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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Oct 09. 2020

아름다움은 어떻게 느껴지는가? <고찰>

관람의 미학에서 창조의 미학으로


벤야민은 '아우라aura의 상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우라는 예술작품의 반복 불가능성, 혹은 단독성에서 유래하는 유일무이하다는 느낌 혹은 분위기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에로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눈 유일무이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것이 대신할 수 없는 미적인 아우라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대량 복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에서 그는 말한다.


"복제에서 빠져 있는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현존성을 우리는 아우라라는 개념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이다. …… 복제기술은 복제품을 대량생산함으로써 일회적 산물을 대량 제조된 산물로서 대치시킨다. 복제기술은 수용자로 하여금 그때그때의 개별적 상황 속에서 복제품과 대면하게 함으로써 그 복제품을 현재화한다. 이 두 과정, 즉 복제품의 대량생산과 복제품의 현재화는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것을 마구 뒤흔들어놓았다.“


벤야민의 지적은 날카롭다. 이제 <모나리자>는 유일무이한 것이 아니라, 지나칠 정도로 많아진 셈이다. 티셔츠에, 벽지에, 혹은 머그잔에, 심지어 문신으로도 <모나리자>는 도처에 출몰한다. 이런 대량 복제기술로 <모나리자>는 마침내 아우라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미적 가치의 문제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실마리 하나를 얻을 수 있다. 칸트일상적인 관심과 이론적인 관심을 떠나서 어떤 사물을 바라보았을 때 만족을 준다면, 그것이 바로 미적 가치를 가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적 가치의 문제가 그렇게 주관적인 차원만 갖는다는 것은 너무 소박한 생각이 아닐까? 오히려 미적 가치는 ‘가치’ 일반이 가진 사회적 차원을 함축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미적 가치도 교환 과정을 통해서만 생성되고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주저 《돈의 철학 Philosophie des Geldes》에서 짐멜은 청년 벤야민의 스승답게 가치란 대다수의 사람이 욕망하는 것이 희소할 때에만 발생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미 가치에는 나 외의 다른 타자, 그들의 시선이 개입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결국 사람들이 욕망하긴 하지만 매우 희소한 상태의 대상에 대해 느껴지는 감정, 바로 이것이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의 다른 의미였던 셈이다. 부르디외가 말했던 구별 짓기에 대한 무의식적인 취향, 그리고 리오타르가 말한 새로움에 대한 강박증적 집착 역시 이 아우라의 느낌과 관련된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비록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미적인 가치를 가질 수는 없게 될 것이다. 결국, 칸트가 이야기했던 아름다움은 부르디외와 벤야민에 의해 해체되고 만다. 더군다나 아름다움과 함께 미적인 것의 쌍벽을 이루던 숭고도 리오타르에게 조롱거리로 전락해버렸다. 새로운 표현 기법이나 새로운 작품이 나온다고 해도, 그것이 산업자본주의에 포획된 신상품의 논리에서 얼마나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 칸트의 미학이 죽은 개 취급받는다는 것은 그가 애써 확보했던 미학의 독립성이 훼손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현대미학은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칸트 미학을 수리해서 더 단단한 반석에 올려놓을 것인가? 아니면 칸트 이전의 미학, 그러니까 진선미의 삼위일체를 표방하던 전통 미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인가? 현대미학의 운명을 가늠하느라 우리가 쉽게 간과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플라톤도 칸트도 부르디외도 리오타르도 심지어 벤야민마저도 모두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예술가가 아니라 관람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 철학자들은 고급 관람객이나 혹은 고급 평론가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지금까지 우리는 관람의 미학만 다룬 셈이다. 그러나 미학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술작품을 만드는 예술가가 아닐까? 일단 예술작품이 만들어진 다음에야 관람도 그리고 평론도 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창조의 미학, 즉 예술작품을 만드는 예술가의 내적 메커니즘을 알려주는 창조의 미학의 실마리는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흥미롭게도 그것은 서양에서가 아니라 동아시아 제자백가에서 먼저 찾을 수 있다. 《장자》의 <전자방 田子方>편을 먼저 읽어보자.


