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요의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와 이옥섭의 <메기>를 함께 읽고 쓴 글
저는 이 책을 기후위기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모두의 문제여서 누구의 문제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범분야 이슈. ‘환경’ 섹션으로만 다루어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현 인류 앞에 놓인 가장 전지구적인 문제.
기후위기가 단일한 얼굴로 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는 인권 문제이기도 합니다. 폭염에 냉방기를 마음대로 틀 수 있는 이와 법을 어겨가며 땡볕에서 일해야 하는 이의 재난은 서로 다르니까요. 지금껏 누려왔던 선진국들은 허울좋게 탄소제로를 외칠 수 있지만, 그들의 발전에 불쏘시개가 돼왔던 개발도상국의 억울한 비명이 들립니다. 또, 탄소자본주의에 익숙해져 포기할 생각이 없는 현세대에게 죄없는 다음세대들이 분노하고 기후 소송을 거는, 불공정 게임이지요.
수레바퀴 이후는 그런 현 상황에 대한 유토피아를 그립니다. 자본주의 폐기 논의가 이루어지고, 80억명 인구를 골고루 먹일 방법을 궁리하고, 난민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어느 도시에선 자동차 소유를 법적으로 금지하고, 채식을 권장하고, 정유사가 탈탄소 기술에 투자하죠. 말도 안되는 세계입니다. 한편, ‘지금 상황에서 이 정도는 해야 공정하다’고 알려주는 것 같기도 했어요.
묘하게도 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반응은, 지금과 닮아 있습니다.
“평생토록 해온(진리 탐구) 일이 사실 별로 의미가 없다면, 그보다는 낙후 지역에 전기 배선을 까는 일이 더 중요하다면, 제 삶은 뭐가 되는 걸까요?”(p115 수학자의 고민)
“지구 반대편에 사는 애들보다 제가 살 만한 건 맞는데. 내가 남 도울 입장도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도움을 받을 만한 상황도 아니고. 애매하게 끼어서. 저한테 열심히 살았다고 해 주는 사람도 없고.”(p123, 안티휠의 고민)
“말이 용서지 결국 멀쩡한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 참아주고 피해도 봐줘야 한다는 소리잖아요?(…) 그냥 어디 수용소 같은 걸 만들어서…”(p113 익명게시판의 불만)
수레바퀴 이후의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말에도, 불신이 깔려 있습니다. 타인에 대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신의 행동에 내릴 세상의 판단에 대한, 자기 자신에 대한. 영화 <메기>에 깔린 세상도 마찬가지죠. 어디든 도사리고 있는 불법촬영과 데이트폭력, 청년들의 실업문제, 무분별한 재개발과 주택문제,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불평등 문제 앞에 윤영을 비롯해 등장인물들은 계속해서 '믿을 수 있는가’ 묻고 있습니다. 인간 본성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사는 동안 행복하기를 바라는데, 행복의 핵심 요소는 예측 가능성인 것 같거든요. 예측불가해서 불안한 상태에서 안정된 행복감을 느끼기는 어려우니까요. 사람을 믿을 수 있다는 건 예측 가능해진다는 얘기고. 그러니까 우리가 계속해서 불신하고 의문을 갖는 건 결국 행복해지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겠어요.
다시 돌아와서,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정말 어려운 이유가 이 ‘불신’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분리배출 열심히 해봐야 다 모아서 버리던데.’, ‘작은 반도가 열심히 하면 뭐해, 중국이랑 미국에서 동참해야지.’, ‘개인이 텀블러 에코백 쓰면서 아껴봤자 한계가 있어 정부에서 탈탄소 정책 쓰는 수준 아니면 계란으로 바위치기야.’ 죄수의 딜레마 상황입니다. 서로가 상대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같이 협력하면 좋은 결과, 배신하면 나쁜 결과가 나온다고 가정해보면, 상대를 신뢰하지 않고 모두 자기만 살겠다는 선택을 하면 결국 모두에게 최악의 결과가 옵니다. 전세계가 단결해서 함께 감축하면 함께 살 수 있고, 자기만 살겠다고 저마다 국제적 약속을 깨면 다함께 죽는 게 기후위기입니다. 모르는 지구 반대편 누군가나 탐욕스러운 기업가, 제 이득만 챙기는 정치인 모두를 믿어야 한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지만, 그러지 않으면 다같이 망하게 생겼어요.
그래서 수레바퀴의 세계가 여러 부작용을 갖고 있더라도 더 정의롭고 우리 모두를 위한 세계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망하기 어렵게, 세상을 인위적으로 조정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만약 책 속 세계에 있었다면 누구보다 격렬한 안티휠이 되었을 것 같다는 게 제가 맞닥뜨린 아이러니였습니다. 수학자 P의 마음이 저와 비슷했어요. “세상이 더 좋은 곳이길 바라고, 좋은 쪽으로 바뀌고 있다는 게 안심되기도 하지만, 원인이 수레바퀴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언짢아집니다. 인류가 쌓아올린 지식의 탑에 조약돌 하나를 얹어놓은 데다가 주변 사람들에게도 잘 대해주었다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저한테는 천국보다도 지금의 삶이 더 소중하다고요.”(p117) 수레바퀴 이후의 세계를 갈망하지만, 그게 수레바퀴 덕분이라면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 겁니다. 인류가 무수한 피를 보고 희생을 감내하며 어렵게 일구어온 공공선의 세계는 외부에서 압박하는 도덕률:수레바퀴보다 훨씬 더 위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수레바퀴가 던진 화두가 이것이라고 봅니다. 수레바퀴 따위가 없어도, 너희는 공공선을 실천할 준비가 되었냐고, 공공선을 위한 행위가 무엇인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지 않느냐고. 내가 가진 모든 자원이 다 나만이 쌓아올린 게 아니라 어느 정도의 행운과 이전 세대, 부모세대의 덕, 혹은 미래세대에게서 빌려온 빚이었다는 걸 이해할 수 있다면, 기후위기를 차별적으로 경험하는 집단과 미래세대에 적선하듯 내것을 베푼다는 오만함 대신 겸허한 책임감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함께 해보면 어떻겠냐고. 구덩이에 빠져서는 이 구덩이가 누구 탓인가, 언제 배신당해 묻힐까 계산하느라 구덩이를 더 파는 대신, 그곳에서 얼른 빠져나올 궁리를 함께 할 때가 아닌가 하고.
수레바퀴가 엄정한 심판자 역할을 해서 서로의 눈치를 보며 억지 선행을 하는 세상보다, 서로가 기꺼이 서로를 돕고 응원하며 신뢰를 쌓는 세상에서 이곳을 어떻게 얼마나 더 낫게 만들 수 있는가를 스스로, 함께 고민하는 세상이 훨씬 아름다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다움이 자부심이 되는 공동체를 꾸리고 싶다, 거기에 열심으로 기여하는 개인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강하게 안기는 소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