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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승 Jan 19. 2024

<파주>

Paju, 2009

“너 왜 그랬니?”

  

이 영화를 관통하는 대사가 아닐까 싶다. “너 왜 그랬니?” 진위여부를 알고 싶어 하는 그였지만 자욱한 안개로 뒤덮인 파주라는 공간 그 자체처럼 진위를 감추고 퇴장한 중식(이선균)의 물음이다. 영화가 끝났는데 그 안에서 인물이 전하고자 하는 말은 끝나지 못했다. 중식 스스로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감추고자 했고, 그 배경은 안개로 뒤덮여 역시 불분명하다. 그런 와중, 영화가 의도적으로 선명하게 표현하는 것도 있다.


아마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배 중인 것으로 보이는 중식은 구속 중인 운동권 선배의 집에 선배의 여자 친구 자영(김보경)과 지내고 있다. 중식은 안고 있던 자영의 아기를 보행기에 앉혀뒀고, 자영은 젖병을 소독하기 위해 냄비에 물을 끓이던 참이었다. 의지할 곳 없이 세상에 둘 뿐인 상황에서 둘은 껴안는다. 중식과 그녀가 섹스를 하는 사이 사고는 발생하고 어린아이가 화상을 입는다. 자욱한 안개에 덮여 실체가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이 영화가 아이가 화상을 입는 장면(물론 CG다)은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중식은 도망치듯 파주로 향한다. 그곳에서 은수(심이영)를 만나 결혼하지만 3개월이 넘도록 은수와 섹스하지 않는다. 섹스를 하다 발생한 트라우마 같은 것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새벽 술에 취해 은수와 섹스를 하다 그녀의 등에 있는 화상 흉터를 보게 되고 그것에 입을 맞추며 “용서해 주세요”라 말한다. 오밤중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주황빛의 가로등은 마치 그 흉터를 중식에게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기라도 하듯 은수의 흉터를 비춘다. 하지만 얼마 뒤, 그녀는 가스 폭발 사고로 인해 죽는다. 소방수들이 화재를 다 진압한 후인데 굳이 검게 탄 은수의 시체가 그대로 남아 있는다. 도망치듯 자영을 떠나왔는데, 어느 날 중식의 앞에 나타난 그녀는 화상 치료를 잘 받고 있는 아이의 사진을 중식에게 건넨다. 영화는 또 굳이 그 사진을 클로즈업한다.

  

따지고 보면, 앞서 언급한 사건들 모두 중식에게 대단히 큰 책임이 있는 건 아니다. 자영의 아이도 온전히 중식의 부주의로 인한 것이 아니었고, 은수의 등에 난 흉터도, 가스 폭발도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영화의 ‘현재’에 해당하는 시기엔 자신의 집도 아닌데 철거민 투쟁을 하고, 심지어 철거민대책위원회의 위원장을 하고 있다. 은수가 죽고 중식과 함께 지내던 은모(서우)는 도대체 왜 아무 관련 없는 투쟁을 하냐고 묻자, “글쎄. 처음엔 멋져 보여서 한 것 같고, 그다음엔 내가 갚을 게 많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잘 모르겠네. 그냥, 늘 할 일이 생기는 것 같아. 끝이 안 나”라고 답한다. 중식은 굳이 자기 자신을 트라우마로 밀어 넣는다.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다. 중식 같은 사람이 없으리란 법은 없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야기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쩌면 친절하게도, “8년 전”, “3년 전” 같은 문구가 삽입돼 있으나 그것은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킨다. 2009년도에 개봉한 이 영화는 구체적인 배경을 설정하지 않고 있다. 영화에서 처음 언급되는 8년 전을 기준으로 보면, 국가보안법이나 운동권 수배자 등이 언급되는 상황을 개봉 시점으로부터 8년 전쯤인 2000년대 초로 보긴 어렵다. 못해도 1987년 전이겠다 싶은데 다시, 3년 전(그로부터 5년 후)으로 표기된 상황을 보면 중식이 핸드폰을 샀는데 1989년 출시된 모토로라 Microtac 제품으로 보인다. 물론 최신 기종이 아니라 출시 후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였을 수도 있지만 이 두 시기는 서로 맞지 않는다. 어딘가 모호한 장면들은 은모가 등장하는 장면과 대조적이다.


