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생의 삶을 되돌아보며
이번 매거진은 [연구노트를 찢어 만든 대학원 일기]로 연구가 하고 싶어 대학원에 진학한 나의 연구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아무래도 현재 진행형인 사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일반화를 하니 조금은 조심스럽다. 그래도 최대한 일상 속에 배움이 얻을 때가 있으면 이 글을 계속 작성할 것이다. 이 매거진의 내용은 대학생에서부터 대학원생까지 연구에 꿈을 두고 있는 독자분(특히 건설계열을 필두로 하는 이공계)에게 작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게 구성하려고 한다.
여러 글에서 언급하였듯이 내 전공은 도시공학이다. 도시공학을 선택한 이유는 화학과 생명과학에 관심이 없었던 나에게 몇 안 되는 선택처였고, 관심이 많았던 지리를 쓰는 전공이라 조금은 매력적으로 느껴져서다. 천문학도를 꿈꾸다 수능을 망치고 어영부영 서울에 있는 한 대학의 도시공학과에 추가 합격하게 되었고, 나와 도시공학의 인연은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나는 1학년 때 과 대표를 하였다. 캠퍼스 투어 때 학교 건물을 빙빙 돌며 술 잘 먹고 끼를 부리던 나의 모습(당시에 와우순례라며, 학교 각 스팟을 돌며 FM 소개와 선후배 자기소개를 하던 행사를 했었다)에 선배들이 같이 일할 사람으로 나를 택했던 것 같다. 사실 학교 임원을 줄곧 해왔던 성격이라 대학와서 감투 하나 껴보고 싶기도 했다. 학교 OT에서 잘 까분 덕분인지 장기자랑에서 단과대학 1등도 하고 입학 당시에는 재미있었다. 미디어로 본 대학생활이 다가오는 듯싶었다.
실상 '1학년 과 대표로서의 학교 생활'은 내 기억에서 좋지는 못하다. 내가 입학한 학과의 특수성에서 기인했는데 내가 입학한 학과는 토목공학과와 도시공학과를 선택할 수 있는 학부제를 채택하였고, 당시에는 양 학과 학생회의 기싸움이 심했다. 20살의 나는 양 학과에서 비위를 모두 맞춰야 했던 상황이었다. 20살이 무엇을 알고, 이 20살한테 이리저리 말을 거는 23살에서 25살이 무엇을 알고 그랬겠냐만은 당시 느꼈던 경험은 꽤나 신선했으나 되돌아보면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과 대표는 당시 모든 행사에 필참이었다. 필참까지는 좋은데 뒤풀이 술자리에서 뺄 수 없던 분위기였다. 나의 집부터 학교까지 거리는 편도 1시간 30분이 걸렸고, 11시면은 우리 집으로 가는 열차가 끊겼다. 집에서 쉬고 싶은데 울며 겨자 먹기로 학교 앞에서 밤을 새웠었던 기억이 났다.
같이 술을 마시는 사람이라도 좋으면 밤새는 것이 좋았겠지만 당시 학생회에는 특유의 수직적인 분위기가 존재했었다. 술자리에는 동기도 없었고 학생회 사람들도 술 한 번 마시면 끝까지(물론 나의 윗세대 때는 더 했을 것이다)남아있었다. 물론 지금이야 많이 사라진 문화지만 이렇게 된 계기도 내가 학년이 올라가고 SNS를 통한 고발, 제보 문화가 발달하면서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예나 지금이나 내부고발은 참 쉽지 않다. 더 자세히 파고들자면 코로나-19의 확산으로 학생문화가 많이 없어지기도 했고, 17~18년 이후에 학생활동을 하던 세대가 대체로 선진병영 이후에 군 생활(14년 이후)을 한 것도 없지 않아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당시 갔던 술자리에서는 선배 이름 모두 외우기, 전화번호 물을 때마다 술 한 잔 씩 마시기, 과대주 마시기 등 이제 보면 군대에서 잔존하던 부조리가 학생회까지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그들에게 나는 군대 문화에 잘 적응할 줄 아는 이병을 뽑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학년 과 대표의 길은 정말 멀고도 험했다. 생각해보면 회사에서도 이렇게 술자리를 가지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회상하는데 이때는 술이 싫었다. 물론 지금도 자주는 안 마신다. 한창 술 찾아다닐 입학 초에 과 동기, 고등학교 친구들과의 술자리도 기피할 정도였으니 나름의 PTSD가 생긴 듯싶었다. 한편으로는 (내 시선에서) 미래 생각이 없이 놀기만 하는 선배들의 모습을 보고 자괴감이 들어 재수 생각도 들었지만 다른 대학을 다니는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 학교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이 학교를 일단 열심히 다녀야지.'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된 듯싶다.
