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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Sep 23. 2019

언어는 무엇인가? [장년, 비트겐슈타인]

"언어는 삶의 문맥과 떨어질 수 없다."

케인스 John Maynard Keynes (1883~1946)

1929년 경제학자 케인스 John Maynard Keynes (1883~1946)는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 그 안에는 흥미로운 구절이 하나 들어 있었다. "신이 도착했다!" 도대체 신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논리철학논고≫로 철학적 문제들을 궁극적으로 해소했다고 자신했던 천재적 인물, 다른 아닌 비트겐슈타인이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왔던 것이다. 이것은 사실 의도치 못한 일이었다. 케임브리지로 돌아왔다는 것 자체는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을 다시 재개한다는 선언과도 같았는데, 도대체 그는 무엇 때문에 자신이 그만두겠다고 결정한 철학을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일까?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케임브리지를 떠나서 비트겐슈타인이 오스트리아 시골마을에서 약 6년간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했다는 점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곳에서 아이들 교육 문제로 지역 주민들과 매우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독일 철강왕을 아버지로 둔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으며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그로서는 오스트리아 시골 가난한 촌사람들과의 갈등이 불가피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가 가장 크게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곳 사람들의 언어 사용이었을 것이다. 매우 고상하고 지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던 비트겐슈타인에게 시골 사람들의 삶과 언어생활은 너무도 거칠고 지나치게 감정적인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고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하려고 했던 그의 원칙은 그곳에서 볼 때 오직 자기 자신만의 원칙에 불과했다는 것을 절감했다. 물론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원칙을 학생들이나 지역 주민들에게 억지로라도 관철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는 점차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곳 사람들도 나름대로 완벽한 언어생활을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런 그의 통찰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 분명하게 반영되어 있다.


서로 화해될 수 없는 두 원리가 실제로 마주치는 곳에서, 각자는 타자를 바보니 이단자니 하고 선언한다. 나는 내가 타자와 '싸우게'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도대체 왜 그 타자에게 근거들을 주지 못하는 것일까? 물론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어디까지 가겠는가? 근거들의 끝에는 (결국) 설득이 있을 뿐이다. (선교사들이 원주민들을 개종시킬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생각해보라.)
≪확실성에 관하여 Über Gewißheit≫


오스트리아 시골로 부임한 자신의 모습을 마치 미개인을 개종하려고 했던 선교사 같은 인물로, 그리고 그곳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원주민으로 비유하는 부분이 매우 흥미롭다. 선교사의 언어는 원주민의 언어와는 매우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선교사가 자신의 언어로 이루어진 원리를 원주민들에게 억지로 관철시키려고 할 때 갈등은 불가피하게 발생하고 말 것이다. 원주민들도 자신들의 언어로 구성된 고유한 원리를 이미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결국 선교사는 자신의 종교를 주장하기 위해 원주민들을 감정적으로 설득할 수밖에 없을 텐데, 바로 이와 같은 선교사의 모습이 오스트리아 시골의 초등학교 교사 비트겐슈타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대한 자신의 통찰이 얼마나 제한된 것이었는지를 직감하게 되었다. 마치 암스테르담에 도착해서야 자신의 사유가 프랑스와 같은 시골에서나 통용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놀랍게 자각했던 데카르트의 경우처럼 말이다.