중식이 핸드폰을 구입한 장면만 하더라도, 은모가 핸드폰 같은 거 싫어하지 않았었냐고 물을 때 화면의 포커스는 은모에게만 맞춰져 있고 중식의 모습은 흐릿하다. 중식과 은모의 삶에 갑자기 자영이 나타났을 때에도, 카메라는 방 안의 중식과 자영의 모습을 엿보거나 엿듣는 은모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중식을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는데, 어느 순간 그 주도권이 은모에게 넘어갔음을 느낄 수 있다.



은모의 입장에서 영화에서 처음 펼쳐진 사건은 공부방 선생님을 하고 있는 중식에게 은모와 학생들이 스승의 날을 맞아 장난이랍시고 자영의 모습을 하고 “사랑해요, 중식 씨.”라 말하는 장면이다. 중식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이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싶게끔 소스라치게 놀라고, 이후 은모에게 묻는다. “왜 그랬니?” 은모는 울먹이며 “우리 언니 건드리지 마. 그냥 내버려 두란 말이야.”라고 소리치며 뛰쳐나간다. 은수는 중식에게 다가와 품에 안는다. 어딘가 빈칸이 뚫려있는 이야기는 얼마 후 3년 전 시점에서 “그때, 3년 전에 왜 그랬니?”라 묻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두려워서요.”

“뭐가?”

“혼자 못 살아간다는 게요.”

“지금은 어떤데?”


은모는 이제 막 돌아왔기에 아직 답을 할 수 없다. 하지만 고민할 틈도 없이 죽은 언니의 보험금 문제가 닥친다. 생존이 걸린 철거 현장에서 은모는 대답할 여유를 부여받지 못하고 시간은 흘러만 간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는 이는 계속해서 머리를 굴린다. 8년 전과 3년 전에 왜 그랬냐는 물음에는 둘 사이에 무언가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다시, 짐작만 하게 할 뿐 영화에서 무언갈 보여준 적은 없었다.


보여준 것을 굳이 찾자면 은모가 다시 파주로 돌아올 때 택시에 합승했던 나이트클럽 사장(이경영)이 있다. 그는 영화 안에서 단 한 단어도 입 밖으로 내지 않지만 그 존재감은 누구 못지않다. 사장과 중식은 서로 반대되는 지점에 있다. 사장은 나이트클럽만이 아니라 지역 재개발에도 가담하고 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철거 투쟁 중인 중식의 현장이다. 사장은 집을 철거하려 한다. 다시, 중식이 투쟁 중인 아파트는 그가 거주하는 집은 아닌데, 은모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려준 집, 그러니까 은모가 떠나간 사이 중식이 지켜왔던 집까지 재개발 구역에 포함돼 있다. 아파트와 달리 이 집은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겠다. 영화가 별로 보여줄 생각이 없다. 마치 중식처럼.


어느 순간 은모에게 그 집은 중식과 동일시돼 있다. 사장은 부하를 시켜 은모에게 협박을 한다. 재개발 구역에 포함된 그 집을 내놓거나, 중식이 철거위원장을 포기하게끔 하라고. 사실 은모가 순순히 집을 내놓는 선택을 한다 하더라도 중식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 아버지가 물려준 집, 집과 중식은 어느새 동일시된다. 은모에게 중식은 연인의 대상이라기 보단 처음부터 그런 존재였다. 선생님이었고, 형부였고, 다른 여자(자영)가 있는 사람이었다. 다시, 혼자 살아가지 못한다는 은모의 말은 무엇을 뜻할까. 박찬옥 감독은 인터뷰에서 “혼자 살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것 같다. 중식과 3년을 같이 살면서 점점 그에게 길들여졌다. 그 사람이 없으면 못 살 것 같다고 느낀다는 것 자체가 겁이 난 것이다. 사랑을 하게 되면 '너 없이 못 살아'라는 감정과 '갑자기 내가 왜 이렇게 달라지는 거지'라는 두 가지 감정이 공존한다. 누구를 좋아하면 정말 강해지는 걸까, 아니면 약해지는 걸까. 잘 모르겠다.”라고 했다.