”송宋나라 원군元君이 어떤 그림을 그리려고 하자, 여러 화공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화공들은 그림을 그리라는 명령을 받고 읍하고 서서 붓을 빨며 먹을 가는데, 방 안에 미처 들어가지 못한 화공들이 반수를 넘을 정도였다. 어떤 화공이 뒤늦게 도착하였지만 여유로운 듯이 종종걸음을 하지도 않았고, 명령을 받고도 읍하고 서는 일도 없이 자신에게 배정된 숙소로 돌아가 버렸다. 원군은 사람을 시켜 살펴보게 하였는데, 그는 옷을 벗고 다리를 쭉 뻗어 벌거숭이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보고를 받자 원군은 말했다. ‘됐다! 이 사람이 진짜 화가 眞畵者’다.”


자신의 초상화나 아니면 다른 그림을 갖고 싶었던 어느 군주가 진짜 화가를 고르는 에피소드다. 진짜 화가는 주변의 인간관계와 권력 관계마저 의식하지 않는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이다”라는 니체의 말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그는 다진 자신이 그릴 그림에만 집중할 뿐이다. 그러니 자신과 그림 이외에 일체의 것들을 의식 속에서 깨끗하게 지워버린 것이다. 진짜 화가의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은 이렇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예술작품을 창조하기 직전 예술가의 내면, 즉 어린아이와 같은 내면은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장자》의 <달생 達生>편에는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하나 실려있다.