오스트리아 시골마을에 머물 때 오직 논리적인 자연과학적 언어만이 말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던 비트겐슈타인의 신념은 심하게 동요되었다. 사실 자연과학적이거나 논리적인 언어들은 단지 유복하고 지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비트겐슈타인 같은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언어 양식이었을 뿐이다. 이런 그에게 오스트리아 시골에서의 교사생활은 그로 하여금 타자의 언어를 경험하고 발견하게 만들었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언어를 조금 더 면밀하게 검토하면 할수록 그것과 우리의 요구 사이의 갈등은 더 첨예해진다. (논리학의 수정 같은 순수성이란 물론 탐구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의 요구 조건이었다.) 그 갈등은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요구조건은 이제 공허한 것이 될 위험에 처해 있다. 우리는 마찰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이상적인 조건인 미끄러운 얼음에 올라섰지만 동시에 바로 그 이유로 인해 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는 걷고 싶다. 따라서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땅으로 돌아가라!
≪철학적 탐구 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청년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혼자만의 힘으로 구분하려고 했다. 그 결과 말할 수 있는 것은 외부 사실들과 관계들을 그림처럼 명확히 지시하는 것이어야만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런 젊은 시절의 생각이 이제 장년 비트겐슈타인의 눈에는 모두 유아론적인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논리학은 수정 같은 순수성"은 다양한 타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구체적인 언어들을 직접 탐구해서 만든 결과물이 결코 아니었다. 단지 이것은 자신이 유아론적으로 요구한 이상적인 조건에 불과했던 것이다. 어쩌면 이상적이라는 말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자백과도 같은 것이다. 마침내 비트겐슈타인은 청년 시절 자신이 확신했던 통찰이 현실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 셈이다. 이와 아울러 당시의 경험을 그로 하여금 삶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삶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빙판에서 홀로 노는 것이 아니라 마찰과 저항이 있는 거친 땅에서 타자와 함께 관계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자각했던 것이다.


우리는 걷고 싶다. 따라서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땅으로 돌아가라!


는 비트겐슈타인의 울부짖음은 자신의 ≪논리철학논고≫기 획이 좌절되었다는 것을 선언한 것과 다름없었다. 동시에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방향으로 자신의 철학을 재개할 것인지를 잘 암시해준다. 그가 돌아가고자 했던 '거친 땅'은 자신과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타자들, 그리고 그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 삶의 세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친 땅'에서 그가 발견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다양한 언어 규칙들을 가진 다양한 언어들이 존재한다는 통찰이었다.


우리가 언어라고 부르는 모든 것에 공통적인 어떤 것을 진술하는 대신, 나는 이러한 현상들에는 우리로 하여금 그 모두에 대해 같은 낱말을 사용하도록 만드는 어떤 일자가 동통적으로 있는 것이 결코 아니고, 그것들은 서로 다양한 방식으로 유사하다고 말한다.
≪철학적 탐구≫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언어'란 일본어, 영어, 프랑스어와 같은 모국어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삶의 문맥에서 사용되는 상이한 성격의 언어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가령 케임브리지와 같은 곳에서는 지성인들의 '언어'가 존재한다. 오스트리아 시골마을 같은 곳에서는 시골 사람들 특유의 '언어'가 존재한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활용하는 재래시장과 같은 곳에서 그곳 나름의 '언어'가 존재한다. 재판정도 자신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고, 유치원에서도 나름대로 독특한 '언어'가 통용된다. 같은 국어를 공유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처럼 다양한 삶의 문맥에 따라 다양한 '언어들'이 서로 다르게 혹은 유사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동일한 한 단어라도 삶의 문맥에 따라 전혀 다른 용례로 사용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머리가 좋다"라는 말은 '지적인 능력이 탁월하다'는 사전적 의미로만 사용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물론 이런 사전적 의미로만 사용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다른 문맥에서 보면 이 말은 '머리만 좋다'는 의미로, 그러니까 '말만 잘할 뿐 사실 행동은 그렇지 못하다"라는 매우 부정적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다.


≪철학적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이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서 그것의 쓰임에 있다" 수차례 강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것은 그가 ≪논리철학논고≫의 입장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청년 시절 그는 한 낱말의 의미가 그것이 지시하는 한 가지 대상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동일한 낱말이지만 그것은 다양한 언어들에서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의 그림이론과는 달리 언어를 일종의 게임으로 보는 입장을 피력하게 된다. 예를 들어 장기 게임체스 게임이 있다고 해보자. 장기나 체스에 사용되는 장기 말이나 체스 말은 각각의 낱말들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장기 말 중에서 차車라는 장기 말이 없다면, 우리는 체스 말들 가운데 비숍 Bishop을 가지고 와서 차라는 말 대신 사용하면 된다. 이 경우 누군가 장기판을 보고서 비숏은 그렇게 움직이면 안 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사람은 장기 게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체스 게임에서 사용되었던 비숍의 용례만을 고집하느라 다른 성격의 게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했을 것이다.