8년이란 긴 시간은 누군가와 지대한 영향을 주고받기에 차고 넘치는 시간이다. 돌이켜보면 은모와 중식 사이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흔히 어린 여학생에게 반듯한 선생님은 흠모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은수가 죽은 후 둘은 오래간 같이 살았다. 집에선 은수가 앉았어야 할 혹은 자영이 앉았던 자리를 장시간 은모가 차지했었다. 은수와 함께 하려던 노변의 커피 장사에서 역시 은수가 있었어야 할 자리에 은모가 있었다. 택시기사의 느닷없는 성적인 농담으로 형성된 나이트 사장과의 관계는 이미 오래전 시장에서 은모의 75A사이즈 브래지어를 산 날 공부방의 받아쓰기 시험에서 공교롭게도 “1등, 75점.”이라 말하는 중식이 그 자리에 있었다. 둘 사이에 어떠한 금기도 없는 <블루 라군>(1980) 같은 상태였다면, 이 이야기의 묘한 긴장감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긴 시간 동안 둘 사이엔 넘을 수 없는 거리가 계속해서 존재해 왔다. 중식이 마침내 “난 한 번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라 고백하고 키스했을 때, 은모는 그를 감방으로 밀어낸다.



굳이 은수의 죽음이 은모의 어떤 행동 때문이었음을 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중식은 은모에게 끝까지 그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어린 은모가 일부러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혹은 자신에 대한 욕망 때문에 그러했다는 생각 때문에. 은모가 은수의 죽음과 보험금에 대해 가스 폭발 사고를 알게 됐지만, 중식은 은모가 어디까지 알게 됐는지 모른다. 자신에게도 신혼에 아내의 죽음을 상기하는 게 달갑진 않았기에 뺑소니라고 둘러대지만 이것이 오히려 화근이 된다. 중식은 난데없이 보험사기라는 죄로 감옥에 갔지만 구태여 죄를 부정하지 않는다. 중식을 감옥에 가게하고 은모는 다시 파주를 떠난다. 그런데 그 길에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나이트 사장과 재회한다. 혼자 못 살아간다는 게 두렵다던 은모는 그야말로 혼자가 됐다. 서늘한 음악이 흐르니 무언가 잘못됐다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두 시간 남짓 어떤 이야기를 봤고 나름대로 흐름도 인지했는데 사실 이야기가 끝난 것 같진 않다. 중식은 어쨌든 형을 살고 출소할 것이다. 어쩌면 또 8년이 흐른 뒤일 수도 있다. 혹시나 둘이 재회하게 된다면 중식은 또 물을 것이다. ‘그때 왜 그랬니?’ 그땐 은모가 무어라 답할까. 이제 20대 후반의 나이가 된 그녀는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끝까지 은모를 감싸고자 했던 중식은 마침내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됐을까. 이젠 은수도 자신도 없는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은모가 걱정되지 않을까. 어떤 식으로든 늘 할 일이 생길 텐데, 끝이 안 날 텐데 말이다. <파주>의 중식을 보며 연민 같은 것이 느껴진다면 그건 형부와 처제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이 아닐 것이다. “성경에도 99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1마리의 양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며 그 모든 죄를 홀로 뒤집어쓰고 어린양에게 그것이 전이되지 않게 발버둥 치는 모습 때문일 것이다. 수배가 끝나서 서울이든 어디든 갈 수 있는데 굳이 파주에 머물며, 굳이 자신의 집도 아닌데 철거 투쟁을 하며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는데도 그에겐 편안함이, 안식이 주어지지 않는다.


<나의 아저씨>(2018)의 박동훈(이선균)과 이지안(아이유)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서로가 평안에 이르길 바라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얼마간 시간이 걸렸더라도 끝내 웃으며 손을 맞잡을 수 있는 것과는 다르다. 배우 이선균의 마지막은 중식 같다.


#파주 #이선균 #서우 #김보경 #심이영 #한예리 #박찬옥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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