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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Aug 11. 2021

마음은 무엇인가? <고찰>

불교의 정수, 무상과 찰나멸의 가르침


혜능이 그렇게도 부수려고 했던 거울의 비유는 강박처럼 계속해서 불교 역사에 다시 나타났다. 혜능이 경고했던 것처럼 거울의 비유가 마음에 실체로 집착하게 만들고, 타자를 느끼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닦으려는 일종의 결벽증을 낳을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실제로 거울처럼 마음을 깨끗이 닦았다고 해도, 이런 마음은 세계를 풍경처럼 관조하는 마음이지 동체대비의 심정으로 세계와 섞여 들어가는 실천적 마음일 수는 없다. 관조하는 세계와 살아가는 세계! 이 두 세계는 다른 세계다. 전자가 창밖으로 폭풍우를 내다보거나 뉴스로 이웃들의 참사를 보는 세계라면, 후자는 온몸으로 폭풍우를 맞으며 냉기를 느끼거나 혹은 온몸으로 타인들의 고통에 전율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세상을 냉정하게 관조하는 귀족과 지식의 독백 세계라면, 후자는 타인과 일희일비하는 대화 세계라고도 할 수 있다.


로티 Richard Rorty (1931~2007)

지식인들의 관조적 이론 세계를 비판했던 로티 Richard Rorty (1931~2007)와 그의 신실용주의 enopragmatism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그는 차가운 관조적 세계를 벗어나야 우발성 Contingency아이러니 irony로 가득 차 있는 현실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확신했던 철학가였다. 흥미롭게도 로티가 관조적 세계를 부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손대려고 했던 것은 마음을 일종의 거울로 보는 전통적 생각이었다. 1929년 출간된 자신의 주저 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에서 로티는 말한다.

"대부분 우리의 철학적 확신을 규정하는 것은 명제라기보다는 이미지, 진술이라기보다는 은유다. 정통 철학을 사로잡고 있는 이미지는 마음을 커다란 거울로 보는 이미지다.…… 마음을 거울로 보는 이미지가 없다면, 인식을 표상 representation이 정확성이라고 보는 견해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런 인식에 대한 견해가 없었다면, 데카르트와 칸트에 공통된 전략, 즉 거울을 조사하고 수리하고 닦아서 점점 더 정확한 표상을 얻겠다는 전략도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


로티의 지적이 옳다면 우리는 마음이란 거울을 닦는 데카르트칸트 옆에 신수도 놓아야 할 것 같다. 자비와는 거리가 멀기만 한 유아론을 낳는 신수의 거울 비유를 가장 정교한 형식으로 발전시킨 사상가가 바로 종밀이다. 종밀이 후일 혜능의 후계자들에게 이단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이때 임제 선사의 등장은 거울 이미지가 다시 등장한 중국 불교의 역사에서 볼 때 불가피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다시 한번 거울 이미지를 부수려는 혜능의 노력을 반복하려고 했던 것이다. 불교라는 사유 체계에서 혜능과 임제의 시도는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전혀 때가 묻지 않은 깨끗한 거울처럼 본래 마음이 있다는 생각 자체가 싯다르타무아無我론과 충돌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특히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이런 본래의 깨끗한 마음을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나 불성佛性, 혹은 여래장如來藏으로 개념화하고 있다.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인성론과 그에 기반을 둔 수양론이 너무나 발달했던 탓일까? 그러니 중국에서는 인도 불교에서 거의 비주류에 가깝던 불성과 여래장 계열의 불교가 유행하게 된 것이다. 무아론을 부정하고서 어떻게 불교가 불교일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동아시아 사람들이 인성론을 강하게 믿고 있기에 방편의 차원에서 자성, 불성, 혹은 여래장과 같은 실체 개념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동아시아 최고의 불교 이론가 원효일 것이다. 실제로 여래장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보성론 寶性論, Ratnagotravibhāga을 보면 여래장은 공과 무아의 방편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 동아시아 불교 사상가들은 그렇지 못했다. 방편을 방편이 아니라 진리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불교를 처음 수입했을 때 혜원을 대표로 하는 중국의 불교 이론가들은 불교의 핵심 가르침을 불변하는 자아를 전제로 한 윤회설이라고 착각했던 적이 있다. 이런 쓴웃음을 자아내는 에프소드가 중국 불교의 불행한 역사를 미리 예감하는 원형적인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은 무아론이 가진 부작용일 수도 있다.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하는 싯다르타와 나가르주나의 논의를 접하는 순간, 그렇다면 실체로서의 자아를 극복한 자아, 혹은 진정한 자아는 존재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발생한 것이다. 《대승입능가경 大乘入楞伽經, Laṅkāvatāra Sūtra를 잠시 들여다보자.

"싯다르타가 말한 여래장의 뜻은 외도外道가 말한 아我와 같은 것 아닌가? 외도의 견해를 떠났기에 무아에 근거한 여래장을 말한다. 청정한 '진아 眞我'가 바로 여래장이다"
《대승입능가경 大乘入楞伽經, Laṅkāvatāra Sūtra》

한마디로 '무아지아無我之我', 즉 무아의 상태에 있는 아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진짜 자아'이고 여래장이라는 의미다.


결국 제법무아諸法無我로 정리되는 싯다르타의 가르침으로는 집착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원한 실체에 대한 열망을 종식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싯다르타의 핵심 가르침을 요약한 삼법인三法印에 무아의 가르침 이외에도 무상無常의 가르침이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이지 않을까? 삼법인이란 개념은 소승불교의 경전 중 하나인 성실론成實論에 최초로 등장한다.

