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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Sep 30. 2020

아름다움은 어떻게 느껴지는가? [부르디외]

"칸트의 미학은 부르주아의 미학일 뿐이다."


사실 칸트의 미학은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부르주아계층의 미적 의식을 정당화하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칸트가 의식적으로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칸트는 단지 자신의 미적 경험을 반성함으로써 아름다움이 인간의 무관심한 관조로부터 가능하다는 것을 일반화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 부르주아계층의 일원으로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교수였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미학은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과 사회적 신분이 동일한 사람들, 즉 당시 특정한 도시의 부르주아계층에게만 적용될 만한 것이었다. 사실 대부분 노동자계층의 속한 사람들은 누드화를 철저하게 무관심하게 볼 수도 없을 것이다. 어떤 성적인 흥분이나 동경을 마음에 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부르주아계층 사람들이 단지 무관심하게 누드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몇몇 예외적인 사람들은 항상 있기 마련인데, 그럼에도 그들은 대개 자신들이 미술관에서는 성적인 무관심한 척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아름다움', 즉 칸트의 미학을 너무 순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부르디외 Pierre Bourdieu (1930~2002) ≪구별짓기 La Distinction≫라는 기념비적 저작을 쓰게 된 진정한 동기라고 할 수 있다.


부르디외 Pierre Bourdieu (1930~2002)
칸트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관심을 분리시키려고 노력했다. 첫째는 미적인 관조를 미학적이도록 보장해주는 유일한 특징인 '무관심 disinterestedness'이고, 둘째는 '쾌적한 것'을 규정하는 '감각의 관심 the interest of the senses'이며, 그리고 셋째는 '선함'을 규정하는 '이성의 관심 the interest of Reason'이다. 이와 반대로 민중계급은 단순히 기호의 기능에 그치더라도 모든 이미지가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기를 기대하며 아주 분명하게 모든 판단을 내리려고 한다. 따라서 민중계급에게 죽은 병사를 찍은 사진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재현 대상의 현실 또는 그런 재현이 수행할 수 있는 기능을 갖는다. 다시 말해 이 사진은 보는 사람에게 전쟁에 대한 공포심을 갖도록 하거나, 아니면 사진가가 보여주려고 하는 전쟁에 대한 공포감을 보는 사람이 거부하면서 일정한 판단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 예술을 둘러싼 투쟁에서는 항상 특정한 생활양식에 대한 강요가 핵심적인 요구로 자리 잡고 있다. 하나의 임의적인 생활양식을 전통적인 생활양식으로 만들면서 나머지 다른 생활양식을 자의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려는 시도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구별짓기: 판단에 대한 사회적 비판≫


≪구별짓기≫를 통해서 부르디외는 인간에게는 자신을 타인으로부터 구별하려는 강렬한 욕구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런 구별짓기의 본능에서 가장 중요하고 강렬한 계기는 바로 다름 아닌 미적 취향이다. 그가 부제로 '판단력에 대한 사회적 비판 Critique sociale du judgement'을 선택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부르디외는 칸트가 말한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부루즈아계층에 국한된 소수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무관심하게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태도 자체가 이미 상당한 돈과 시간을 투자해 학습한 결과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르디외는 칸트의 순수미학과 구별되는 대중의 미학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경제적, 정치적 권력이 없어서 미적인 학습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대중도 나름대로 미적인 판단을 수행하고 있다. 물론 대중에게 아름다움은 감각적 쾌적함이나 윤리적인 메시지가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들은 칸트와는 달리 핏빛 사진을 보고 감각적인 불편함을 느끼거나 아니면 도시의 자본주의 생할이 가진 비정함을 함께 읽어내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부르디외가 대중 미학만이 진정한 미학이라고, 다시 말해 정서적으로나 관념적으로 구체적인 무엇인가를 의미해야만 아름다움이 가치 있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 생각과는 달리, 아름다움이란 물질적 조건을 다르게 갖고 태어난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방식으로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부르디외는 계급에 따라 미적 취향이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했던 것일 뿐이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상류 부르주아계급처럼 생활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무관심의 판단에서 찾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 노동자계급은 “모든 미적인 이미지가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기를”. 다시 말해 ‘관심을 가진 미적인 판단’을 지향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 죽은 병사를 찍은 사진에서는 반드시 전쟁의 비정한 혹음 인생의 고통과 같은 분명히 가능한 구체적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무관심한 예술적 차원에서 사진을 보려는 부르주아계층의 취향과 구별될 만한 것이다. 이 점은 경제적·정치적·문화적 조건들에 따라 ‘미적 취향’도 천차만별로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논증을 통해 부르디외가 시도했던 것은, 칸트의 미학이 결코 보편적이지도 그리고 유일한 미적 기준도 아니라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잠깐 칸트의 숭고미가 현대철학에서 어떻게 독해되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부르디외가 칸트의 아름다움에서 부르주아계급이 갖고 있는 무의식적 계급의식, 혹은 구별짓기의 의식을 찾아냈던 것처럼, 현대철학에서는 칸트의 숭고미를 통해 산업자본주의의 논리를 찾아낸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리오타르 Jean-Francois Lyotard (1924~1998)라는 현대 프랑스 철학자가 칸트의 숭고미를 독해하는 한 방식이다.


