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내가 원하는 것을 시각화하며 생생히 꿈꾸기로 했다. 결과에 치중하기보다는 될 거라고 믿고, 과정에 있어 기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보기로 했다. 실패했을 때의 타격이 두려워 과정에서도 열정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삶의 태도를 선택하게 된 것은 아마도 엄마라는 시간을 통과하면서였던 것 같다.
27살부터 시작된 엄마라는 역할은 삶에 있어 축복이자 난관이었다. 곰이 동굴에서 마늘과 쑥만 먹으며 사람이 되기를 고대했던 것처럼 나에게는 엄마라는 시간이 그랬다. 고 3 때 상담사라는 꿈을 정하고, 미래에 대해서는 막힘없이 내가 원하는 길을 선택해 왔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상담사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원에 진학해야 했었다. 대학원 졸업 후에는 3년이라는 수련을 받아야 전문가 자격증을 딸 수 있었기에 상담사 일과 수련을 병행하면서도 미완성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에도 해내고자 하는 목표가 확실했기에 불안정한 수입과 타인과의 비교에서도 굳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처 상담사로서 입지를 확실히 다지지 못한 26살에 결혼을 했고, 27살에 엄마가 되고 나니 과연 이 길을 내가 완성 지을 수 있을지 자신감이 바닥을 쳤다.
십여 년 전에는 어린이집 지원이 많지 않았을 때라 아기를 시어머님께 맡겨두고, 돈을 내고 일하는 격인 수련을 받으러 간다고 할 수가 없었다.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상담소에서도 전문가를 따지 못한 상담사의 페이는 적었기에 집안 경제적으로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으니 아이를 맡기고 가는 것과의 사이에서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아기도 중요하지만, 나의 일도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일주일에 하루, 아니 반나절이라도 일을 이어가겠다고 했다. 이렇게라도 나의 경력이 이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직감을 붙들고 둘째 아이 출산까지 간신히 파트타임이라는 동아줄을 잡고 왔다.
두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우고 나니 거리의 상담센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본격적으로 일하고 싶으면서도 나를 상담센터에서 받아줄까 하는 걱정이 되었다. 마침, 사석에서 우연히 알게 된 사설 상담센터의 실장님께 상담사를 구하고 있다며 명함도 받은 터라 용기를 내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로 메일을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앞으로 나의 삶은 어떻게 가야 할지 앞이 깜깜하고, 좌절하고 있을 때 생생하게 꿈꾸면 이루어진다는 글을 읽은 것이다.
'그래, 해 보자.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 보자!!'
물론 본질인 상담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주말이면 아이들 맡겨놓고 상담 공부하러 달려 나갔다. 지금은 당연히 부모가 함께 아이를 키우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그때의 나는 늘 남편의 눈치를 보고, 내 할 일을 제대로 못하고 내 욕심만 차리는 것 같았다. 남편도 가족을 위해 열심히 돈 벌고, 일하고 왔는데 주말까지도 쉴 수 없다는 것에 불만이 컸었다. 그래도 미래를 위해 더 이상은 미룰 수가 없었기에 앞만 보기로 했다. 지치고, 불안할 때마다 원하는 미래를 시각화하며 보다 재미있게 도전할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미래를 눈에 보이게 이미지로 만들어서 가까이에 두고 보고,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그 일이 이뤄졌을 때의 기분을 느껴보기. 미래와 현재의 연결고리 사이에서 나는 이미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제일 먼저 실장님께 받은 명함을 꺼냈다. 화이트로 실장님의 성함과 직책을 지우고, 나의 이름과 최고의 상담사라는 직함을 적었다. 그리고, 지갑에 이 명함을 넣고 늘 나와 함께 다녔다. 다음에는 상담센터 홈페이지 속 상담실 사진을 챙겼다. 상담실 풍경을 눈에 담은 후, 눈을 감고 저 의자에 내가 앉아서 상담을 하고 있다고 상상했다. 따듯한 햇살이 내리쬐는 그곳에서 내가 상담을 하고 있다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언제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렇게 해도 상담센터의 연락은 없었다. 이메일을 보낸 지 벌써 봄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바뀌었는데 뭐라도 더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때, 내가 원하는 미래의 장소에 가보라는 글이 생각났다. 마침, 상담센터 근처에 병원진료를 받으러 갈 일이 생겼다. 몸도 성치는 않았지만 상담센터 장소를 열심히 검색해서 찾았고, 엘리베이터로 6층까지 올라갔다. 차마 현관문을 열고 로비까지 들어가지는 못하겠고, 입구 앞에 서서 그곳의 분위기를 열심히 저장했다. 그리고, 혼자 되뇌었다.
'그래, 여기에서 내가 일하게 될 거야. 곧 만나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9월의 햇살이 아직 뜨거워서 땀은 뻘뻘 흘렸지만, 장소를 보고 나니 왠지 마음이 든든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다 했다고 나를 토닥여 주었다. 이렇게 해도 안 되는 것을 어찌하랴. 나를 자책하기보다는 인연이 아닌 것이라 믿게 됐다.
11월에는 오랜만에 친정 식구들과 함께 해외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 며칠이라도 다시 대한민국에 발을 디디는 비장함과 함께 휴대폰의 전원을 켰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 있었고, 아무 생각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000 상담센터입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강의도 하고, 칼럼도 쓰고, 책도 쓰게 되었고, 만 6년을 행복하게 보내게 된 곳과 이렇게 인연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