≪철학적 탐구≫의 첫 부분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그 언어에 얽히는 행위로 구성된 전체를 '언어 게임'이라 부르겠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언어를 게임이라고 비유할 때 비트겐슈타인이 의도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각 언어마다 고유한 규칙이 있다는 것, 그리고 각 언어 안의 낱말들을 그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각 언어마다 내재하는 고유한 규칙을 맹목적으로 배우고 따라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내가 규칙을 따를 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른다.
≪철학적 탐구≫


장기에는 포包라는 말이 있다. 보통 이것은 상대편이나 자기편의 말을 건너뛰면서 움직인다. 그렇지만 단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상대편이나 지기 편의 포는 뛰어넘지 못한다. 만약 누군가 포를 다른 포를 건너뛰도록 움직인다면, 우리는 그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렇게 움직이면 안 돼" 그러고는 우리는 그가 장기를 둘 줄 모른다고 추정하게 될 것이다. 이 경우 그가 "왜 그래? 뛰어넘어도 되는 것 아니야. 나는 이렇게 움직일래"라고 고집을 피운다면, 화가 난 우리는 그와 장기를 두는 일을 멈추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포가 움직이는 규칙을 배웠던 것일까? 우리는 자라면서 장기 두는 규칙을 맹목적으로 배웠을 뿐이다. 나는 다른 식의 규칙을 선택할 수가 없다. 만약 선택했다면, 그 누구도 나와 장기를 두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내가 규칙을 따를 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른다"라고 강조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내가 규칙을 따를 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른다.


장기에만 우리가 맹목적으로 따르는 규칙이 내재해 있을까? 그렇지 않다. 다양한 언어권에서도, 동일한 언어권이라도 지역마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군대에서도, 백화점에서도, 자세히 살펴보면 삶이 맥락을 이루고 있는 곳 어디에나 다양한 언어들이 존재하고 그만큼 다양한 규칙들이 존재하는 법이다. 비트겐슈타인이 항상 제발 "생각하지 말고, 보라!"고 강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 삶의 문맥에서 언어를 이렇게 사용될 거야"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지 보라는 것이다. 만약 주어진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다면, 혹은 주어진 규칙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언어가 통용되는 곳에서 자신의 삶을 제대로 영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가령 장기 게임의 규칙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장기 게임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시골에서 통용되던 규칙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은 그곳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언어들이 너무나 다양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다양한 국어들이 존재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같은 모국어를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다양한 삶의 문맥에서 다양한 언어들이 존재 가능하다는 통찰이었다. 이로 인해 다시 철학 작업이 시작되었고, 어느새 장년이 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인간의 삶 사이의 관계를 차근차근 다시 성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철학적 탐구≫를 포함한 그의 후기 저작들이다. 출간되지 않는 수많은 초고들에서 다양한 게임들에 비유될 수 있을 정도로 복잡하고 수많은 언어와 언어 규칙, 따라서 타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그의 성숙한 통찰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언어 게임들이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했던 것이다. 당연히 그것들을 고스란히 연구해서 하나의 체계로 환원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더군다나 새로운 통찰을 끌어낸 순간, 그 통찰을 흔드는 다른 언어 게임들이 그의 눈에 반복해서 들어오기까지 했다. 바로 이것이 말년의 비트겐슈타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성숙한 통찰을 담은 확정된 주저를 출간하는 걸 계속 미루도록 했던 원인이 아닐까?


서양철학사를 돌아보면, 칸트 이전까지 철학은 우주나 사물의 본질을 해명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보다는 오히려 외적인 대상들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칸트에 이르러 드디어 대상에 대한 관심은 주체에 대한 관심, 즉 '나'와 '나의 생각'에 대한 관심으로 전회되었다. 그 유명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회'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20세기부터 서양철학은 주체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 주체뿐만 아니라 대상까지도 규정하는 언어에 대한 관심으로 그 폭을 확장시켰다. 이것은 '언어적 전회 linguistic turn'라고 불릴 만한 철학적 혁명이었다. 철학에서 언어적 전회를 이끌었던 중심인물이 바로 비트겐슈타인이었다. 그렇지만 말년의 비트겐슈타인에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철학의 '언어적 전회'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언어와 관련된 모든 독단론과 신비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상당히 오랫동안 비트겐슈타인적일 필요가 있다. 아직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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