"부처의 설법에는 삼법인이 있는데, 모든 것은 무아無我라는 설법, 조건 지어진 모든 것은 무無常하다는 설법, 그리고 모든 집착이 사라져서 열반에 이른다는 설법이다."
《성실론成實論》

결국 무상이란 강력한 변화의 가르침이 있다. 실체가 불변을 상징한다면, 불교 내부나 외부에 집요하게 남아 있는 실체에 대한 집착을 한 방에 날리는 방법은 아주 단순하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무상이라는 변화의 설법으로 일체의 아트만 논의를 무력화시키면 된다. 바로 이것이 불교 인식론의 완성자였던 다르마키르티 Dharmakīrti, 法稱 생각이었다.


다르마키르티 Dharmakīrti, 法稱

그래서 다르마키르티는 경량부經量部학파에서 유래한  개념 '찰나멸刹那滅, kṣaṇa-bhaṅga'에 집중한다. 순간적인 소멸을 의미하는 찰나멸에 대한 다르마키르티의 생각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려면 현대 열역학의 개념 엔트로피를 떠올리면 쉽다. 《양평석 量評釋, Pramāṇavārttika에서 그는 말한다.

"소멸하는 것에는 외적 원인이 없기에 존재는 그 자체의 본질에 따라 자발적으로 소멸하는 것이다."
《양평석 量評釋, Pramāṇavārttika》

조금 고급스럽게 이야기하면 '유有' 안에 '무無'가, 혹은 '존재'안에 '비존재'가 본질을 내재한다는 것이다. 다르마키르티는 바로 이 찰나멸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했다는데 그 특이성이 있다. 통상적으로 주어가 동일성이나 연속성을 가지지 않으면, 논리적 추론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찰나멸에 대한 논증식을 만들려는 다르마키르티의 시도는 정말로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어에 해당하는 존재가 순간적으로 소멸하는데, 이런 존재에 대해 어떻게 술어를 붙여 참과 거짓을 논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기에 다르마키르티 이후 불교 인식론 학파들은 불교 내부와 외부에서 활동하는 모든 실체론자들을 괴멸시킬 수 있는 찰나멸 논증식을 완성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것이다. 즈냐냐쓰리브하드라 Jñānaśrībhadra (975~1025)와 11세기에 활동했던 그의 제자 라트나키르티 Ratnakīrti가 그 대표적인 사상가였다. 다르마키르티, 즈냐냐스리미트라, 그리고 라트나키르티의 시도는 성공했을까? 논증식을 만든다는 것은 위자비량 爲自北量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위타비량爲他比量과 관련된다. 그러니까 실체를 믿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시켜 집착에서 해방시키고자 불교 인식론 학파들은 찰나멸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10세기에 아트마타트바비베카 Ātmatattvaviveka라는 저서로 찰나멸논증을 논박했던 우다야나 Udayana와 같은 철학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아 불교 인식론 학파들의 시도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 정확히 말해 우다야냐의 주서 제목으로도 등장하는 '아트만'이란 불변하는 실체에 대한 집착은 논리적 설득으로 쉽게 해소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듯하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위타비량의 여부를 떠나 불교 인식론 학파는 현량으로나 비량으로나 모두 찰나멸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긴 스스로 보았거나 혹은 스스로 납득되지 않은 것을 어떻게 타인에게 설득하려고 하겠는가? 찰나멸이란 역으로 말해 우리를 포함한 모든 존재찰나적 존재, 즉 간적 존재라는 걸 의미한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우리는 하루하루 변하고 끝내는 세상을 떠나는 존재라는 것이다.


영원한 실체에 집착한 사람들로서는 세속적 의미에서 인생무상을 이야기할 말한 비극적인 사태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그만인데 태어나서 죽는다는 것, 젊지 않았으면 그만인데 늙어간다는 것! 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그러나 영원한 실체에 대한 집착이 끊어지면 무상은 허무한 이야기가 아니라, 아주 긍정적인 가르침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냥 노골적으로 물어보자. 바람에 의해서 지든 아니면 질 때가 되어서 지든 찬란하게 피었다가 허무하게 지는 벚꽃이 좋은가? 아니면 가장 전성기 때의 모습을 플라스틱으로 정교하게 재현한 조화가 좋은가? 아마 전자가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찰나멸의 존재인 벚꽃을 좋아한다는 것은 무척 아픈 일이다.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싶은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이지만, 그 꽃은 나의 소유욕을 비웃는 듯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소유욕과 집착이 있다면 찰나멸은 우리 내면에 고통을 만들고, 심지어 우리를 허무주의에 빠뜨릴 수도 있다. 반대로 소유욕과 집착이 사라진다면, 찰나멸은 우리에게 모든 순간적 존재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가져다준다. 어차피 떨어질 테지만 벚꽃의 꽃잎들이 떨어질까 노심초사하는 마음, 이것이 동체대비의 자비심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결국 찰나멸은 이중적으로 작용한다. 우리가 영원에 대한 집착이 있다는 걸 아프게 자각하도록 만드는 계기이기도 하고, 동시에 모든 찰나적 존재에 대한 자비심을 일어나도록 하는 계기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무상을 이야기할 때 싯다르타의 마음, 찰나멸을 논증하려고 할 때 다르마키르티의 마음이 바로 이것이었다. 여래장, 진정한 자아, 혹은 본래 깨끗한 거울과 같은 마음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일으키기 어려운 자비심을 무상의 깨달음은 너무나 쉽게 알려준다. 로티가 거울을 깨고서 만나게 되는 세계가 아이러니의 세계였다면, 찰나멸의 세계를 만나면 우리 마음의 거울은 저절로 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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