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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Dec 09. 2020

마음은 무엇인가? [종밀]

"거울 이미지로 마음을 체계화하다."

종밀 宗密 (780~840)

종밀 宗密 (780~840)은 한국 불교사와도 매우 관련이 깊은 중국의 불교 사상가이다. 그는 선교일치 禪敎一致를 가장 강하게 피력함으로써 보조국사 普照國師 지눌 知訥 (1158~1210)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이다. 선교일치란 글자 그대로 "선종과 교종은 그 가르침이 일치한다"라는 의미이다. 실제로 그는 도원道園이란 선사에게 선종의 수행을 배웠으며, 화엄종 제4조 인 징관澄觀 (738~839)에게는 화엄 철학을 배우기도 했다. 이런 개인적인 경험이 그로 하여금 선교일치를 주장하도록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불교 전통이 참선을 뜻하는 정定 그리고 통찰을 의미하는 혜慧를 모두 긍정한다는 점에서, 종밀의 주장은 이론적으로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생각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선종과 교종이 불과 얼음처럼 대립되는 소모적 투쟁을 벌였던 것이 동아시아 불교의 역사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주장은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선교일치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논증을 하던 종밀은 선종 특유의 개념인 '자성청정심 自性淸淨心' 개념을 끌어들여 마음의 구조를 논하게 되었다. 사실 이 개념은 여래장 如來藏 tathāgatagarbha이란 개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래장은 글자 그대로 부처가 될 수 있는 잠재성을 의미한다. 여래장 개념은 ≪여래장경 如來藏經≫에서 최초로 사용된 이래, 원효의 주석으로 유명한 ≪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 등에서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선종의 유명한 슬로건 '견성성불 見性成佛', 즉 "자신의 불성을 보면 바로 부처가 된다"라는 주장에서 불성 佛性  buddha-dhātu 이 곧 여래장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선종에서 이야기하는 '자성청정심'은 바로 이 여래장이나 불성을 의미하던 것이다. 바로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두고 종밀은 인간 마음에 불변하는 어떤 마음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의를 전개한다.


망념은 본래 적막하고, 대상은 본래 공한 것이다. 하지만 공하고 적막한 마음은 신비하게도 알아서 어둡지 않으니, 바로 이 하고 적막한 앎空寂之知이 너의 참다운 본성이다. …… 하나의 진정한 마음의 본체心體는 공한 것도 아니고 차 있는 것도 아니지만 공할 수도 있고 채울 수도 있는 것이다. …… 거울 속 영상의 경우 푸른 것을 노랗다고 이야기할 수 없어서 고운 것과 추한 것이 명확히 구별된다. …… 그리고 거울의 영상에는 자성自性이 없어서 영상 하나하나가 전부 공한 것이다. …… 하지만 거울의 본체는 항상 밝아서 공하지도 않고 푸르거나 노랗지도 않지만, 공할 수도 있고 푸르거나 노랄 수도 있다.
〈선원제전집도서 禪源諸詮集都序〉


신회(神會, 670~762) 계승했다고 자부하던 종밀이 거울 비유를 통해서 마음의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은 의외의 일이다. 선종의 6, 그러니까 신회의 선생 혜능이 이미 마음을 거울에 비교했던 신수를 비판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마음을 거울로 비요하면서 때가 끼지 않도록 매일 닦는다는  역시  하나의 집착이라고 보았기에 헤능은 신수를 비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혜능을 이었다고 자부하는 종밀이 이제 다신 신수의 거울 비유를 들고 나온 것이다. 거울 비유를 다시 언급하면서 종밀은 마음의 본성이 "공하고 적막한 "이라고 단언했다. 우선 그는 "공하고 적막한 ", 혹은 마음의 존체가 공할 수도 있고  있을 수도 있지만  자체로는 공하지도  있지도 않다고 이야기한다. 어찌 보면 이해하기 힘든 주장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종밀은 친절하게 마음의 본체를 거울에 빗대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는 우선 거울의 본체와 거울의 영상을 구분한다. 거울이 담고 있는 영상에는 푸른 것과 노란 , 고운 것과 추한 것이 명확히 구분된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이런 영상들은 각각 일시적인 이미지에 지나지 않은 것이므로 공하다고   있다. 반면 거울의 본체는 항상 밝은 채로 존재하는 것이다. 사실 밝지 않다면 거울은 어떤 외부 대상도 제대로 비출  없을 것이다. 여기서 종밀이 거울의 본채를 흥미롭게 묘사하는 부분이 있다. "거울의 본체는 항상 밝아서 공하지도 앍고 푸르거나 노랗지도 않지만, 공할 수도 있고 푸르거나 노랄 수도 있다." "항상 밝아서 공하지도 않고 푸르거나 노랗지도 않다"라는 앞부분의 표현은, 거울에 외부 대상을 밝게 비출  있는 역량이 존재하지만  자체로는 규정될  없다는 뜻이다. "공할 수도 있고 푸르거나 노랄수도 있다"라는 뒷부분의 설명은, 외부 대상과 만나지 않으면 거울은 어떤 영상도 가지지 않을 것이지만 푸르거나 노란 외부 대상과 만나면 푸르빛이나 노란빛을   있다뜻이다. 바로   측면에서 종밀은 마음의 본체를 "공하고 적막한 "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여기서 '공하고 적막하다 空寂'라는 특성이 어떤 대상도 비추지 않은 거울의 상태를 가리킨다면, ' '이란 것은 모든 것을 밝게 비출  있는 거울의 잠재성을 의미한다. 종밀의 마음 이론이 어렵다면, 지눌의 이야기를 조금  들어보는 것이 도움이  수도 있다. 종밀을 높이 평가했던 지눌은 그의 마음 이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다.