막상 배우고자 하니 진로에 대해 잘 몰랐다. 주변 어른들은 토목과 도시는 '노가다 하는 학문'이라며 멸시했고, 다 닦인 도시와 도로를 보여주며 이제 내가 할 일은 없다며 나에게 한 소리씩 했다. 어른들의 말을 듣고 갈팡질팡 하던 차에 공교롭게 미국에서 공무원을 하는 큰아버지께서 잠시 한국을 들르셨다. 당신은 관악에 있는 S대에서 토목공학 석박사를 전공하고, 미국 캘리포니아의 공기업 직원으로 재직하다 공무원으로 이직을 하신 분이었다. 내 학교 토목공학 노교수와는 같은 대학 초빙 교수(visiting professor)로 인연이 있기도 하여 조금은 신기했다. 조카가 비슷한 전공을 가서 반가운 마음이 있으셨는지 도시와 토목에 대한 세부 전공에 대해 몇 가지 설명해주시고 가셨다.
큰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나는 환경공학(토목)과 교통공학(도시)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기로 결정했다. 환경공학은 당시 대학입시에서 내가 '마음을 넓혀' 지원하려던 전공 중 하나였다. 교통공학은 큰아버지가 미국에서는 유망한 분야라고 언급하기도 했으며, 내 스스로도 내가 사는 집에서 버스랑 전철이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해 전공 배워서 바꿔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전공에 대한 두루뭉술한 생각 이후에는 남들과 비슷했던 것 같다. 우선 첫 아르바이트를 이때 시작했다. 재택 아르바이트와 막노동을 동시에 했는데 입시 전문 커뮤니티에서 내 강점인 지구과학과 역사 지식을 살려 모의고사 문제집을 만들고 돈을 받는 일을 하기도 했고, 친구 어머님의 도움을 받아 건설현장에서 주차관리, 신축 아파트 안전 점검을 수행하기도 했다.
1학년 때 제일 길게 한 아르바이트는 건설 중인 아파트의 붙박이장을 만드는 작업이었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안전모와 안전화를 착용하고 포대 당 5kg짜리 선반용 못(우리끼리는 다보라고 불렀다)과 고무망치, 환기 캡을 손에 지며 각 집을 돌았었다. 돈 벌기는 여간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이때 깨달았다. 그럼에도 내 전공과 관련 있는 작업 공간에서 일을 한다는 점은 되게 매력적이었다. 이 일이 없었다면 현장 노동자들의 작업 환경, 일과에서 생기는 고충을 느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후에는 선배들도 시험과 취업준비로 바쁘다보니 나를 찾는 빈도가 줄었다. 물론 내가 피해다닌 것도 어느 정도 이유가 된 것 같다. 심심하니까 자연스레 동기들을 찾게 되었고, 동기들과 놀다 동기 자취방에서 자고, 피시방과 당구장, 노가리집에서 밤을 지새우며, 밴드 소모임과 봉사동아리 활동을 함께하며 MT 가고 놀러 가는 일상을 보냈다.
나의 4년(군대 포함 6년) 대학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학년 때는 나처럼 고민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다. "산업계에서는 이 업종이 취업 안 된다던데.", "전공이 나랑 안 맞을 것 같은데.", "사람들이 별로인데 대학생활 할 수 있을까." 등의 고민이 1학년 때 드는 것은 사실이다. 이럴수록 1학년 때 다양한 활동이나 여러 사람을 만나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요즘에는 코로나-19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선후배를 만날 수밖에 없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튜브로 온라인으로 정보를 찾는 분들께 나도 정보의 물결을 타고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떤 마인드를 가져야 할지, 무슨 활동을 해야 할지 제안을 해보고자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챕터에 이어서 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