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뜨겁다. 나는 요즘 해가 무섭다. 감당할 수 없게 우리를 내리쬔다. 집에서 까페까지 걷는 데도 재해 수준의 뜨거움이다. 근데 다 우리 탓이라서 벌을 받는 심정으로 햇빛을 맞는다. 에어컨이 시원한 까페에 도착하면 새로이 생기는 죄책감. 에어컨을 끌 수는 없는데 에어컨은 실시간으로 기후변화의 요인을 누적시킨다. 그러나 그 죄책감을 어떻게 현실 세계에서 행해야할지 모르겠다.
온갖 사회적 정치적 핍박 속에서도 “그렇게나마” 환경문제로 뛰어드는 분들은 개인적으로 존경하지만, 그 운동을 이끄는 사고 방식 또한 이 뜨거움을 만든 시스템의 한계 내에 머무는 것 같다. 문제에 급히 뛰어들어 인간의 지식으로 분석하고 틀어쥐고, 해결책을 당장 내놓으려는 시도는 인간이 근대 이후 자연에게 저질러온 실수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이거라도 하자”라고 자위하면서 진짜 해결책을 맞딱뜨릴 용기가 없는 걸 수도 있고.
기후문제, 탈자본주의, 탈인본주의.
이것저것 읽다가, 생각해 본다. 아주 어렴풋하지만.
효율적이지 말 것.
이분법적이지 말 것.
평균적이지 말 것.
안정감과 확신을 갖지 말 것.
인과관계를 찾으려 하지 말것 (우리는 세계를 파악할 능력이 없다. 우리가 내놓은 인과 관계는 대부분 틀리다는 걸 인정한다)
도덕적으로 내가 올바르다고 느끼지 말 것.
답을 안다고 생각하지 말 것.
명백하지 말 것.
불안해할 것. 불안을 해결하려 하지 말 것.
불안과 의문들을 해결하고 편평하게 만들려는 시도에 우리는 지나치게 공을 들여온 것 아닐까? 수백년 동안. 한치의 물러섬 없이.
사실지구라는 물리적 환경과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종의 관계에 그 불안은 내재할 수 밖에 없음을 받아안지 않고 그걸 문질러 없애려고 했던 근대 이후의 노력.
그 결과는 더 큰 불안의 도래. 종의 몰락.
그냥 지렁이처럼, 평야의 사자처럼, 지나가는 모기처럼
인간이 특별하지 않다는 걸 이해하기.
우리의 때가 되면 조용히 죽을 각오가 필요한지도.
그 정도의 존재론적 전환이 아니고는 환경 문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조차 없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