리오타르 Jean-Francois Lyotard (1924~1998)
어느 시대에 등장하든 간에, 모더니티는 기존의 믿음을 산산이 부수지 않고서는 그리고 “실재의 결여”를 발견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 ‘숭고’는 상상력이―단지 원리적으로만 어떤 개념과 어울릴 수도 있는 ―어떤 대상을 표현할 수 없을 때 발생한다. …… 어떤 작품도 우선 포스트모던해야만 모던하게 될 수 있다. 이렇게 이해된 포스트모더니즘은 곤경에 빠진 모더니즘이 아니라 발생 중에 있는 모더니즘이고, 이런 상태는 불변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조건 La Condition Postmoderne≫     


산업자본주의는 소비자로 하여금 새로운 상품을 구매하도록 유도하여 잉여가치를 남기는 메커니즘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산업자본주의가 추구하는 ‘새로움’이 일종의 강박이나 저주처럼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새로운 상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반드시 낡아지기 때문에, 산업자본은 새로운 제품을 강박적으로 계속 만들어내야만 한다. 이런 이유로 처음 산업자본주의를 접했을 때, 우리는 산업자본주의가 추동하는 세계를 ‘모던세계’로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을 의미하는 라틴어 형용사 ‘모데르나 moderna’에서 ‘모던’이란 말이 유래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과거에는 접히지 못했던 새로운 상품들이 백화점의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진열되어 있는 광경을 떠올려보면 ‘새로운 세계’, 즉 ‘모던 세계’가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간다. 결곡 모던 세계는 산업자본이 만들어 놓은 새로운 상품들이 무한정 펼쳐진 세계였던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사실이 산업자본주의를 처음 접했을 때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새로움이란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결국 포스트모던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모던을 지향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상품도 다른 새로운 상품이 나오는 순간 낡아질 수밖에 없다. 계속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 새로움의 강박증은 불가피한 법이다. 그래서 모던은 자신을 극복해야만 모던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된다. 리오타르가

“어떤 작품도 우선 포스트모던해야만 모던할 수 있다”

라고 이야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모던은 포스트모던해야만, 다시 말해 모던을 ‘넘어서야만 post’ 역설적이게도 계속 모던한 것으로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모던의 계속 새로움을 넘어서려는 강박증적 운동을 상징하는 ‘포스트’라는 단어에 온전히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모던의 저주받은 강박증을 리오타르는 이제 칸트의 숭고미 개념과 연관시킨다. 칸트에게서 ‘숭고’란 상상력이 대상을 표현할 수 없을 때, 정확히 말해 너무 압도적이어서 그것을 표현할 수단이 없을 때 발생하는 미적인 감정이었다. 예를 들어 우리를 압도하며 엄청난 굉음을 내면서 떨어지는 폭포, 혹은 수백 미터 수직으로 하늘로 솟구쳐 나를 압도할 것만 같은 암벽 앞에 예기치 않게 마주쳤다고 해보자. 이 경우 우리는 그저 입만 벌리고 서 있을 수 밖에 없다. 이 순간 우리는 숭고미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숭고미를 강제했던 폭포나 암벽을 두세 번 반복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에게 찾아온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첫 번째 보았을 때 느꼈던 숭고의 감정을 계속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리오타르는 이것이 바로 산업자본이 생산한 새로운 상품의 운명과 구조적으로 같다는 것을 직감했던 것이다. 새로운 상품을 반복적으로 접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에서 더 이상 새롭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칸트의 숭고미 역시 매번 엄청난 대상을 새롭게 만나지 않는 이상 우리에게 발생하기 어려운 감정으로 이해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부르디외와 리오타르로 인해 칸트의 미학은 위기에 봉착한다. 이것은 , , 라는 삼위일체를 붕괴시키려는 칸트의 시도가 좌절될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 미학의 독립은 칸트에게 있어 인간의 마음이 무관심의 상태에 있을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런데 부르디외는 미를 느끼는 학습된 무관심의 이면에는 프롤레타리아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고자 하는 집요한 계급적 관심이 있다는 걸 찾아냈다. 결국 무관심은 무관심이 아니었던 셈이다. 이제 남은 건, 비자발적 무관심에서 느껴지는 숭고라는 감정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리오타르에 의해 의문시되고 만다. 숭고는 일회적 감정에, 다시 말해 새로운 것에 직면했을 때 발생하는 일회적 감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숭고의 감정은 신상품에 대한 감정과 구별되지 않기에 순수한 미적 감정이란 지위도 박탈당한다.


이것은 모두 칸트의 미학이 부르주아계급과 산업자본주의 체제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의 미학을 묵수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체제를 문제 삼지 않겠다는 삶의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칸트의 무관심은 정치경제학적 삶의 조건에 대한 무관심과 함께했던 셈이다. 그리고 이런 무관심 속에 자본주의 체제는 승승장구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칸트 이전으로 미학이 회귀해서도 안 된다. 미와 숭고를 가능하게 했던 무관심이 정체경제학적 관심과 결합될 수는 없을까? 만약 가능하다면 칸트의 관조의 미학은 혁명과 창조의 미학으로 비약할 수도 있을 듯하다. 이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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