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카엘라 Jul 07. 2017

Natural =/= Beautiful?

미의 기준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

https://www.ted.com/talks/cheyenne_cochrane_a_celebration_of_natural_hair

  지루한 출퇴근길에 TED talks를 본다. 어제 우연히 보게 된 한 클립이 여태 시청한 것들 중에 내게 큰 영감을 주기로 손꼽힌 하나이기에 공유하려 글을 쓴다. 강연자 Cheyenne는 흑인 여성으로서 그녀가 가진 자연 상태의 헤어를 주제로 했다. 흑인의 내추럴 헤어는 자연히 곱슬이 심한데, 이들은 보통 어렸을 때부터 길게 광채가 흐르며 주욱 펴진 스트레이트 헤어를 위해 수많은 횟수의 화학적/물리적 변형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관찰로는 미국 사회에서 성공한 여성들의 대부분 역시 일관되게 스트레잇 헤어를 지향함을 발견했다.


  그런데 '왜 이들은 화학약품의 사용으로부터 오는 리스크를 감수하고도 straight 헤어스타일을 선택하느냐?'가 강연자가 던진 질문이다. 우리가 은연중에 straight헤어를 dreadlock이나 afrocentric헤어보다 부, 성공, 지성, 아름다움과 같은 단어들에 더 연관 지어 생각하기 때문은 아니냐 하는 질문을 덧붙였다. 그 문화적으로 구조화된, 현존하는 미의 기준에 대한 재고의 필요성을 시사했다. 또한 미의 기준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이 본인의 내추럴 헤어를 사랑하고 선택한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박수를 건네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이 사소한 선택은 단지 '헤어스타일의 선택'에 그치기보다 더 큰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석사 기간 동안 많은 페이퍼를 썼지만 나는 여러 번 Cheyenne가 던진 질문과 비슷한 류의 질문을 주제로 했었다.


?

스키니 진이 과연 여성에게 입혀졌을 때에 더욱 아름다우냐. 자연 상태의 편안한 다리를 옥죄여 길고 늘씬한 다리라는 현대의 미의 기준을 쫓아가기 위해 우리는 현대적인 코르셋을 재생산한 것은 아니냐. 또는 그런 스키니진을 입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고 다리에 시술을 하는 비정상적인 행태 역시 생산하고 있지는 않느냐.

임은혁. (2011) "패션에 나타난 몸의 이상화 : 외면화된 코르셋으로서의 스키니 진을 중심으로", 한국의류학회지, 35(10), pp. 1215-1227.


?

여성은 화장을 반드시 해야 하냐. 미국의 한 여성 근로자가 근무하는 카지노에서 회사 규율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당해고당했다. 상세 규율 내용은 여성근로자는 근무 시에 풀메이크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성은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대거 로펌을 낀 회사에 법정에서 패배했다. 이 판례는 과연 올바르게 내려졌는가. 


?

화장을 하면서 보다 크고 또렷한 눈, 높은 코, 도톰한 입술을 창조해 내는데, 그렇다면 이 '또렷한 큰 눈, 오뚝한 코와 볼륨 있는 입술' = '아름답다'라는 이 생각은 누가 정했느냐.


Good/Bad, Beautiful/Ugly, Normal/Strange 등 이분법으로 나뉘는 수많은 미적 기준에 대한 담론 혹은 풀리지 않는 질문들은 이외에도 많다. 여성은 외출 시 브래지어를 꼭 해야 하는가. 얇은 허리와 볼륨 있는 가슴, 엉덩이 꼭 아름다운 것이냐. 젊음을 상징하는 탱탱한 피부가 과연 더 나이 든 피부보다 아름다우냐. 제모를 한 매끄러운 몸이 하지 않은 것 보다 시각적으로 과연 더 보기 좋은 것이냐. 작은 얼굴이 큰 얼굴보다 예쁜 것이냐. 사이즈, 연령, 피부색, 이목구비의 형태, 착장 스타일에 있어서 우리는 상당히 획일적인 잦대를 들이민다.    


이 시스템 뒤에는 백인우월주의가 숨어있을 수도 있고, 남성주의가 숨어있을 수도 있고, 황금비율이론이 있을 수도 있고, 미디어의 무책임함이 있을 수도 있다. 혹은 비슷하고 싶어 하면서도 다르고 싶어 하는 욕구나 Unattainable한 것에 대한 갈망 같은 인간의 본능, 본성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학문적으로 접근하여 이견을 충돌케 하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또 내가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어서, 그 답이 나와 세상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역할을 공고히 하고 있어서 이런 글을 쓴 것도 아니다.


나 또한 이리저리 휘청거리며 중심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중 하나지만, 다만, 우리가 같이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전통적인 미의 기준에 대해, 그 시스템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follower가 되기보다는 '비판적으로' 다시 바라보자는 것이다.


미의 기준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정한다. 세상이 정한 기준에 나를 맞추기 위해 오늘도 당신은 당신을 정신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당신을 통제 혹은 학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건강한 몸을 위한 운동이 아닌 마른 몸을 위한 식이요법, 나이를 거스르기 위한 피부관리, 옆구리 살을 없애기 위해 하는 경락마사지, 통풍이 잘 되는 시원한 옷이 인체 생리 측면에서 더 건강한 데도 압박하는 타이트한 옷을 선택하는 것 등. 스스로 주관적인 압박을 주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자. 수많은 코르셋들에 우리는 아직도 스스로를 맞추려 구겨 넣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자. 내가 지금 아름답다고 생각해 쫓고 있는 것이, 혹은 내가 남들에게 강요하는 미의 기준이 과연 진정으로 내가 생각하기에 아름답고 편안한 것인지 같이 잘 고민해보자.  


읽어볼만 한 것들

Foucault - Docile Bodies

Kant - Idealism 보는 자와 보이는 자





작가의 이전글 잊히지 않는 말들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