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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난 Jun 09. 2020

사랑하는 사람

좋은 관계란 무엇일까.


시어머니는 내게 "너와 나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가 아니라 인생의 선후배이자 친구인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어. 우리는 그렇게 지내자."는 말씀을 곧잘 하신다. 고부관계의 위계나 대립 없이 화목하게 지내자는 말씀으로 이해고, 시어머니의 위치에서 가질 수 있는 흔치 않은 평등지향적인 마인드라 감사한다. 하지만 어머님과 나 사이에 아들(남편)이나 손주(아들들)의 어떤 역학관계없이 좋은 인생 선후배나 친구가 정말 될 수 있을지는 의문다. 어머님과 내가 서로에게 좋은 인생 선후배 관계가 되고, 친구가 될 수 있을 만큼 서로에 대해 잘 아는지 모르겠다.


어머님은 나를 모른다. 깨끗이 손빨래하고 풀 먹여 다린 하얗고 빳빳한 와이셔츠를 입던 아들이 세탁기에 돌려 건조기에서 막 꺼낸 꾸깃한 와이셔츠를 입고 다니는 것도 모른다. 일거수일투족을 살뜰하게 뒤치다꺼리해주던 어머님의 손길이 끊기자 어머님의 아들은 구멍 뚫린 양말을 신고 다니게 되었다. 아들을 잘 챙기지 않는 며느리를 예뻐할 수 있을까. 어머님은 아들을 위한 자신의 살뜰한 손길을 인계받지 않고, 인계받을 생각도 없는 페미니스트 며느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내로서의 나의 모습은 어머님 세대가 이상화한 아내의 이미지와 거리가 한참 멀다. 다행히도 어머님은 이제껏 아들의 안위를 나에게 위탁하는 말을  적이 없다. 오히려 "나는 아들보다 네가 더 좋아. 아들은 싫어. 그냥 둘이 잘 살고, 나는 신경 꺼."라는 말을 매번 하셨다. 어머님의 진의는 "나는 네가 좋아. 그리고 아들도 사실은 좋은데 뭐, 알아서 잘하리라 믿어." 의미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어머님은 마치 아들과 연이라도 끊을 것처럼 자주 말하셨고,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들에게 집착하는 것 보다야 나으니까 그러려니 했다. 알고 보니 '연을 끊지 않으면 아들이 요절한다.'는 누군가의 말 때문이었다. 오래전 아버님이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어머님은 가족의 죽음에 큰 트라우마가 생겼다. 그런 어머니에게 '누군가'가 지속적으로 요절의 불안을 상기시키며 어머니를 휘둘렀던 거다. 분명한 악의가 있는 말이었지만 어머님은 알지 못했다. 어머님이 아들과의 연을 끊길 종용하는 그 '누군가'가 어머님에게 어떤 의미의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누군가'는 어머님을 지탱하는 '중요한 누군가'였지만 베일에 쌓여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 악의를 들추어내 어머님은 나에게마저 등을 돌리시고, '누군가'에게 더욱 메여 고립될게 분명했다. 내가 정말 어머님의 인생 후배이거나 친구라면 바른 소리를 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 '매우 중요한 의미의 누군가'가 어머님의 곁을 떠나고, 악의가 드러났다. 아들과 연을 끊게 하고 얻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낱낱이 드러났다. 너무 기가 막혀서 입이 쩍 벌어지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어머님은 그 악의를 가진 '누군가'를 인생의 해답이자 정답이라고 여겼고, 그를 위해 헌신을 다한 듯했다. 그 '누군가'가 어머님께 어떤 의미의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두 분이 어떤 관계였는지도 선명히 보이게 되었다. 나는 시어머니에 대해 너무 몰랐고, 큰 당혹감을 느꼈다.


나는 지금도 어머님께 바른 소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크고, 실망감이 크지만 전혀 내색할 수가 없다. 어머님은 자신의 믿음이 부서진 것을 보며 큰 상실과 허망함과 괴로움을 견디고 계신다. 그리고 나는 그런 어머님의 곁에서 위로하는 사람으로서의 역할만 할 뿐이다. 내 마음의 당혹감과 실망감을 추스르는 건 온전히 나의 몫이다. 어머님은 며칠 전에도 내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좋은 인생 선후배 사이야."라고 말씀하셨다. "저는 어머님의 일면을 이해하지만 이런이런 부분은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리고 앞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닫았다. 어머님에 대한 내 마음 한편은 급격한 온도 변화를 겪고 있다.


어머님에 대한 이 감정 변화를 몇 날이고 골똘히 생각한다. 스스로 질문하고 답해보며 어머님에 대한 실망감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어머님의 "우리는 좋은 선후배이자 친구사이야"라는 말에 회의하지만 그래도 나는 어머님께 "좋은 사람"이고 싶다. 어머님의 말처럼 남편과 아이들의 개입 없이도 좋은 관계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지금 나의 태도는 '좋은 관계'에서 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머님이 하시는 말들을 듣는다고 내가 그 말에 동의하고 이해한다는 건 아닌데, 나의 함구가 어머니는 '이해'와 '수긍'으로 여기신 듯하다. 들어주고 받아주기만 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일 수 없고, 좋은 관계가 될 수도 없다. "네, 좋아요.", "네, 이해해요.", "네, 어머님이 옳으세요."라는 말은 위선이다. 그렇게 말할 수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어머님에게 나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위선적인 태도를 취하다 보면 내가 어머님을 좋아하는 진심마저 거짓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다.


어머님은 나를 잘 모른다. 내가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 어떤 가치관을 가진 사람인지, 아들에게는 어떤 아내이고, 손주들에게는 어떤 엄마인지 잘 모른다. 또, 사실은 내가 어머님께 실망을 했고, 실망한 이 상황을 슬퍼한다는 것을 아실리 없다. 어머님과 나의 관계는 앞으로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 어머님이 내게 말하신 "인생 선후배, 친구 같은 관계"는 정말 가능할까. 감정을 숨기거나,  봉제한 생각의 일부분만을 전달하는 관계로는 불가능할 것 같은데.

 

오랜만에 만난 어머님을 꼭 껴안았다. 그냥 껴안아주고 싶었다. 어머님은 나를 잘 모르고, 나도 어머님을 잘 모르지만 우리가 서로를 좋아하는 진심만큼은 알기 때문이다. 아는 것의 깊음과 얕음은 큰 차이가 있고, 생각과 감정의 노출과 은폐도 큰 차이가 있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그것과 별반 상관이 없나 보다. 실망을 했고 마음이 아프지만, 실망을 했고 마음이 아프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좋은 관계일지도 모르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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