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섀퍼의 돈> 책을 읽다가 이 문장에 꽂혔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을 세상도 사랑한다.'
예전 같으면 제일 싫어했을 말이었다.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줄 알고, 사랑도 받는다는 이야기를 제일 싫어했다. 나는 사랑을 받지도 못했었고, 사랑을 주는 것도 몰랐고, 당연히 받지도 못한다.. 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이런 말을 웃으며 고개 끄덕이며 받아들인다. '그렇지, 그렇지'
나는 운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어렸을 때를 다 기억할 수도 없지만, 자꾸만 튀어나오는 생각들은 대부분 그랬다. 안 되고, 실망하고, 허무하고, 외롭고. 초등학교 2학년 때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2학년인데도 친구들보다 늦게 시작한 편이라 진도가 바이엘 정도였다. 딸 셋의 첫째였고, 연년생, 4살 아래 동생들이 있으니 쪼들리는 살림에 학원 보내주시는 것도 쉽지 않았다. 늦어도 피아노를 칠 수 있음이 좋았다.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이 수업 시간 선생님을 보면서 손은 책상 아래 서랍에서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었다. 손가락 움직임이 좋았었다.
피아노 학원은 발표회가 있다. 발표회 하기까지의 고단한 연습은 힘들지만, 하루 예쁜 옷도 입고, 공주님 된 듯한 시간을 보고, 열심히 준비하는 날이다. 우리 학원에서도 발표회가 정해졌다. 모든 학생이 올라갈 수는 없어서, 선생님이 몇 명을 선발했다. 나도 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꽤 많은 인원이지만, 선발된다는 것 자체로도 신이 났다. 2학년이다 보니 너무 어린 학생들보다는 선생님이 끼어 주신 것 같다. 내향적인 아이라, 좋다는 표현은 하나도 못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 날을 상상하며, 피아노가 있는 작은 방 안에서 열심히 연습하던 어느 날,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현순아, 미안한데 이번 발표회 때 사람이 많아서 너는 못하게 됐어. 다음에 더 연습해서 나가자."
...
"네, 선생님"
잠깐의 정적 동안 이미 내 눈은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선생님은 대답을 듣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문을 열고 나가셨다. 나는 그때 생각했다.
'역시 나는 안 되는구나. 기대를 하지 말아야겠다'
초등학교 6학년은 졸업식 날 성적 우수자들에게 우등상을 준다. 성적이 뛰어난 건 아니지만, 나름 조용하고 성실한 학생이었다. 우등상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받고 싶어 졌다. 욕심이 났다. 아무에게도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점수도 열심히 따져보고, 유력한 경쟁자들도 눈여겨보았다. 몇 달을 가슴에 품은 꿈을 위해 달려왔고, 졸업식 날이 서서히 다가왔다. 담임 선생님이 책상에 앉으셔서 아이들을 한 명씩 부르더니, 점수를 알려 주시고, 뭐라 뭐라 이야기를 해 주셨다. 떨리는 마음을 안고, 선생님 앞에 가자마자 책상 위의 점수표 먼저 확인했다. 52명의 아이들 이름 옆에는 과목별 점수가 있고, 총점이 있고, 몇 개의 칸에는 '우등상'이 쓰여 있었다. 6학년의 어린 나이여도 다 아나보다. 내 이름 옆의 '우등상'을 열심히 찾았다.
없었다. 빈칸이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마지막 시험은 잘 봤어. 근데 영점 몇 차이로 점수가 안 된다. 우등상은 아깝게 못 받는다."
...
"네"
선생님의 차가운 냉기에 창피하고, 꿈꿨던 나 자신이 부끄럽고 초라했다. 자리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역시 난 안 되는구나. 기대를 말아야겠다.'
분명 살면서 기대하고, 이루어졌던 일들도 있었다. 뜻하지 않게 부반장이 되기도 하고, 나름 큰 교회에 다니면서 어린이날 성경봉독에 뽑혀서 어른들 앞에서 당차게 읽어냈던 날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의 뇌는 사춘기가 되어 좌뇌가 발달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립을 하는 과정에서 큰 오류를 범했다. 나는 안 되는 걸로, 기대해 봤자 실망만 하니까 앞으로도 조용히 살아가자고 말이다. 기대 후 찾아오는 실망과 좌절이 너무 아프니까 나를 보호하려고 그랬을지 모르겠다. 대신에 나라는 사람을 믿지 않게 됐다. 세상을 믿지 않았다. 세상에 내 편은 없다고 믿었다. 나의 세상은 회색빛이 되었다.
그랬던 내가, 이제 나이 사십이 넘어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을 세상도 사랑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우주가 내 편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정말 우주가 내 편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렇다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 '우주는 내 편이야'라고 선택했다.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