진심眞心의 본체本體에는 두 종류의 작용用이 있다. 하나는 자성의 본래적인 작용이고, 다른 하나는 외적인 대상에 감응하는 작용이니 구리거울에 비유할 수가 있다. 거울의 바탕이 자성체自性體이고 거울의 밝음이 자성용自性用이라면, 밝음이 드러내는 영상들은 수연용隨緣用이다. 마음의 영상들은 외적인 대상들과 마주쳐야 드러나는데, 그 드러남은 무한히 다양하다. 밝음은 항상 밝아서 밝음은 오직 한결같으니, 이것으로 마음이 항상 고요한 것이 자성체이고, 마음이 항상 알고 있는 것이 자성용이며, 이 앎이 언어활동과 분별 활동 등을 수행하는 것이 수연용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


지눌의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라는 저서는 흔히 《절요節要》라고 줄여 부른다. 《절요》에서 중요한 대목은 종밀의 논의를 명료화하기 위해서 지눌이 이중으로 체용體用 논리를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체용 논리는 문제 되는 상황을 본체體 작용用으로 나누어서 설명하는 중국 사유 특유의 논리라고 볼  있다. 예를 들어 배가 물에 뜨는 것은 체용 논리로 설명하면,  자체가 본체이고  배가 물에 뜨는 것이  작용이라고 말할  있다.



지눌은 '밝은 거울' '거울에 비친 영상들' 관계를 체용으로 설명한다. 그가 '밝은 거울' 자성으로 '거울에 비친 영상들' 수연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여기서 수연이란 말은 "어떤 조건 (여기서는 외부 대상) 따른다"라는 뜻이다. 결국 거울의 자성과 수연이란 것은 '밝은 거울' 외부 대상에 따라서 영상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라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눌이 '밝은 거울' 자체도 이제 용으로 다시 나누어 설명한다는 점이다. '거울의 바탕' 체라면, '거울의 밝음' 용이라고 본 것이다.  때문에 결국 자성도 둘로  '자성체' '자성용'으로 구분되었다. 이어서 지눌은 거울 비유를 마음의 내적 구조에도 그대로 적용시킨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고요한 마음이 자성체이고, 마음이 항상 무엇인가를   있는 능력이 성용이다. 결국 자성체와 자성용의 마음 상태가 우리 마음 본체,  자성에 해당한다   있겠다.  시점에서 보면 아직 우리 마음은 어떠 외부 대상과도 만나지 않은 상태이다. 선종에서 자주 강조한 '자성청정심'이란 바로  상태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지눌은 이제 외부 대상과 만나서 언어와 분별 활동을 하는 '자성청정심' 수연용의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혜능의 계보에 속한 종밀이 다시 거울 이미지를 도입하는 무리수를 범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견성성불' 가르침을 견지하려고 했기 때문은 아닐까. 스승과의 직대면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려는 선종의 공부법보다 , 혹은 화두를 추체험하는 공부법보다, 종밀은 자기 내면의 불성을 응시하는 참선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거울의 밝음'으로 설명되었던 '자성용' 중요했던 것이다. 대화나 하두의 공부가 '수연용' 차원에 있다면, 견성이란 참선 공부는 '자성용' 차원에서 정당화될  있으니 말이다.


여담이지만 종밀의 시도는 간화선이 주류로 자리를 잡은 선종 내부에서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당시는 견성을 강조했던 묵조선 默照禪 죽은  취급을 받던 때였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종밀의 영향력은 중국이 아니라 선교일치를 꿈꾸던 고려의 지눌에게서 확인된다.   가지 기억해두어야  것이 있다. 그것은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종밀의 논의는 신유학新儒學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점이다. 자성용 차원에서의 수양과 수연용 차원에서의 수양!  차원에서 구양이 가능하다는 종밀의 주장은 신유학의 심성론과 수양론에서 그대로 반복된다. 신유학자들도  차원의 공부,  미발未發 공부와 이발已發 공부가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미발이 마음이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상태로서 자성용 차원 가리킨다면, 이발은 마음이 이미 드러난 상태로서 수연용의 차원 가리킨다. 자신의 심성론과 수양론이 불교계가 아니라 유학계에 영향을 끼쳤다는  알았다면, 종밀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정말 사상계의 아이러니라고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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