“재경梓이라는 유명한 목수가 나무를 깎아서 악기 받침대를 만들었다. 받침대가 만들어지자 그것을 본 사람들은 귀신의 솜씨와 같다면 놀라워했다. 노나라 군주 악기 받침대로 보고 재경에게 물었다. ‘자네는 어떤 방법으로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러나 재경이 대답했다. ‘저는 비천한 목수인데, 무슨 별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받침대를 만들 때 저는 기氣를 소모하는 일이 없이 재계하여 마음을 고요하게 만듭니다. 사흘 동안 재계하며 축하, 상 , 그리고 작록 등에 대한 기대를 마음에 품지 않게 됩니다. 닷새 동안 재계하면 비난과 칭찬, 그리고 잘 만듦과 그렇지 않음에 대한 기대를 마음에 품지 않게 됩니다. 이레 동안 재계하면 문득 내 자신에게 사지와 몸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게忘 됩니다. 이때가 되면 국가의 위세에 대한 두려운 생각이 마음속에 없어지게 되고 안으로는 마음이 전일 해지고 밖으로는 방해 요인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런 다음에 저는 산림으로 들어가 성징과 모양이 좋은 나무를 살펴보다가, 완성된 악기 받침대를 떠올리도록 만드는 나무를 자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저는 결코 나무에 손을 대지 않습니다. 저의 역량과 나무의 역량이 부합되니 以天合天, 제가 만든 악기 받침대가 귀신 이 만든 것 같다고 하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재경이란 목수는 지금 입장에서 보면 조각가라고 할 수 있다. 분명 그는 누군가의 주문으로 악기 받침대를 만든 것이다. 제작 과정에서 주문자를 의식하는 순간, 재경은 그냥 단순한 목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재경은 예술가의 반열에 올라서 있다. 주문과 완성 사이, 즉 악기 받침대 제작 과정에서 그의 의식에 들어오는 것은 악기 받침대를 만들겠다는 막연한 생각뿐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만들어지는 악기 받침대는 전적으로 이런 막연한 제작 계획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악기 받침대를 만들지를 결정하는 것은 산속의 나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산속에서 그는 완성된 악기 받침대를 떠올리게 하는 나무와 우선 마주쳐야만 하기 때문이다. 악기 받침대라는 막연한 관념이 완성될 악기 받침대라는 구체적인 관념으로 변하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 바로 이 순간에 재경의 뇌리에는 악기 받침대라는 막연한 관념마저 사라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특정 나무가 강제하는 완성될 악기 받침대라는 구체적 관념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악기 받침대는 재경이 만드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마주친 나무가 강제하는 것인지 식별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마치 나무가 스스로 자신을 악기 받침대로 탈바꿈하는 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의 역량과 나무의 역량이 부합한다.”는 재경의 말이 중요하다. 동아시아에서 천天인人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인人이 어떤 인위적인 의도나 노력을 가리킨다면, 천天은 어떤 의도도 없는 자발적인 움직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결국, 재경의 손과 나무의 결이 어떤 매개도 없이 마주치는 것이 바로 창조의 과정이었던 셈이다. 질료들의 충돌! 몸들의 충돌! 이를 통해 귀신이 만든 것처럼 정교한 악기 받침대가 탄생한 것이다. 결국, 창조에서 관건은 관념이 아니라 몸, 플라톤의 용어를 빌리자면 형상이 아니라 질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니체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게 나는 말하련다. 저들로서는 이제 와서 마음을 바꿔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전과 다른 새로운 가르침을 펼 필요가 없다. 그 대신에 자신들의 신체에게 작별을 고하고 입을 다물면 된다. ‘나는 신체이자 영혼이다.’ 어린아이는 그렇게 말한다. 어찌하여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이야기하지 못하는가? 그러나 깨어난 자, 깨우친 자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나는 전적으로 신체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며, 영혼이란 것도 신체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붙인 말에 불과하다’고. 신체는 커다란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 가축 떼이자 목자이다. 형제여, 네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그 작은 이성, 그것 또한 너의 신체의 도구, 이를테면 너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자 놀잇감에 불과하다. 너희들은 ‘나 Ich’라고 말하고는 그 말에 긍지를 느낀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 자아보다 더 큰 것들이 있으니 너의 신체와 그 신체의 커다란 이성이 바로 그것들이다. 커다란 이성, 그것은 ‘나’라고 말하는 대신에 그 자아를 실천한다.”


예술작품이 탄생하는 순간, 예술가는 ‘나는 신체이자 영혼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른다. 그림도 그렇고, 글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고, 조각도 그렇다, 그저 손이 움직인다. 춤을 추듯 손이 캔버스에서, 오선지에서, 키보드에서, 혹은 나무토막에서 움직이고 정신은 그저 자신의 손에 경탄할 뿐이다. 그러니 일상적인 자아와는 다른 자아, 일상적 자아보다 더 거대한 창조적 자아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신체적 자아 혹은 자아적 신체라고 말해도 좋다. 결국, 신체의 운동, 혹은 실존 전체의 운동에서 분리된 ‘자아’ 혹은 ‘정신’은 그보다 더 거대한 ‘신체적 자아나 ‘신체적 정신’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신이란 것, 신체가 그것은 어떤 존재인가? 신체가 벌이는 싸움과 승리를 알리는 전령사, 전우 그리고 메아리 정도가 아닌가. …… 형제들이여 너희들의 정신이 비유를 들어 이야기하려 들면, 항상 주목하라. 바로 거기에 너희들의 덕의 근원이 있으니. 그렇게 되면 너희들의 신체는 고양되고 소생하게 되리니. 신체는 자신의 환희로 정신을 매료시킨다. 정신으로 하여금 창조하는 자, 평가하는 자, 사랑하는 자, 그리고 온갖 사물에게 선행을 베푸는 은인이 되도록.”


