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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카엘라 Jun 21. 2017

잊히지 않는 말들 [1]

낯선 캐네디언이 랜덤 하게 건넨, 그러나 내게는 뇌리에 박힌 한마디

  문장 하나가 갖는 영향력은 생각보다 위대하다. 한 문장 속에는 이야기가 녹아있겠지만, 그 숨겨진 이야기를 아울러 뇌리에 박히게 하는 결정적인 한마디가 있다. 잊히지 않는 한마디.


  저마다 '인생 문장'이라는 것이 있을 것이다. 본인이 살아가며 고심하여, 야심 차게 만든 좌우명일 수도 있고, 성경 구절일 수도 있고, 위인이 남긴 대단한 명언일 수도 있다. 그 '인생 문장'은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에 위로가 될 수도 있고, 목표를 이루기까지 채찍질하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나의 '인생 문장'들은 명언도, 좌우명도 아니다. 일면식도 없는 낯선 누군가가 거리에서 혹은 일터에서  내게 건넨 말들, 캐나다 일상의 소소한 장면 속에서 내가 주운 말들,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가 않고 여태 문득 떠오르는 말들이다.


"Don't let him ruin your day."

  석사 과정을 마치고 글로벌 의류 기업의 캐나다 지부에서 일을 시작했다. 직원 교육, 고객 만족, 전반적인 매장의 원활한 운영을 지원하는 영업관리직이었다. 전 세계 1500여 개 이상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대기업의 첫 캐나다 시장 진출이었고, 나는 오프닝 멤버 중 한 사람이었다. 본사에서 파견된 고위 직원들이 직접 트레이닝을 해주면서 상당히 보수적인, 구시대적이고도 동양적인 고객 서비스 마인드--이를 테면 '고객이 왕이다' 같은 개념--를 첫날부터 세뇌시켰다. 캐나다 시장에서의 첫인상이 매우 중요하니 한 명 한 명, 모든 고객이 최고로 행복한 매장 경험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상부에서 내려온 운영방침이었다. 팀을 리드하면서, 캐셔에서 해결되지 않는, 세칭 '진상 손님'들과의 독대는 내 차지였다. 어느 곳에나 어디에서나 진상 손님은 있기 마련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고, 이상한 사람들도 많다. 대도시에는 더 많고, 손님 혹은 고객 중에는 더 더 많다. 그 온갖 이상한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어주고 달래고 얼러 행복하게 매장을 떠나게 하는 것이 내가 맡은 여러 업무 중 하나였다. 오피스에서 업무계획서를 작성하다가도, 무전기로 호출이 오면 캐셔로 달려 나왔다. 캐셔 선에서 끝나지 않고 담당자를 찾아 토로하는 불만들은 보통 매장 정책에 어긋나거나, 그 정책을 알지만 모른 체 하고 싶은 화가 잔뜩 난 사람들로부터다. 이를 테면, 교환 가능 기간이 한참 지나 지금은 매장에 없는 상품을 들고 와 교환해 달라거나, 영수증도 없고 지불한 방법도 까먹었지만 환불을 해달 라거나, 몇 시간 며칠밖에 입지 않았으니 환불을 해달 라거나, 전혀 다른 사업체인 타 국가에서 구입한 같은 브랜드 옷을 들고 와 환불을 해달라 등등.. 성난 마음을 풀어주려고 여러 문장들로 설명해 보지만 결국 내 말의 핵심은 "안됩니다"였다. 그 안된다는 한마디를 20분 동안 해서 마음을 누그러뜨려 주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일상이 반복되면서 고객 컴플레인도 반복되고, 응대하는 것에 무뎌지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날과 같이 한 아저씨 고객에게 불만 처리를 해주고 영수증을 건네주는데, 화가 난 아저씨는 괜히 내가 영수증에 스테이플러 찍은 방식에 호통을 치며 화를 냈다. 말 그대로 화풀이였지만, 내가 할 수 있던 말은 '미친놈이 괜히 지랄이야'가 아니라 "Sorry about that."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옆 캐셔에서 계산을 하던 젊은 남자가 그 아저씨에게 왜 별 일 아닌 것으로 그러느냐, 소리 칠 일도 아니라며 언성을 높여주었다. 내 편을 들어준 것만도 고마운데, 그 아저씨가 떠나고 나서 그 남자는 나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Don't let him ruin your day"--저 사람 때문에 네 하루를 망치지 마.


