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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i Mar 26. 2024

산며드는 첫 번째 이야기

한라산

2024년 새해의 본격적 시작을 알린 첫 등산지가 감히 이 나라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정해지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물론 작년 여름쯤 직장 동료와 함께 새해 일출을 한라산에서 맞이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었지만, 지방 장기 출장이 예정보다 훨씬 길어지면서 그 계획을 전면 재검토할 수밖에 없었다.


새해 첫날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설경만이라도 보러 가자고 했다. 그리고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날짜를 정해 한라산 탐방을 예약했다. 출발 일주일 전 제주도 기온이 영상권으로 오르면서 자칫 눈도 못 볼 수도 있겠다는 불안함도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일 날씨에 비가 예보되어, 자칫 우중 산행을 하거나 아예 못 갈 수도 있었다. 이리저리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렇게 2월 4일 새벽이 밝았다. 차 타고 성판악 주차장에서 내렸을 때 만해도 보슬비가 끊이지 않았다. 우중 산행에 당첨됐지만, 하늘이 무너지도록 쏟아지듯이 펑펑 내리는 비가 아닌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백록담을 보는 건 사실상 포기해야 했지만, 한라산 등반이라는 목적만큼은 이룰 수 있어서 감사했다.


힘차게 걸음을 옮기며 등정을 시작했다. 어두 껌껌한 등산로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눈이 녹아 질퍽거리는 땅을 밟으며, 일행들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동트기 시작할 즈음, 겹겹이 껴입은 옷들을 하나둘씩 벗기 시작했다. 얼마를 그렇게 걸었을까, 쌓인 눈의 높이가 눈에 띄게 높아져 감이 보였다. 하나둘씩 등산 스틱을 꺼냈다. 시간이 꽤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해발 1,100m 지점이었다. 솔밭 휴게소부터는 아이젠을 끼고 이동했다. 오르면 오를수록 안개도 짙어졌다. 물기를 한가득 품은 공기는 차갑기에 그지없었다. 숨을 돌리려고 조금만이라도 멈추면, 금방 열기가 식어 체온이 떨어졌다. 애써 발걸음을 재촉하며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했다.


공기는 여전히 차갑고 습하고 찝찝했다. 대피소 안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밖에서 돗자리를 펴고, 한숨 돌릴 겸 밥을 먹었다. 어떻게든 체온을 유지해 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해도 여전히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조금만 더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누구 하나 동상 걸리겠다 싶었을 때쯤, 다시 길에 올랐다.

대장님을 제외하고, 다들 산을 그렇게 오래 타는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힘을 내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정상까지만 가자·정말 얼마 안 남았다 싶었을 때 비는 그쳤지만, 주변은 여전히 온통 회색빛이었다. 백록담을 보는 건 포기하고, 지금 여기에 오른 것만으로도 감사히 생각하자 했다. 그러다가 불과 100m만 더 가니 기적이 일어났다. 눈앞의 구름이 순식간에 걷히면서 푸른 하늘이 보였다. 제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다들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순식간에 없던 힘이 솟았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던 일행들도 신나서 얼른 가자고 했다.


정상에 도착했을 때 정말 감개무량했다. 

해냈다. 이뤘다. 스스로가 대견했다. 


눈앞에 펼쳐진 장관은 마치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자에게 주는 선물과도 같았다. 이래서 뭐든지 끝까지 하고 봐야 하는구나 싶었다. 조금 더 했을 뿐인데, 그 차이가 엄청나게 컸다. 중간에 발길을 돌리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벅찬 감동을 한껏 만끽하고, 하산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안내하는 방송이 나오자 그제야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4시간을 더 내려가고 나서야 원점 복귀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산에서 한 가지를 확실히 배웠다. 과정이 힘들고, 앞이 보이지 않아도 묵묵히 자기 목표를 향해 도전하고 나아가다 보면 끝에 가서 반드시 기적이 일어난다. 멈추지만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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