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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Dec 14. 2020

마음은 무엇인가? [임제]

"관조적 의식을 넘어 삶의 세계에서 자유를 꿈꾸다."


비록 종밀이 선교일치를 꿈꾸면서 도원이라는 선사에게서 선종을 공부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선종 사상은 결국 남종선의 전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수의 북종선에 가까운 것이었다. 거울 비유를 파괴하고자 했던 혜능의 남종선 전통에서 보면 그는 이단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가칠종 五家七宗으로 정리되는 남종선 계보에서 종밀이 제외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종밀은 거울 비유를 들어 자성청정심, 불성, 혹은 여래장이 마음의 실체라고 정당화했던 사상가이다. 하지만 '여래장' '불성' '자성청정심'과 같은 개념들은 불교 전통에서 그토록 거부했던 불변하는 실체 개념과 유사한 것이 아닌가?


이 상황에서 과거 혜능이 신수의 거울을 부수었듯이, 종밀의 거울을 부수려는 사상가가 나타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볼 수 있다. 마음을 실체로 보는 어떤 시도도 불교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임제 臨濟義玄(?~867) 선사의 중요성이 있다. 백장의 손자뻘 스님답게 그는 싯다르타, 나가르주나, 혜능으로 이어지는 불교의 정신, 즉 인간을 고통에 빠뜨리는 실체나 본질에 대한 모든 집착을 산산이 부숴버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임제어록 臨濟語錄》


정통 인도 철학에서 해탈은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서 다시는 윤회하지 않고 우리의 아트만브라흐만에 머무르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불교에서 해탈은 본질과 실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났을 때의 자유를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해탈이란 다른 어떤 것의 지배도 받지 않고 스스로 주인으로 서게 되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임제가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버려라"라고 그토록 강하게 역설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해탈에 대한 지나친 열망 때문에 자기 내면에 부처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면 이것마저도 제거해야 한다고 보았다. 부처가 되려는 열망이 오히려 고통을 낳아 해탈하는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외적으로 스승을 만났을 때 그 스승이 자신의 모범이나 혹은 이상향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결국 그 스승도 제거하라고 말한다. 스승을 본받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집착이며 해탈의 걸림돌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임제는 현실적으로 직접 스승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권위의 상징으로서 내면에 자리 잡은 스승의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이런 그에게 종밀의 자성청정심은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아마도 그는 '자성청정심'을 비유하는 맑은 거울 자체를 깨버려야 해탈할 수 있다고 역설했을 것이다. 임제가 죽이라고 역설했던 대상들은 사실 구체적인 현실적 대상들이 아니라, 내면에 우리를 지배하는 주인으로 들어서 있는 이상 혹은 특정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가 죽이려고 했던 대상은 프로이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초자아'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육체적 욕망을 반영하는 이드, 사회적 금기를 반영하는 초자아, 그리고 자아라는 마음의 위상학을 고려한다면, 초자아를 제거했을 때 남는 것은 자아와 이드뿐일 것이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조건은 그대로 남지만 말이다. 초자아를 제거한 자아는 이제 자신의 육체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 사이를 직접 매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임제의 다음 구절은 이런 측면에서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임제가 법당에 오르면서 말했다. "'벌거벗은 신체赤肉團에' 하나의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있어서 항상 그대들의 얼굴에 출입하고 있다. 아직도 이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거듭 살펴보아라." 《임제어록 臨濟語錄》


집착의 근원인 이상적인 초자아를 제거하는 순간, 우리의 자아는 자유를 얻게 된다. 임제의 '무위진인'이란 것은 바로 자유를 얻은 자아를 의미한다. '무위'라는 말은 정해진 자리가 없다는 뜻이다. 선생 앞에서 제자의 자리, 군주 앞에서는 신하의 자리, 아내 앞에서는 남편의 자리, 학생 앞에서는 선생의 자리, 남편 앞에서는 아내의 자리 등 자리라는 것은 바로 자신에게 기대되는 임무나 역할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임무나 역할로 인해 우리는 자신의 삶을 검열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리'란 결국 앞서 말한 초자아의 기능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임제가 참다운 사람, 즉 진인 眞人의 수식어로 '자리가 없음'을 든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주의를 기울여 보아야 할 것은, 초자아가 제거되었을 때 비로소 자아와 이드는 서로 화해하게 된다는 점이다.