  '이상한 사람 때문에 남은 하루를 기분 망친 채로 보내지 말라, 너는 네 할 일을 잘 하고 있을 뿐이다'하고 인정해주는 듯했다. 그 말 한마디가 하루 종일 얼마나 맴돌았는지 모른다. 억울해서 속으로는 눈물이 왈칵 이었지만, 직원들 앞에서 태연하고 씩씩하게 하루를 잘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 한마디 덕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내가 사소한 일로 인해 기분 상하려 할 때마다 저 한마디가 떠오른다. '그래, 내가 별거 아닌 일로 내 소중한 하루를 망칠 수 없지.'하고 말이다.


  그 한마디로 나는 오지랖이라는 게 이렇게 따뜻하고 고마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국에서 오지랖이 넓다, 남 일에 관심이 많다,라고 하면 보통 부정적인 뉘앙스로 해석되는데 말이다.


 몇 년 전 엄마랑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던 중에 내 바로 옆에서 한 젊은 여자가 아주머니 직원 분에게 찾던 색과 다른 색을 가져왔다는 시답잖은 이유로 지나가던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만큼 언성을 높였던 일이 떠올랐다. 마음이 좋지 않았고, 그르다고 생각했지만, 그 아주머니를 통해 계산을 하고 나오면서 엄마에게 "저 여자 너무 한다."라고 말을 한 것뿐, 정작 나는 그 상황 속에서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아주머니도 댁에서는 세상 전부와도 같은 딸일 것이고 어머니일 것인데. 내가 그 캐네디언처럼 "괜하게 화를 내는 사람이네요. 잊어버리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고 말 한마디를 건네고 나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그가 남긴 한마디에, 방관자가 아닌 따뜻한 오지라퍼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실천으로, 또 의류 유통 서비스직 종사자들을 위한 시스템 연구를 통해.


"I love your dress! Nice colour!"

  또 다른 따뜻한 오지라퍼가 남긴 말이다. 길고 긴 겨울이 가고 드디어 여름이 찾아왔던 2013년 토론토였다. 친구도 가족도 없던 곳에서 예쁘게 옷을 입고 외출을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오랜만에 기분을 내려 쨍한 네온 연두색과 진한 회색 조합의 레이어링 맥시드레스를 입고 사뿐하게 길을 나섰다. 갈 데가 마땅히 없었던 나는 괜히 마트를 들러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집에 돌아오는데, 횡단보도를 지나면서 서로 마주 보고 걸어오던 한 여자가 서로를 지나칠 때쯤, "세상에, 옷 진짜 예쁘다! 색깔도 정말 예뻐!" 하고 특유의 유쾌한 목소리로 내게 칭찬을 건네고 아무 일이 없던 듯 가던 길을 갔다. 전혀 모르는 행인 1에게 듣는 칭찬은 좀 색달랐다. 여태 살아온 환경에서는 그런 일도 없었고, 한국에서 내가 들었던 여느 칭찬들은 보통 인사치레라고 느꼈던 것 같다. 마음에 얼마나 여유가 있으면 일면식도 없는 모르는 사람에게 고것 참 예쁘다고 이야기를 건넬 수 있는 걸까. 대도시는 어디인들 똑같은 각박한 곳이라고 생각했건만, 토론토는 조금 달랐다.


자유로이,

풍부하고 다채롭게,

자기 생각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들 덕에 일상 속에서 더 자주 낭만을 그리고 여유를 느꼈던 것이다.


  전혀 모르는 타인에게 칭찬 건네기.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커피를 사고 잔돈을 받으면서 종업원에게 "love your nail colour!" 오늘 첫 출근을 한 새로운 동료에게 "Wow, you're a quick learner!." 나랑 같은 가방을 매고 있는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낯선 이에게 "Nice bag!"하고 너스레를 떨게 되었다. 내 삶이 이전보다 더 풍성해진 느낌이었다.


  우리 엄마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캐나다 출신 연예인 헨리를 참 좋아한다. 티브이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의 여러 편 중에 헨리편을 가장 좋아하신다. "엄마는 헨리가 왜 좋아?"하고 물었더니 "귀엽잖아, 해맑고. 기분 좋은 느낌과 에너지를 옆 사람한테 주고."라고 하셨다. 재방송을 함께 보니, 엄마가 '엄마 미소'를 짓는 장면들은 거진 헨리가 너스레를 떠는 장면들이다. 모르는 동네 아저씨에게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기도 하고, 스키장에서 만난 꼬마에게 "넌 뭐먹을꺼야? 뭐가 맛있을까 여기?"하고 친구인양 이야기한다. 보통의 한국인들은 속으로 생각하고 마는 것들을 밖으로 꺼내고 표현한다. 그런 헨리를 보고 우리는 웃음이 빵 터지기도 하고,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한다. 당장에 대한민국 사람들이 모두 헨리가 될 수는 없겠지만, 조금씩이라도 경계를 허물고 타인에게 친근하게 이야기하고 미소지어주는 그런 문화로 변한다면 참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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