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uni Jul 27. 2019

어쩌면 우리는 운명 두 번째 이야기

우리는 부부다  #3

‘굿모닝!  잘 잤어요?’

알람이 요란히 울리고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채로 핸드폰을 확인하면 항상 그의 문자가 와있다.

나보다 늦게 잠이 들고 나보다 일찍 일어나는 그는 잠이 별로 없는 거 같다. 밥보다는 잠을 선택하고 별일이 없을 때는 12시간도 넘게 자는 나와 반대인 그는 늦잠을 자는 일이 거의 없다.

난 잠 많은 남자가 싫었다. 게을러 보인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인데, 솔직함을 하나 더 덧붙이자면 상대방이 나보다 잠을 많이 자면 난 그냥 짜증과 심술이 났다. 무슨 못된 심보냐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잠이 많지 않고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한 그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금요일 밤, 그렇게 우연히 마주친 이후로 우리는 매일 연락을 하고 있다. 내가 밥은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오늘 컨디션과 기분은 어떤지, 먹고 싶은 건 없는지.. 빠짐없이 물어봤고 자기는 지금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고, 누구랑 있는지 등등.. 내가 굳이 묻지 않아도 나에게 꼬박꼬박 얘기했다. 거의 보고 수준에 가까울 만큼 미주알고주알 다 말하는데 내가 알던 크리스가 이렇게 섬세한 남자였나싶다. 그렇다고 쓸데없이 하루 종일 핸드폰을 손에 쥐고 시도 때도 없이 나에게 문자나 전화를 하진 않았다. 짧고 간결하지만 그 속에 다정함과 배려심이 가득 들어있었다.


나는 말 많은 남자가 싫다. 과거에도 싫었고 지금도 싫다. 말이 많으면 그만큼 실수하는 횟수도 늘어나기 마련이고 가벼워 보인다. 전부가 그렇다고는 단정 짓지 않겠지만 보통 말이 많으면 행동보다 말이 앞선다. 말이 적고 먼저 행동으로 옮기는 남자가 멋있고 믿음직스럽다. 그는 말이 많지 않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중함이 깃들어있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연락 문제에 대해 민감하다. 남자 친구랑 연락이 제때제때 닿지 않거나 내가 기대하는 것만큼의 연락의 횟수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신경이 매우 곤두서곤 했었다. 그래서 내 연애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연락인데, 그는 내 needs를 100% 만족시켰다. 99%도 아닌 100%를 만족시켰다. 와.. 이 남자 뭐지?


사실, 그가 따뜻하고 좋은 사람인 건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그의 전 여자 친구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어떻게 하는지, 아이들에게 그리고 윗사람에겐 어떻게 하는지 옆에서 봐왔기 때문이다. 특히 전 여자 친구한테 하는 걸 보고 되게 스윗한 남자구나..라고 쭉 생각해왔던 거 같다.


토요일 점심쯤에 만나서 우린 점심을 먹고 카페를 가고 산책을 하고 하루 종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던 1년 반의 시간이 무색할 만큼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는 날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내가 내 방에 들어가서 "나 방이에요."라고 문자를 보내면 그제야 안심하고 본인의 집으로 향했다. 잠에 들기 전엔 핸드폰이 뜨거워질 때까지 통화를 했는데 그의 중저음 목소리가 멋있다. 우린 그다음 날인 일요일에도 만나서 데이트를 했고 평일에도 퇴근 후에 매일 만났다.

그의 눈은 유난히 동그랗고 크고 맑은데 강아지의 눈과 흡사하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까맣고 큰 눈이 반짝인다.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나의 눈빛과 몸짓에 재빨리 반응하는 그가 신기하다. 그가 좋아진다.




2주 후 토요일에는 친한 오빠의 결혼식이 있었다. 대학교 사모임에서 만나고 친해진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모임을 하고 있었는데 그 오빠들 중에 한 명이 장가가는 날이었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기를 받는 나는 모임이 이래저래 다양하게 많다. 그중에 언니, 동생들 그리고 여자 친구들도 많지만 친한 오빠들과 남자 사람 친구들도 그만큼 많아서 전 남자 친구들이 꽤 신경을 썼었는데 그도 역시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한 시간 남짓 떨어져 있는 지방에 위치한 결혼식장에 "XX오빠차 타고 갔다 올게요."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나에게 그는 같이 차 타고 가는 오빠는 혹시 여자 친구가 있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응 있어. 아마 둘이 결혼할걸?"라고 대답하는 내 말에 조금 안도를 하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사뭇 귀엽다.


"예식 끝나고 지금 밥 먹는 중이야. 밥 먹었어요? 안 먹었으면 거르지 말고 챙겨 먹고."

예식이 끝나고 피로연을 하는 도중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직 밥 생각이 없어서 안 먹고 있었는데 그대가 먹으라고 하니까 억지로라도 먹어야겠다^^"

답장이 칼같이 왔다. 아직 사귀는 사이는 아니지만 썸을 열심히 타고 있는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언젠가부터 서로를 '그대'라고 부르고 있다. 거기에 존댓말은 덤이다. 또 문자가 연달아 왔다. "혹시 언제 돌아올 예정이에요? 약속 있어요?"

따로 정해진 선약은 없었지만 결혼식에 함께 온 멤버들끼리 뒤풀이하고 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느새 나의 손가락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아니 약속 없어! 그럼 그대는 오늘 약속 있어요?"라고 쓰고 send 버튼을 눌러버린다. 1분도 안돼서 그에게 칼 답장이 왔다.


"그럼 우리 겨울바다 보러 갈래요? 조개구이도 먹고?"

오 마이 갓! 지금 나의 드레스 코드는 하이힐에 얇은 스타킹에 원피스에 얇디얇은 캐시미어 코트 입은 게 다인데 겨울바다를 보러 가고 조개구이도 먹자고? 게다가 오늘 엄청 추운데 이대로 바다 갔다가는 나 얼어 죽을 수도 있는데..

한참을 고민했다. 집에 들어가서 옷 갈아입고 다시 나오기가 번거롭기도 하고 엄마, 아빠한테 어딜 가고 언제 집에 돌아오겠다고 설명할 생각 하니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가야겠다.

"겨울바다? 좋아!! ^^ 대전 도착할 때쯤 전화할게요."

오후 늦게 대전에 도착했고 우리는 바로 대천으로 향했다. 대전에서 대천까지는 약 1시간 30분이 걸린다. 가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서 통감자와 맥반석 오징어를 사서 간식으로 먹었다.

"아 해봐!"

운전하느라 한 손으로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그를 위해 내가 한 말에 그가 흠칫 놀란다. 운전하는 그의 입 속에 통감자와 오징어를 넣어주는 게 그리 대수로울 일인가 싶었는데 그는 정말 행복해한다. 그런 그의 모습이 좋다.


대천바다에 도착하고 내 눈에 들어오는 건 시커먼 바다였다. 이미 해가 지고 어두움이 드리워져있었다. 겨울이라서 해가 빨리 진다. 바닷바람이 꽤 많이 차다. 원래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인데 옷도 얇고 찬 바닷바람이 얼굴과 몸을 휘갈겨 대는데 온몸이 오들오들 떨리고 정신을 하나도 못 차리겠다. 진짜 얼어 죽을 거 같다.

아 괜히 왔나.라고 혼자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순간, 그가 내 손을 잡는다.

앗...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두근 거리기 시작했다.


작가의 이전글 어쩌면 우리는 운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