오가칠종 계보도

초자아가 진정으로 우려했던 것은 바로 육체적 욕망, 즉 이드가 자아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초자아를 제거한 자아는 이제 이드를 검열할 이유가 없어진다. 이제 우리 자아는 이드의 욕망, 혹은 육체적 역능을 마음껏 향유하는 주체가 된다. 임제가 "'벌거벗은 신체'에 하나의 '무위진인'이 있어서 항상 그대들의 얼굴에 출입하고 있다"라고 말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벌거벗은 신체란 바로 검열에서 벗어난 우리의 육체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초자아를 제거하자마자 자아는 무위진인이 되고 결국 벌거벗은 신체와 통일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위진인 혹은 벌거벗은 신체는 어떻게 현실의 삶을 영위하게 될까?


불교의 가르침에는 특별히 공부할 곳이 없으니, 다만 평상시에 일 없이 똥을 누고 소변을 보며,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피곤하면 누워서 쉬는 것일 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을 알아들을 것이다. 옛사람은 "외부로 치달아서 공부하는 자들은 모두 멍청한 놈들이다"라고 하였다. 그대들이 어느 곳에서나 주인이 된다면 자신이 있는 그곳이 모두 참될 것이다 隨處作主, 立處皆眞.
《임제어록 臨濟語錄》


평상심平常心이 바로 도道라고 사자후를 토했던 선종의 정신은 바로 이로부터 생긴 것이다. 세계에 대한 모든 생각이 단지 마음에 수렴된다고 이야기했던 불교 사유가 임제를 통해서 생활과 몸의 세계로 내려앉게 된 것이다. 구체적 삶의 세계 속에 이미 진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임제의 통찰은 삶의 세계를 비트겐슈타인의 다음 이야기를 통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이 오직 사다리를 통해서만 올라갈 수 있다면, 나는 거기에 도달하려는 것을 포기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정말로 가야만 하는 곳, 그곳에 나는 원래 이미 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사다리에 의해 도달될 수 있는 곳은 나에게 흥미를 주지 못한다.
《문화와 가치 Culture and Value》


《논리철학논고》에서 청년 비트겐슈타인은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버려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것은 물론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면서 '말할 수 없는 세계'로 건너가려는 그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철학적으로 성숙해지면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초월의지를 스스로 버리고 만다. "사다리에 의해 도달될 수 있는 곳은 나에게 흥미를 주지 못한다"라고 술회할 정도로 말이다. 마침내 그는 임제가 도달했던 생활세계에 대한 긍정에 이르렀던 것이다. "내가 정말로 가야만 하는 곳, 그곳에 나는 원래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배변의 욕구가 느껴지면 배변을 하고, 추우면 옷을 입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누워서 쉰다. 너무나 쉽지 않은가? 지금 임제는 자유를 되찾자마자, 우리가 신체적 역량과 정신적 역량의 통일 속에서 삶을 영위하게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일상적인 사람들은 배변의 욕구를 느끼지만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서 참는다. 또 그들은 춥지만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 옷을 입지 않는다. 배고프지만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서 먹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심지어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 피곤하지만 졸음을 쫓기까지 한다. 이것은 그들이 자신의 삶의 역량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숭배하기 때문이다. "똥을 누고 소변을 보며,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피곤하면 누워서 쉰다"는 임제의 가르침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듯하다. 불교, 특히 선종에서 되려고 하는 부처는 직접적으로 말해 '삶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손님처럼 자신의 행동을 검열하지 않아야 부처가 될 수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남의 눈치를 보는 사람일지라도 삶의 주인이 되는 경험을 누구나 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대소변을 해결할 때다. 남의 눈치를 본다고 해도 어떻게 강력한 배변 욕구를 억압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배고플 때도 마찬가지고 졸릴 때도 마찬가지 아닌가. 어떻게 해서든지 밥을 먹으려고 할 것이고, 어떻게 해서든지 잠을 자려고 할 것이다. 하긴 남의 눈치를 본다고 해서 나오지 않는 대소변을 배설할 수도 없고, 남의 시선 때문에 배가 부른데 음식을 먹을 수도 없는 법 아닌가.


어쨌든 다른 무엇인가의 자리에는 '자본' '국가' '관습' '사회적 통념' '이상' '신' '부처' '불성' '자성청정심' '인간의 본성' 등 어느 것이라도 들어올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부자유가 놓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임제는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다른 무엇인가를 계속 '자리 位'라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무위진인은 자신의 육체적 역량을 긍정하며 행복을 느끼는 자유인이다. 배변의 욕구를 느낄 때 배변을 꺼리는 것은 다른 무엇인가가 주인이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배변의 욕구가 들 때 시원하게 배변을 하는 사람은 바로 그 순간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 그래서 임제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대들이 어는 곳에서나 주인이 된다면 자신이 있는 그곳이 모두 참될 것이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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