참석했더니 피로한 몸이 생기를 되찾았고, 무기력한 마음이 활기를 띠었다. 프롤로그를 읽고 책에 관한 얘기를 나누며 이 모임이 내게 좋은 기회가 되겠구나 생각했다. 이 책을 완독하고 나면 나는 한 뼘 더 성장해있을 것 같다.

오후 2시경 제주시에 나왔다. 내가 사는 읍내에는 소아과가 없다. 제주시는 31km 떨어져 있고 평균 시속 80km로 45분은 쭉 달려야 도착한다. 아이는 차에서 잠들고 혼자 드라이브하는 마음으로 운전하고 있었다. 요즘 듣고 있는 팟캐스트 <이윤호의 고전읽기>를 들을까 하다가 쓰고 있는 글의 캐릭터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으로 마음을 바꿨다. 비눗방울처럼 붕 떠올랐다가 툭 하고 터지는 생각들을 하고 있다가 얼마 전 쓴 <키스>라는 글이 생각났다. 글의 말미에 '오므렸던 나를 벌렸다' 식의 표현을 넣는 것을 고민했던 것이 떠올랐다. 폐쇄적인 공간을 확장시키는 의미로, 고립시켰던 것을 개방하는 의미로 넣었던 문장인데 벌린다는 표현을 쓰는 것에 주춤한 마음이 들었다. 하루 동안 낯선 남자 두 명과 키스를 했던 경험을 쓴 터라 더 했을 거다. 쩍벌 남성의 행동은 힘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구가 내재되어 있고, 타인을 불편케하는 그 욕구 때문에 사회적 지탄을 받지만 남성은 창피할지언정 수치심을 느끼지는 않는다. 여성의 쩍벌은 그 의도가 무엇이건 간에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다리를 벌린 여성이 주는 이미지는 대개 부정적이다. 음란하거나 천박하거나 도발적이거나. 벌리는 행동의 고착화된 이미지 때문에 상업적으로 섹시를 소비하는 문화에서 여성은 다리를 벌리거나 입을 벌린다. '움츠러들었던 것을 펼친다' 와 '오므라들었던 것을 벌린다' 중에 결국 벌리는 것을 선택했다. 여성은 유독 '어떻게 비칠지' '신경'쓴다. 요구된 여성성을 내재화시켰기 때문인데, 이런 신경 써야 할 수많은 것들이 속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탈피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벌린다는 표현을 선택했다. 쓰고 있는 글의 여성은 다리를 벌리면서 수치를 느끼는 여성이다. 다리 벌린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에 모욕감을 느낀다. 수치와 모욕을 느껴야만 하는 사회의 억압을 보다 적확한 언어로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지만 머릿속은 매일 분주한 것 같다. 몸이 바쁘지 않으니 머리가 바빠지는 요상한 상황. 생각을 비워야 할 때를 알고, 비워내는 방법을 찾아야 할 듯하다.


금능바다 관광객은 모르는 우리만 아는 멋진 곳
한라산 뷰와 바다 뷰가 한 큐에 잡히는 명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