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잘 지내? 라는 물음에 선뜻 대답하기 어려워졌다. 잘 지낸다고 대답하기에는 명치에 쌓여있는 고민과 걱정이 생각난다. 대뜸 잘 못 지낸다고 말하기에는 상대방의 당황스러운 얼굴이 떠올라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열 몇 시간의 시차를 극복하고 날아온 안부 인사에 구구절절 하소연하기도 민망하다. 약간 머뭇거리다가 결국 그냥 그래 정도의 대답을 찾는다.
직장 상사는 나에게 걱정 인형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는 성격에서 착안한 것이다. 남편은 내 이름이 문제라고 농담한다. 이름이 '신경은' 인 탓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이란다. 이름을 바꾸면 이 성격도 바뀌려나. 종종, 아니 늘 지나치게 예민하고 걱정을 거듭하는 내 성격이 버겁게 느껴질 때가 많다.
외국어를 쓰는데다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이국에서의 삶은 나의 걱정력을 한층 더 높였다. 새벽이면 작은 소음에도 잠에서 깨기 일쑤였다. 심지어 잔뜩 예민해진 마음은 제법 현실적인 공포로 다가오기도 했다.
남편과 유모차를 끌며 산책했던 어떤 날, 중년 남성이 길가에 놓여있던 굵은 나무토막을 들고 걸어왔다. 순간 '저 물건으로 우리를 위협하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뇌리를 스치며 몇 초 사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유모차를 들고 뛰어야 하나, 내가 유모차를 들고 뛸 수 있을까, 남편은 어떻게 챙겨야 하지? 오금이 저린다는 말이 딱 맞는 기분이었다. 몇 분 남짓 사이 등줄기에 식은땀이 났다. 하지만 오만가지 걱정이 무색하게 이내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당신들을 위해 나무를 치워줬다고 말했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고맙다고 인사했지만 짧은 시간 느낀 공포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쓰고, 다양한 문화권이 공존하는,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과 생각이 함께 살아가는
이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약간의 설렘과 대부분의 긴장과 함께 하기 마련이다.
오늘도 잘 지내? 라는 안부 연락에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해 그냥 그래 라고 대답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