어쨌든 예술가는 신체가 가고자 하는 대로 끌리는 사람이지만, 평론가는 자신의 정신으로 예술작품을 포획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예술가는 어린아이와 같고, 반대로 아무리 우호적인 평론가라고 해도 관객은 어른일 수밖에 없다. 어린아이를 이해하려고 해도 어른은 결코 어린아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물론 이것은 예술작품을 만든 예술가에게도 그래도 적용된다. 예술작품이 완성된 순간, 그러니까 창조의 순간이 지나자마자, 예술가는 어린아이에서 다시 어른으로 되돌아올 테니 말이다. 결국, 신체의 움직임에 홀린 듯이 이끌리지 않는 예술가나 혹은 정신만으로 예술작품을 이해하려는 평론가나 모두 창조의 순간에서는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창조의 순간을 그나마 비슷하게라도 포착하고 싶다면, 우리는 어린아이의 자발적 유희를 관찰하는 것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20세기 최고의 평론가라고 할 수 있는 벤야민이 《일방통행로 Einbahnstraße》에서 했던 것도 바로 이것이다.


“교육가들은 심리학에 홀려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아이들의 주목을 끌고 그들이 갖고 놀 수 있는 온갖 지할 데 없는 물건들이 넘쳐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만무하다. 딱 안성맞춤인 물건들이 말이다. 아이들은 성향상 특히 사물을 다루는 방법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쫓아가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건축, 정원 일이나 가사, 재봉이나 목공에서 발생하는 쓰레기에 끌리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쓰레기로 발생하는 것 중에서 아이들은 사물들의 세계가 바로 자신들에게, 자신들에게만 돌리고 있는 얼굴을 인식한다. 그것들을 이용해 아이들은 어른들의 작품을 모방하기보다 그냥 놀다가 만든 것을 통해 실로 다양한 종류의 소재 상호 간에 새로운, 비약적인 관계를 만들어 낸다. 그런 식으로 그들만의 사물 세계, 커다란 사물 세계 속의 작은 사물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 낸다.”


바로 이것이다. 어른이면서 어린아이의 희열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예술가다. 사물들이 자신에게 말을 걸고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는 사람. 그래서 주변에서 정신 차리라고 충고를 듣는 사람. 타인의 작품을 모방하는 걸 지루한 일이라고 아는 사람. 그래서 주변에서 학습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지탄받는 사람. 즐겁게 사물들을 만지다가 그것들 사이에 전적으로 새로운 비약적 관계를 만들어 내는 사람. 그래서 기존 사람들한테서 세계의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비난을 받는 사람. 자기만의 스타일로 자기만의 세계를 확고히 만들어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사람들한테서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고 무관심에 방치되는 사람. 이런 사람이 예술가가 아니면 누가 예술가일 수 있겠는가. 불행히도 지금 우리는 어린아이면서도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 아니 더 심각한 것은 어린아이마저도 다 살아버린 어른처럼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예술가는 사라지고 관객만 남는 살풍경이 벌어지는 시대에 산다는 건 정말 남루한 일이다.


관람과 창조는 다른 것이다. 그래서 관람의 미학과 창조의 미학은 다를 수밖에 없다. 창조가 없다면, 어떻게 관람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결국, 칸트 이후 발달하기 시작해서 아예 미학과라는 이름으로 제도화하는 데 성공한 관람의 미학은 원천에서부터 재고되어야 한다. 아니 미학과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국문학과, 불문학과, 심지어 철학과마저도 창조보다는 기존 작품의 향유와 평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실정 아닌가. 이런 향유와 평가는 예술작품의 창조에 비해 무가치한 활동일 가능성이 크다. 아무리 장미에 대해 미사여구를 늘여 놓는다고 하더라도, 이것으로는 들판의 장미꽃 한 송이조차도 피워내지 못하는 법이니 말이다. 더군다나 부르주아 사회에서 예술작품에 대한 미학적 평가가 예술작품의 상품가치와 소비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창조의 미학을 체계화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창조는 자신을 정당화하는 창조의 미학이 없이도 충분히 창조의 역량을 발휘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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