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손 Henri-Louis Bergson (1859~1941)은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모든 철학자는 두 가지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철학과 그리고 스피노자의 철학을.”
그만큼 스피노자는 어떤 사람의 입정에서 보더라도 매우 중요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철학사에서 스피노자가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은 범신론 pantheism과 평행론 parallelism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그는 범신론을 통해 초월적인 신에게서 개체들을 해방시켰다. 둘째, 그는 평행론을 통해 정신과 신체는 동일한 우리 삶의 두 가지 표현에 불과하다고 해명했다. 과거 정신과 육체의 작용은 반비례 관계에 있다고 보아온 해묵은 편견이 해소된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평행론은 동양 사유의 특이성을 이해하는데도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하겠다. 동양 사유, 특히 중국 사유에서 평행론은 근본적인 대전제가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대학大學≫이란 유학 경전 속에 ‘심광체반 心廣體胖’이라는 흥미로운 표현이 등장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오랫동안 정신 수양을 한 사람만이 몸이 초췌해져서는 안 된다고 본 것인데, 바로 이 때문에 “마음이 넓어지면 몸이 윤택해진다.”라는 발상을 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기본적으로 스피노자의 관점을 공유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와 달리 기독교에서 숭상하는 성인들을 묘사한 그림 혹은 조각상을 살펴보면, 그들 대부분은 매우 마르고 수척한 상태로 묘사되어 있다. 이 경우 흔히 몸의 수척함이란 것은 거꾸로 정신의 순수함과 맑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물론 기독교에서 정신의 순수함을 강조한 것은, 신이 창조한 것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영원한 것이 다름 아닌 정신 혹은 영혼이라고 이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신에 비해 육체는 한 인간에 불과한 나의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기 때문에 열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육체의 역량이 줄어들수록 혹은 육체의 욕망을 통제할수록 우리는 신에게서 받은 정신의 역량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점은 기독교에서만 관찰된 입장은 아니었다. 플라톤도 "철학이란 죽음의 연습이다."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대화편 ≪파이돈 Phaidon≫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플라톤은 철학의 가치가 제대로 죽기 위한 연습 과정에 놓여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물론 정신 혹은 영혼의 불멸성 그리고 지혜를 얻는 데 오히려 육체가 장애가 된다고 보았던 관점을 잘 보여준다. 플라톤은 오직 육체의 벽을 벗어남으로써만 인간이 참된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훗날 기독교는 그리스 철학과 별다른 충돌 없이 잘 융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점은 유럽과 같은 어군인 인도유럽어족에 속한 언어를 가지고 있던 인도의 경우에도 유사하게 적용할 수 있다. 싯다르타는 영원 불명하는 자아를 부정하면서 인간의 일상적인 삶을 긍정했던 사상가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도인들이 만들어놓은 싯다르타의 조각상, 즉 부처상은 너무도 깡말라서 뼈가 드러나 있는 형상을 띠고 있다. 흔히 초인적인 고행, 혹은 육신에 대한 엄격한 학대를 통해 싯다르타가 열반이라는 대자유에 이른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브라흐만과 같은 초월자를 부정하고 나아가 지나친 금욕생활에 반대했던 싯다르타의 모습은, 이렇게 해서 그 후의 인도인들에 의해 이상한 형태로 왜곡돼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불교가 동아시아, 특히 중국에 들어보면서부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게 된다. 삐쩍 마른 부처상이 풍만한 부처상으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동아시아 사람들이 정신과 육체에 대해선 이미 스피노자적인 입장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인들은 완전히 이상적인 인물이라면, 부처 역시 정신과 육체 모두 건강한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인도에서 오해되었던 싯다르타가 동아시아에 들어와 우연찮게 자신의 외양을 갖추게 되었던 것은 어찌 보면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불교는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사유 체계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마음의 고통이 우리의 삶 자체를 무기력에 빠뜨린다는 점이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의 고통은 결국 육체의 무기력으로도 드러난다. 역으로 우리 마음이 가진 고질적인 집착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열반이라는 자유의 경지를 얻을 수 있게 된다면, 우리 몸은 그만큼 활력을 되찾게 될 것이다. 결국 열반이나 해탈은 우리가 가진 정신적 능력을 해방시켜줄 뿔만 아니라, 동시에 육체적인 활력도 되찾아 줄 수 있어야 한다. 동아시아로 유입된 불교, 특히 선불교의 전통은 이 점을 가장 명확히 보여준다. 물론 마음에서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당연히 선불교도 마음의 문제에 자신들의 모든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 때문에 마음에 너무 몰입하여 자신의 신체성을 배려하지 못하는 경우도 가끔 발생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식의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해탈이나 열반은 정신의 역량을 깨우고 또한 마침내는 신체적 역량도 깨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깊이 통찰했던 인물도 있었다. 마음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 전자가 종밀 宗密 (780~840)이란 스님이었다면, 육체석의 문제를 고려한 후자의 경우는 바로 임제 臨濟(?~867) 스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