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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DITOR Jan 07. 2020

[2018.11] 블록, 질문, 그리고 프로세스

What We're Reading #169

종종 오락실에 가면, 무조건 한 번은 거쳐 가는 게임이 있습니다. 제가 동전 하나로 가장 오래 버틸 자신이 있는 게임이자, 이니셜을 남기려고 승부욕을 불태우는 게임이죠. 이름하여, 테.트.리.스.


엄근진* 모드로 써 보자면, 테트리스를 할 때는 네 가지 요소가 중요합니다. 미세 조정을 할 수 있도록 숙달된 왼손, 빠른 블록 전환을 위해 리듬감 넘치게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오른손 검지, 대략적인 공간 구성을 파악할 수 있도록 내다보는 시야, 마지막으로 필요한 블록과 공간을 빠르고 정확하게 매치하는 판단력. 이 요소들이 잘 합쳐져야 가장 밑단부터 차근히 블록을 쌓고, 쌓인 블록도 한 줄씩 없앨 수 있습니다.

* 엄격, 근엄, 진지의 합성어


잘 쌓고, 잘 없앤 블록의 효과는 위기 상황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테트리스를 하다 보면 삐끗하여 엄한 곳에 블록을 놓고 탄식하는 순간이 꼭 오는데요. 이때 밑단 블록이 어떻게 쌓여 있느냐, 그리고 얼마나 침착함을 유지하며 블록을 없앨 수 있느냐가 판을 재정비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제게 있어 10월부터 시작된 2018년 4/4분기는 밑단 블록을 차근차근 쌓고 없애는 과정의 연속입니다. 끝도 없이 내려오는 갖가지 모양의 블록을 숙달됨과 리듬감, 시야와 판단력을 번갈아 가며 가능한 한 탄탄하게 쌓고 처리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달까요. 독자에게 '양질'의 콘텐츠가 '지속적'으로 다다르려면, 드러나지 않는 프로세스를 최대한 촘촘하게 설계하고 유연하게 실험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엄근진 모드로 체득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던지는 일부 질문은 이렇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의 콘텐츠를 만드는 데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주어진 시간 안에 간결하되 깊이 있는 협업을 경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인 작업을 위해 자료를 정비하고 체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서로 간 협의를 실무 과정에 적절히 반영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이 질문을 체득하기까지 여러 번 엄한 곳에 블록을 쌓았습니다. 다행히도 제게는 크고 작은 사이클을 함께 돌려주는, 거기서 새어 나오는 질문을 붙잡고 떠들 수 있는 동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최선의 해결책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기쁨을 발견할 때, 일의 보람을 느낍니다.


하나 더. 프로세스에 대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앞서 이 일을 해왔던 동료들에 대한 고마움도 생겼습니다. 제가 만나지 못했지만 PUBLY를 지나간, 또 함께 일했지만 현재는 다른 곳에 머무는, 그리고 여전히 이곳에서 함께하는 사람들 모두가 그 시기에 맞는 고민과 실행을 해주었기에 지금의 고민도 가능한 것이겠죠.


앞으로도 저는 수많은 블록을 계속 쌓고 없앨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숙달됨과 리듬감, 시야와 판단력도 더 좋아지지 않을까요. 테트리스 실력도 더 좋아질지 모르고요. 2018년 4/4분기가 끝날 즈음에는 엄근진 모드를 버리고 조금은 유쾌하게 오락실에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18년 11월 9일 금요일

진지하면서 유쾌하고 싶은, 박혜강 드림




PUBLY 팀이 보고 읽은 이번 주 콘텐츠


• (책) 어떻게 일할 것인가 책 정보 보기

창의성은 뛰어난 지능이 아니라 성격의 문제다. 실패를 인정하고 결점을 감추는 데 급급해하지 않는 태도, 그리고 변화하려는 의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새로운 사고는 실패를 찬찬히, 심지어 극단적으로 반추하여 새로운 해답을 찾으려는 지속적인 노력에서 나온다.

우리는 늘 손쉬운 해법만을 바란다. 일거에 문제를 해결할 간단한 변화 말이다. 그러나 인생에 그런 요행은 거의 없다. 오히려 성공은 백걸음을 가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똑바로 나아갈 때,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모두가 힘을 모을 때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의료 행위라고 하면 고독하면서 지적인 소임이라고 흔히들 생각한다. 그러나 제대로 된 의료란 까다로운 진단을 내리는 것이라기보다 모두가 손 씻기를 확실히 실천하는 것에 더 가깝다.


= 혜강: 이번 주 초, 팀 메신저에 '우리 팀 생각하며 줄 그은 구절들'이라는 메모와 함께 밑줄 담긴 책 사진 몇 장이 올라왔는데요. 미국의 외과의사이자 공중보건 정책가인 아툴 가완디가 의료 분야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일'을 바라본 관점을 담은 책이지만, 역시 본질은 통한다고 느끼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블록을 쌓고 없애면서 프로세스를 만들어 가는 과정 하나하나가 제게는 '어떻게 일할 것인지' 되물어보는 시간이었으니까요. 조만간 이 책과 대화 나누는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 [가만한 당신] 첼로를 든 스위스 의사 비트 리히너, 캄보디아 어린이를 보듬다 읽어보기

리히너는 의사부터 병원 미화원까지 자신을 뺀 전 직원의 급여를 '현실화'했다. 2002년 기준 월 생활비 260달러가 드는 프놈펜의 공공의 월급이 20달러였다. 그러니 부업을 해야 했고, 뇌물을 받아야 했고, 약품을 빼돌려 팔아야 했다고 한다. 그는 칸타보파의 미화원에게 초임 200달러, 간호사에게 200~300달러, 의사에겐 600~700달러를 지급한다고 밝혔다. 대신 일체의 뇌물과 비리는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성공의 관건"이라며 그 전제가 '합당한 급여'라고 말했다.

칸타보파 병원이 자랑스럽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니라고, 재정자립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그 문제를 푸는 데 몰두했다. (중략) 리히너는 "입원한 아이들을 안고 사진 찍는 걸 싫어한다.(…) 그건 저질스럽고(kitsch), 무례한 짓이다. 그들을 돕는다는 발상 자체가 무례다"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그는 모금을 위해 그런 사진들을 찍어야 했다. 


= 혜강: 연재 칼럼 '가만한 당신'의 10월 29일 자 기사에서 소개한 비트 리히너라는 인물, 참 흥미로웠습니다. 제가 흥미를 느낀 지점은 의사인 그가 '자신이 개선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알았고, 실제로 그 일들을 온갖 갈등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해나갔으며, 평생 지속했다'는 부분입니다. 한편으로는 추구하는 가치와 현실 사이에서 그가 감당해야 했던 인간적인 고뇌도 느껴집니다. 매일의 분투 앞에서 첼로를 연습하는 30~40분 동안 오롯이 행복을 느꼈을 모습을 가만히 떠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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